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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산 끝에 낳은 아이, 뒤늦게 드러난 진실
최씨 가문의 진짜 친딸인 최현아가 주진혁을 빼앗아 가던 그날, 나는 회임했다는 진단을 받았다. 8개월 뒤, 주진혁은 최현아를 부인으로 맞이하기 위해 성대한 혼례를 준비했고, 그 행렬은 십 리에 걸쳐 이어질 만큼 화려해 온 도성을 떠들썩하게 했다. 반면 나는 마음의 병이 깊어져 난산 끝에 과다출혈을 겪었고, 죽을 고비를 여러 번 넘긴 끝에 겨우 연우를 낳았다. 얼마 후, 저잣거리에 소문이 퍼졌다. 세자 주진혁이 부인과 함께 한밤중에 서산에서 말을 타다 실수로 절벽에서 떨어졌다는 것이었다. 최현아는 크게 다쳐 혼수상태에 빠졌고, 주진혁 또한 큰 부상을 입어 다시는 자식을 볼 수 없는 몸이 되었다고 했다. 나는 그가 연우를 빼앗아 갈까 두려워, 가슴을 졸이며 5년 동안 숨어 지냈다. 그러던 어느 날, 주진혁의 어머니인 김옥란의 환갑 연회가 열렸고, 나는 자수 공방에서 불려 와 주국공부에 들어가 일을 돕게 되었다. 그런데 하인방에 있던 연우가 실수로 밖으로 뛰어나왔다가 김옥란과 부딪쳤다. 현장은 순식간에 쥐 죽은 듯 조용해졌다. 연우의 얼굴이 어린 시절의 주진혁과 똑같았기 때문이다! 주진혁이 사람들을 헤치고 달려와, 잔뜩 쉬어 갈라진 목소리로 외쳤다. "너는 어느 집 아이냐?" 겁에 질린 연우가 울먹이며 소리쳤다. "어머니… 우리 어머니를 못 찾겠습니다." "어머니의 이름은 최설아입니다."
챕터 (1)
1화
최씨 가문의 진짜 친딸인 최현아가 주진혁을 빼앗아 가던 그날, 나는 회임했다는 진단을 받았다.
8개월 뒤, 주진혁은 최현아를 부인으로 맞이하기 위해 성대한 혼례를 준비했고, 그 행렬은 십 리에 걸쳐 이어질 만큼 화려해 온 도성을 떠들썩하게 했다.
반면 나는 마음의 병이 깊어져 난산 끝에 과다출혈을 겪었고, 죽을 고비를 여러 번 넘긴 끝에 겨우 연우를 낳았다.
얼마 후, 저잣거리에 소문이 퍼졌다.
세자 주진혁이 부인과 함께 한밤중에 서산에서 말을 타다 실수로 절벽에서 떨어졌다는 것이었다. 최현아는 크게 다쳐 혼수상태에 빠졌고, 주진혁 또한 큰 부상을 입어 다시는 자식을 볼 수 없는 몸이 되었다고 했다.
나는 그가 연우를 빼앗아 갈까 두려워, 가슴을 졸이며 5년 동안 숨어 지냈다.
그러던 어느 날, 주진혁의 어머니인 김옥란의 환갑 연회가 열렸고, 나는 자수 공방에서 불려 와 주국공부에 들어가 일을 돕게 되었다. 그런데 하인방에 있던 연우가 실수로 밖으로 뛰어나왔다가 김옥란과 부딪쳤다.
현장은 순식간에 쥐 죽은 듯 조용해졌다.
연우의 얼굴이 어린 시절의 주진혁과 똑같았기 때문이다!
주진혁이 사람들을 헤치고 달려와, 잔뜩 쉬어 갈라진 목소리로 외쳤다.
"너는 어느 집 아이냐?"
겁에 질린 연우가 울먹이며 소리쳤다.
"어머니… 우리 어머니를 못 찾겠습니다."
"어머니의 이름은 최설아입니다."
제1화
똑똑똑.
관리인이 손가락으로 내 자수틀을 가볍게 두드리며 말했다.
"최설아, 주국공부(楚國公府) 환갑 연회에 일손이 부족하다더구나. 네가 가서 하룻밤만 일손을 거들어라. 일당은 세 배로 쳐주마."
