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화
재계를 백 년간 주름잡아 온 부씨 집안은 약육강식을 가문의 신조로 삼았다.
그런 집에서 자라온 양자인 나 또한 26년 동안 뺏고 빼앗으며 살아왔다.
그런데 후계자 발표회에서 아버지는 형의 손을 잡고 이렇게 말했다.
“그래도 장남이 승계해야죠.”
자리를 가득 채운 인사들의 시선이 일제히 나를 향했다.
내가 후계자가 되기 위해 모든 것을 전부 쏟아부었다는 건 누구나 아는 사실이었다.
기억이 나기 시작한 순간부터 나는 비정상적으로 빡센 엘리트 교육을 한 치의 어김도 없이 수행해 왔다.
형이 싸움질을 하다가 정학을 당하는 동안, 나는 월반해서 최상위권 대학의 학·석·박사 통합 과정을 밟았다.
똑같이 1천만 원의 자금으로 창업했으나, 형은 도박에 빠져 2억 원의 도박 빚을 졌고 나는 사업 목표를 초과 달성했다.
끝내 형은 파산해서 청산 절차를 밟았고, 나는 회사를 이끌고 해외 시장을 개척해 시가총액 20억 원을 훌쩍 넘기는 성과를 이뤘다.
나는 내가 강자이며, 왕관의 무게를 감당할 만한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또한 BS그룹 후계자 자리도 내 것일 수밖에 없다고 여겼다.
여기까지 오는 동안 나는 아무리 애를 써도 일으켜 세울 수 없는 형을 보며 고개를 저었다.
그런데 아버지는 지금까지도 일말의 흔들림 없이 형을 택했다.
형의 도발적인 웃음에 나는 이를 악물었다.
너무 꽉 깨물었는지 입안에 번지는 피 냄새가 오히려 나로 하여금 정신을 차리게 만들었다.
이에 나는 문득 지난 26년의 노력과 모든 성과들이 그저 웃음거리에 불과했다는 것을 깨달아 버렸다.
내가 이룬 성과가 아무리 대단할지라도 아버지는 반드시 형에게만 회사를 물려줄 인물이었다.
기가 차는 상황에 나는 차갑게 웃었다.
‘이렇게 나온다는 거지? 그렇다면 앞으로 원망이나 하지 마.’
제1화
“저 꼴 좀 봐요. 진짜 자기가 대단한 사람인 줄 알았나 봐요.”
양옆에 여자를 낀 유씨 집안 도련님 유도현이