나는 망설여졌다.
김옥란의 환갑 연회라니, 그런 자리라면 옛 지인들을 분명히 마주칠 터였다. 게다가 밤에 연우를 혼자 집에 두자니 도저히 마음이 놓이지 않았다.
"관리인님, 제가 밤에는 아이를 돌봐야 해서…"
관리인의 목소리에 짜증이 묻어났다.
"네 부모에게 맡기든, 이웃에게 맡기든, 정 안 되면 국공부 하인방에 데려와 잠시 쉬게 하든 하거라."
"이 정도 일도 제대로 처리하지 못하겠느냐?"
옆쪽 자수틀에서 비웃는 소리가 들려왔다.
평소에도 말 많기로 소문난 장채은이었다.
"어머, 일당이 세 배라는데 나 같으면 진작에 달려갔겠다!"
"관리인님, 지금 최설아를 봐주시는 겁니까? 홀로 아비도 모르는 애까지 데리고 사니, 돈 들어갈 데가 오죽 많겠어요."
장채은의 말이 귀에 거슬리긴 했지만, 틀린 말은 아니었다.
날씨가 점점 추워지는데 연우는 하루가 다르게 쑥쑥 자라고 있어, 따뜻한 솜옷 한 벌을 새로 지어주고 싶던 참이었다.
어차피 연회장 바깥쪽에서 일손을 돕는 것뿐이니, 안채로 들어갈 일은 없을 터였다.
나는 결국 고개를 끄덕이며 일을 맡기로 했다.
"감사합니다, 관리인님. 가겠습니다."
"그래. 어서 옷을 갈아입거라. 유시(酉时)까지 주국공부 뒷문으로 모여야 하니 늦지 말아야 한다!"
옷을 갈아입으러 별채로 향하는 길에 장채은의 자수틀 앞을 지나치게 되었다.
그녀는 일부러 내가 들으라는 듯 목소리를 높였다.
"고상한 척은 혼자 다 하네. 중매도 혼례도 없이 아이부터 가져놓고는 여기서 잘난 척하기는. 아이 아비가 누군지도 똑똑히 말하지 못 하는 걸 보면, 어디서 굴러온 사생아인지 누가 알겠어."
풉.
맞은편에 있던 자수공이 입을 가리며 웃었고, 옆에 있던 어린 제자도 고개를 숙인 채 킥킥거렸다.
순간 눈시울이 뜨거워진 나는 더는 참지 못하고 뒤돌아 쏘아붙였다.
"장채은, 너도 자식 키우는 어미인데 입 좀 깨끗이 놀리거라."
장채은이 벌떡 일어나 팔짱을 끼더니 쏘아붙이듯 대꾸했다.
"내 입이 더럽다는 것이냐?"
"그럼 넌 깨끗하다는 것이냐? 여우처럼 남자를 홀리는 년이 아이 아비가 누군지도 제대로 말하지 못하면서, 순결한 여인인 척하기는!"
"내가 너라면 차라리 제 몸단장이나 잘해두겠다. 어차피 이미 정절을 잃은 몸, 연회에서 혹여 눈먼 사내라도 만나 그 사생아를 마다 않고 순순히 새아비 노릇 해주겠다 하면 그저 감지덕지해야 하지 않겠느냐?"
나는 화가 치밀어 온몸이 떨리고 눈앞이 흐려졌다.
다시 따지려 했지만, 관리인이 다가와 말렸다.
"장채은, 그만하거라."
"최설아, 너도 어서 아이 데리러 서당에 가거라. 쓸데없는 일로 시간 끌지 말고."
나는 고개를 치켜들고 눈가에 차오른 뜨거운 눈물을 억지로 삼켰다.
자리를 벗어나는 동안에도 장채은은 다른 사람들과 내 사적인 이야기를 떠들어대고 있었고, 나를 흘겨보는 눈빛에는 온통 경멸이 가득했다.
나는 몸을 돌려 눈가를 거칠게 문질렀다.
'최설아, 울면 안 돼. 연우를 위해서라면 무엇이든 견뎌낼 수 있어.'
연우를 데려온 뒤, 집에 혼자 두는 것이 마음에 걸려 결국 주국공부에서 일손을 돕는 사람들이 잠시 쉬도록 마련해 둔 하인방으로 데려갔다.
나는 연우에게 그림책과 만두, 따뜻한 물을 챙겨주었다.
"연우야, 나는 바로 밖에서 일하고 있을 테니, 너는 여기서 놀고 절대로 밖으로 나가면 안 된다, 알았느냐?"
늘 의젓한 연우는 고개를 끄덕이며 부드러운 목소리로 물었다.
"어머니는 언제 오십니까?"
"금방 올 것이다."
나는 연우의 이마에 입을 맞추며 다정하게 달랬다.
"이 그림책 다 볼 때쯤이면 올 것이다."
"명심하거라, 절대로 함부로 돌아다니면 안 된다. 알겠느냐?"
연우는 힘차게 고개를 끄덕이며 고사리 같은 손가락을 내밀었다.
"약조하겠습니다!"
나도 연우의 새끼손가락에 내 손가락을 걸고 약속을 한 뒤에, 불안한 마음을 안고 연회장 쪽으로 향했다.
장채은과 다른 자수공들도 와 있었는데, 그들은 안채 연회장 문가에 모여 끊임없이 웃고 떠들고 있었다.
"에휴, 주씨 가문 세자도 참 안됐지. 그토록 훌륭한 외모에 집안까지 좋은데, 어쩌다…"
"내가 듣기로는, 그 최씨 가문의 큰아가씨가 뒤늦게 본가로 돌아온 터라 예의범절도 제대로 모르고, 말을 타고 질주하며 짜릿한 걸 즐기길 좋아했다더군. 자기 목숨을 걸고 놀다가 세자까지 끌어들이더니, 결국 세자를 그렇게 만들어서… 이제는 자식도 낳을 수 없게 됐다더구나!"
"주씨 가문도 정말 재수가 없지. 저런 화를 몰고 오는 여자를 며느리로 들이더니 대가 끊기게 생겼잖아."
…
한창 웃으며 이야기하고 있는데, 뒤에서 분노를 억누른 최현아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누구더러 재수 없는 여인이라는 것이냐?"
최현아가 살기 어린 눈빛으로 장채은 무리를 노려보고 있었다.
순간 그들은 얼굴이 새하얗게 질려 모두 고개를 숙이고 입을 꾹 다문 채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최현아가 눈길을 휙 돌리더니, 문득 멀지 않은 곳에 있는 나를 발견했다.
그녀는 의아한 듯 눈을 크게 뜨더니 큰 소리로 내 이름을 불렀다.
"설아 언니?"
제2화
나는 속으로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어수선한 틈을 타 자리를 뜨려 했지만, 결국 최현아에게 들키고 말았다.
나는 하는 수 없이 억지로 앞으로 다가가 눈을 내리깔며 말했다.
"아가씨."
최현아는 내게 두 걸음 다가오더니, 내가 입은 거친 옷감으로 만든 하녀 복장을 위아래로 훑어보았다. 눈빛에 희미한 득의양양함이 스쳤지만, 얼굴에는 가식적인 안타까움을 띠었다.
"정말 언니시군요."
"어쩌다 잡일꾼 신세로 전락한 것입니까? 그것도 바깥마당 잡일이라니. 많이 힘드시지요?"
그녀는 진심으로 나를 위해주는 척 다정하게 말하며 내 손을 잡고 안채로 데려가려 했다.
"갑시다, 제가 안채에 조금 더 편한 일자리를 하나 마련해드리겠습니다."
"어쩌면… 아버지랑 어머니를 만날 수도 있을 겁니다!"
나를 잡아끌고 두어 걸음 걷던 최현아는 옆에 서 있던 장채은 무리를 떠올리고는 갑자기 표정을 바꾸었다.
"너희는 이제 안 나와도 된다."
"지금 당장 꺼지거라! 더러운 것들 같으니!"
장채은 무리는 다리가 풀려 털썩 주저앉을 뻔했고, 용서를 빌 틈조차 없었다. 감히 최현아를 원망하지는 못하고, 그저 하나같이 독기 어린 눈으로 나를 매섭게 노려보았다.
역시나 내 예상대로였다.
안채로 들어서자마자 최현아는 무언가 생각난 척 입을 가리며 말했다.
"어머, 설아 언니, 제가 정신이 없었습니다. 안채에 지금 일손이 부족하지 않은데, 마침… 아직 치우지 못한 뒷간이 있습니다. 이를 어쩌죠…?"
나는 그녀가 일부러 나를 모욕하려는 것임을 알고 있었다.
하지만 솔직히 말해서, 지난 세월 동안 홀로 견뎌온 고통에 비하면 이 정도의 굴욕은 아무것도 아니었다.
"알겠습니다. 지금 가겠습니다."
나는 군말 없이 대답하고 물양동이와 걸레를 받아 들었다.
내가 구석진 곳의 얼룩 하나를 고개 숙여 닦고 있을 때, 연회의 주인공인 김옥란이 천천히 모습을 드러냈다.
사람들이 몰려가 축하 인사를 건네기도 전에, 김옥란의 서슬 퍼런 호통 소리가 울려 퍼졌다.
"내가 어떻게 장수할 수 있겠느냐!"
"네 눈으로 똑똑히 보거라. 어디서 저런 천하의 몹쓸 계집을 데려와서는 우리 주씨 가문의 대를 끊어 놓았단 말이냐!"
나는 고개를 들어 바라보았다.
5년 만에 다시 만난 주진혁은, 세월의 보살핌을 받은 듯 여전히 눈을 뗄 수 없을 만큼 훤칠했다. 다만 미간에는 지워지지 않는 깊은 그늘이 드리워져 있었다.
보아하니, 자식 문제는 여전히 그의 마음에 깊은 응어리로 남아 있는 듯했다.
주진혁이 아무 말도 하지 않자, 최현아가 조심스레 웃으며 말했다.
"어머님, 노여움을 푸십시오. 옥체를 상하십니다…"
"누가 네 어머니라는 것이냐!"
김옥란이 매섭게 말을 끊었다.
"네가 서산에 가서 말을 타겠다고 기어이 우기지만 않았어도, 진혁이가 그런 화를 당하지 않았을 것이다!"
"우리 주씨 가문이 무슨 죄를 지었길래 이런단 말이냐! 멀쩡하던 내 아들이 너 때문에… 대를 이을 자식 하나 남기지 못하게 됐잖으냐!"
말을 마친 김옥란은 곁에서 숨죽이고 있던 최현아의 부모님, 최태수와 임혜정에게 화살을 돌렸다.
"그리고 너희들도 마찬가지다!"
"어디서 굴러먹다 왔는지도 모를 진짜 친딸이란 걸 들여놓더니, 결국 내 아들 인생을 이 꼴로 망쳐놓았으니, 이제야 속이 시원하느냐?"
최태수와 임혜정이 연신 잘못을 빌며 용서를 구하는 목소리가 희미하게 들려왔다.
그러나 김옥란은 흥분을 가라앉히지 못했고, 수년간 쌓여 있던 원망이 마침내 터져 나왔다.
"예전에 너희 집에 있던 설아라는 아이가 참 마음에 들었거늘! 얌전하고 본분도 잘 지켰지. 다 진혁이 저놈이 눈이 삐어서 이런 화근덩어리를 들인 탓 아니겠느냐!"
"정말 후회스럽구나!"
최현아의 안색이 순식간에 더욱 굳어졌다.
특히 김옥란의 입에서 내 이름이 나오자, 원망과 수치심을 주체하지 못하는 기색이었다.
그녀는 눈을 굴리더니 재빨리 말을 이었다.
"어머님, 참으로 우연도 이런 우연이 없네요."
"방금 설아 언니를 말씀하셨지요. 제가 오늘 마침 여기서 언니를 만났습니다!"
말이 끝나기 무섭게 그녀는 성큼성큼 내게로 다가왔다.
미처 반응하기도 전에 나는 그녀에게 붙잡혀 휘청거리며 연회장 한가운데로 끌려갔다.
환하게 밝혀진 등불 아래, 남루한 내 옷차림과 손에 든 축축하고 더러운 걸레가 적나라하게 드러났다.
오랜만에 느끼는 굴욕감이 가슴 깊이 치밀어 올랐지만, 나는 가까스로 목소리를 가다듬었다.
"마님, 평안하셨습니까."
"최 나리, 마님, 평안하셨습니까."
김옥란은 복잡한 눈빛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방금 전까지 하던 칭찬이 입가에 맴도는 듯했으나, 지금은 난처함과 약간의 안타까움만 남아 있었다.
최태수와 임혜정은 더더욱 그 자리에 얼어붙은 채, 이런 상황에서 나와 다시 만나게 될 줄은 꿈에도 생각하지 못한 듯했다.
잠시 정적이 흐른 뒤, 누군가 아주 작게 비웃는 소리를 냈다. 그러자 주변의 손님들 사이에서 낮은 조롱이 잇따라 번져 나갔다.
"세상에… 진짜 저 사람이 예전에 주 세자 뒤만 졸졸 따라다니던 그 여인이란 말이냐?"
"쯧쯧, 저 옷은 집안에서 제일 천한 잡일꾼들이나 입는 것 아니냐? 손에 든 걸레 좀 보아라, 더럽기 짝이 없구나! 현아 아가씨도 참, 저런 여자를 '언니'라 불러주다니 어지간히 체면을 세워주는구나. 나 같았으면 진작 호위무사를 시켜 내쫓았을 것이다. 저런 사람이 여기 서 있는 것만으로도 재수가 없지 않으냐!"
"듣자 하니 예전에 주 세자가 파혼하면서 은자를 두둑이 챙겨줬다던데, 어쩌다 저 꼴이 된 것인지. 그 돈을 죄다 어느 사내한테 갖다 바친 건 아닌가 모르겠네."
…
모욕적인 말들이 나를 에워싸려던 순간 뜻밖에도 주진혁이 입을 열었다.
"조용히 하십시오!"
그의 얼굴에는 아무런 표정도 없었다. 서늘한 눈빛으로 주위를 한 바퀴 훑자, 순식간에 연회장 안이 쥐 죽은 듯 조용해졌다.
그제야 그는 다시 나를 바라보았다. 말투는 한결 누그러졌지만, 그 속에는 시혜를 베푸는 듯한 연민이 묻어 있었다
"최설아, 어쩌다 이런 일을 하고 있는 것이냐?"
"그때 헤어질 때 내가 은자를 꽤 많이 주지 않았느냐. 남은 생을 걱정 없이 살기에 충분했을 텐데?"
‘은자라고?’
나는 고개를 들어 멍하니 그를 바라보았다.
지난 세월 동안, 나는 그에게서 단 한 푼도 받은 적이 없었다.
연우를 갓 낳았을 무렵에는 방세를 낼 동전 한 푼도 마련하지 못했다. 산후조리도 채 끝나기 전에 밖으로 나가 빨래나 바느질 같은 잡일을 찾아 생계를 이어 가야 했다.
나는 입을 달싹이다가 무심코 낮은 목소리로 되물었다.
"…은자라고?"
겨우 한마디에 불과한 나지막한 물음이었으나, 마른하늘에 날벼락 같았다.
주진혁의 눈동자가 순식간에 수축하며, 경악을 감추지 못했다.
그의 시선이 옆에 있던 최현아에게로 향했고, 목소리는 순식간에 싸늘하게 가라앉았다.
"최현아, 그 은자는 어디 있느냐?"
제3화
최현아는 횡설수설하며 한참 동안 제대로 대답하지 못하고, 다급히 임혜정에게 구원의 눈길을 보냈다.
임혜정은 곧장 한 걸음 나서며 내 팔을 잡으려 했지만, 나는 태연하게 몸을 옆으로 비켜 피했다.
어색하게 허공에 손이 멈춰 선 그녀는 이내 평소의 나무라는 듯한 말투로 둘러댔다.
"어머, 설아야, 너도 참!"
"그때 네가 너무 급히 떠나는 바람에, 그 은자는 우리가 줄곧 맡아 두고 있었단다. 그저 마땅한 때를 찾지 못해 아직 전하지 못했을 뿐이다. 일이 이렇게 되다니, 다 오해다, 오해야!"
최태수도 곁에서 손을 비비며 연신 맞장구쳤다.
"이 아비도 늘 마음에 두고 있었단다!"
하지만 이 변명은 허점투성이라 누가 들어도 거짓임이 뻔했다.
주진혁의 안색이 완전히 굳어졌고, 그의 싸늘한 시선이 쇠사슬처럼 최현아를 옭아맸다.
"삼만 냥이다."
"단 한 푼도 빠짐없이 내일 오시가 되기 전까지 은표로 바꿔 설아에게 주거라. 그렇지 않으면, 세자비 자리에서 내려올 각오를 해야 할 것이다."
최현아는 주진혁이 사람들 앞에서 이렇게까지 매정하게 자신을 몰아붙일 줄은 몰랐다.
그녀는 나를 독기 어린 눈으로 째려보더니, 억지로 웃으며 대답했다.
"제가 소홀했습니다."
"걱정 마십시오, 내일까지는 꼭 처리하겠습니다."
나는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더는 그들의 진흙탕 싸움에 휘말리고 싶지 않았다.
지금의 나는 그저 연우와 함께 평온하게 살아가고 싶을 뿐이었다.
"은자는 필요 없습니다. 지금도 제 힘으로 먹고살 수 있습니다."
"저쪽에 아직 끝내지 못한 일이 있어서 마저 해야 하니 이만 실례하겠습니다."
말을 마친 나는 누구의 눈치도 보지 않고 몸을 돌려 구석에 있는 아직 치우지 않은 뒷간으로 향했다.
연회장은 다시 소란스러워졌다. 나는 고개를 숙인 채 조용히 하던 일을 계속했다. 물통과 걸레를 들고 마지막 한 곳만 치우면 일을 마치고 연우를 데리고 집으로 돌아갈 수 있었다.
그때 멀리서 갑자기 소란스러운 소리가 들려왔고, 이어 최현아의 날카로운 비명 소리가 들려왔다.
"어떻게 없어질 수가 있단 말입니까? 분명 손목에 차고 있었습니다. 그 비취 팔찌는 어머니께서 주신 혼수품으로 값어치를 매길 수도 없는 물건이란 말입니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있었는데!"
가슴이 철렁 내려앉으며 불길한 예감이 엄습했다.
다음 순간, 최현아가 다급하게 추측하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방금 전까지만 해도… 설아 언니가 저와 가장 가까이 있었습니다. 언니와 팔짱을 끼고 바깥에서 들어오기 전까지는 분명 손목에 있었는데. 설마…"
그녀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건장한 하인 두 명이 내가 있던 칸막이 문을 거칠게 열어젖히더니, 양쪽에서 나를 붙잡아 끌고 나갔다.
"제가 그러지 않았습니다!"
"줄곧 여기서 청소만 했고, 제 것이 아닌 물건에는 손도 대지 않았습니다!"
"이게 무슨 짓입니까. 놓으십시오!"
나는 온 힘을 다해 몸부림쳤다.
하지만 힘에 부쳐 결국 비틀거리며 사람들 앞까지 끌려 나갔다.
최현아가 다급히 다가오며 미안한 척을 했다.
"언니, 정말 미안해요!"
"이 팔찌가 워낙 귀한 물건이라 제가 잃어버리면 안돼서 그저 한번 확인해보려는 것뿐입니다. 언니 몸에 없다는 것만 확인되면 바로 놓아주라 하고, 제가 직접 사과하겠습니다!"
말은 그렇게 하면서도 그녀의 손놀림은 거침이 없었다. 최현아는 손을 뻗어 내 오른쪽 소매 주머니를 더듬었다.
수많은 사람들의 시선이 쏠린 가운데, 푸르게 빛나는 비취 팔찌 하나가 버젓이 모습을 드러냈다!
연회장이 순식간에 술렁였고, 사방에서 경멸과 혐오가 담긴 시선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최현아는 믿을 수 없다는 듯 비틀거리며 한 걸음 물러섰다. 팔찌를 손에 쥔 채, 가슴 아프고 실망스럽다는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언니, 어떻게 이럴 수가 있으십니까…"
"돈이 부족하면 저한테 말을 하시면 되는데, 어떻게… 이런 도둑질을 하실 수 있습니까?"
그때 국공부의 집사가 몽둥이를 든 험상궂은 호위무사들을 이끌고 들이닥쳤고, 소식을 듣고 온 관아의 사람들까지 연회장 밖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팔찌가 그 자리에서 발견된 데다, 모든 사람이 지켜보고 있었다.
나는 겁에 질려 사방을 둘러보며 창백한 얼굴로 해명했다.
"저는 그런적 없습니다!"
"정말 저는 아니라고요! 이 팔찌가 어떻게 제 주머니 안에 들어왔는지도 모릅니다!"
너무 다급하고 당황한 나머지, 나는 본능적으로 주진혁의 옷자락을 붙잡았다.
너무나도 두려웠던 탓일 것이다.
그에게 도움을 청하는 것 말고는, 달리 방법이 없을 만큼 무서웠다.
"진혁아, 우리는 어릴 때부터 같이 자랐으니 너는 날 잘 알지 않느냐!"
"난 도둑질 같은 거 할 사람 아니다! 진혁아, 제발 한 번만 내 말을 믿어주거라!"
"내가 훔친 게 아니다! 누군가 날 모함한 것이다!"
굵은 눈물방울이 쉴 새 없이 흘러내렸다.
주진혁은 붉어진 내 눈을 복잡한 눈빛으로 바라보았다.
잠시 생각에 잠겼던 그는 손가락으로 내 뺨의 눈물을 닦아주며 차갑게 대답했다.
"최설아, 난 눈앞에 보이는 확실한 증거만 믿는다."
제4화
주진혁은 내 말을 믿지 않았다.
포졸들의 우두머리도 더는 망설이지 않고 앞으로 나서며 엄숙하게 말했다.
"낭자, 지금 저희는 귀중품 절도 사건에 연루된 것으로 의심하고 있습니다. 저희와 함께 관아로 가서 조사를 받으시지요."
"철컥."
차디찬 나무 수갑이 내 손목에 채워졌다.
나는 주진혁을 바라보았지만,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오래된 상처가 덧난 것처럼, 가슴 깊은 곳에서 제대로 서 있지도 못할 만큼 묵직한 통증이 밀려왔다.
우리는 어릴 때부터 함께 자란 사이였고, 주진혁은 나를 영원히 지켜주겠다고 약속했었다.
‘그런데 왜 나에게 거듭해서 상처만 주는 걸까?’
포졸들에게 끌려 나갈 때, 최현아는 한 걸음 다가와 오직 나만 들을 수 있는 목소리로 몸을 숙이며 낮게 속삭였다.
"천하시네요. 감히 저와 상대가 될 것 같습니까?"
그렇게 나는 끌려갔다.
한편 하인방에서는 장채은 일행이 흙빛이 된 얼굴로 자신들의 짐을 챙기고 있었다.
"다 최설아 때문이다. 분명 일부러 그런 것이다. 사람들이 오는 걸 봤으면서 우리한테 한마디도 알려주지 않았잖느냐!"
어린 제자가 낮은 목소리로 맞장구쳤다.
"맞습니다! 도둑년으로 잡혀간 건 자업자득이죠! 한 십 년쯤 옥살이하면서 썩어봐야 다신 거들먹거리지 못할 겁니다!"
장채은은 아무 이유 없이 일자리를 잃은 탓에 화가 났지만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어두운 얼굴로 보따리를 단단히 묶으며 이를 갈았다.
떠나려던 순간, 장채은은 곁눈질로 구석에 웅크려 있는 연우를 발견했다.
연우는 이리저리 뛰어다니지도 않고, 얌전히 그림책 한 권을 넘겨보고 있었다.
장채은의 시선이 연우에게 향했고, 순간 그녀의 머릿속에 악독한 생각 하나가 떠올랐다.
그녀는 보따리를 내려놓고 얼굴에 억지미소를 지은 채 연우에게 다가갔다.
"연우야, 그림책 보고 있었니? 참 착하구나."
연우는 조금 겁을 먹은 듯했지만, 그래도 예의 바르게 인사했다.
"아주머니, 안녕하세요."
장채은은 대답하며 다정한 척 손을 뻗어 연우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그래. 연우야, 아주머니가 너한테 한 가지 알려줄 게 있단다. 네 어머니가 방금 관아의 사람들에게 끌려갔다. 네 어머니가 잘못을 저질렀다고 관아로 데려가 조사한다더구나."
"뭐라고요?"
연우의 손에 들려 있던 그림책이 툭 하고 바닥으로 떨어졌다.
연우는 울먹이며 다급하게 반박했다.
"우리 어머니는 나쁜 짓따위는 하지 않습니다!"
"아주머니도 네 어머니를 믿는다. 그러니 연우가 가서 어머니를 구해야지!"
장채은이 손을 뻗어 연회장이 있는 방향을 가리켰다.
"연우야, 울지 말고 저기 보거라. 여기서 나가서 가장 밝고 가장 북적이는 곳으로 달려가거라. 들어가서는… 음, 가장 화려하게 차려입고, 가장 위엄 있어 보이는 마님을 찾거라!"
"그분을 찾으면, 어머니를 구해달라고, 관아의 나리에게 네 어머니를 풀어달라고 해달라고 빌거라!"
"명심하거라, 오직 그분만이 네 어머니를 구할 수 있다!"
연우는 나이가 어려 장채은의 말에 담긴 악의를 알아차리지 못했고, 울먹이며 외쳤다.
"고맙습니다, 아주머니!"
연우는 바닥에 떨어진 책을 주울 생각도 못 한 채, 등불이 환하게 밝혀진 연회장으로 필사적으로 달려갔다.
장채은은 문가에 서서 비틀거리며 달려가는 연우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통쾌하면서도 일그러진 미소를 지었다.
다른 이들이 다가와 불안하면서도 흥분된 목소리로 물었다.
"채은 언니, 이러다… 무슨 일이 생기는 건 아니겠지요?"
"일은 무슨 일? 기껏해야 주씨 가문의 심기나 거슬러서 최설아가 옥에서 더 고생하겠지. 저 녀석이 길을 잃든 말든 우리랑 무슨 상관이냐."
말을 마친 장채은은 일행을 이끌고 의기양양하게 떠났다.
연우는 너무나도 무서웠다.
하지만 어머니를 위해 본능적으로 소란스러운 연회장 안으로 뛰어 들어갔다.
단번에 한가운데 가장 눈에 띄는 자리에서 사람들에게 둘러싸여 있는 김옥란이 보였다.
그녀는 금과 옥으로 치장하고 있었고, 주변 사람들은 모두 그녀를 무척이나 공손하게 대하고 있었다.
'저 분이다!'
연우는 생각할 겨를도 없었고, 어머니를 구해야 한다는 생각이 모든 것을 집어삼켰다. 연우는 온 힘을 다해 앞을 가로막는 사람들을 헤치고 무작정 달려갔다.
"할머니, 제발 관아 나리에게 우리 어머니를 풀어달라고 해주십시오!"
연우는 울부짖으며 김옥란의 몸에 그대로 부딪쳤다.
갑작스러운 충격에 김옥란은 비틀거렸지만, 다행히 곁에 있던 시녀가 재빨리 부축했다. 김옥란이 화를 내며 꾸짖으려다 고개를 숙여 아이를 보고는, 꾸짖던 말이 목구멍에서 걸러버렸다.
"어머, 이게 어느 집…"
‘이 얼굴은!’
연회장 전체가 순식간에 죽은 듯 고요해졌다.
그 눈매와 눈썹, 오뚝한 콧날까지 어린 시절의 주진혁을 그대로 빼닮았다.
그때 주진혁도 그 소리를 듣고 황급히 달려왔다.
연우의 얼굴을 마주한 순간 그는 벼락이라도 맞은 듯 굳어버렸다. 믿을 수 없다는 듯 쭈그려 앉아 연우의 작은 어깨를 움켜쥔 채, 격한 감정에 목이 메어 쉰 목소리로 물었다.
"너는 어느 집 아이냐?"
연우는 이 상황에 겁을 먹고, 울먹이는 목소리로 외쳤다.
"아저씨, 제발 우리 어머니를 구해주십시오! 포졸들한테 끌려갔습니다!"
"어머니… 우리 어머니를 못 찾겠습니다."
"어머니의 이름은 최설아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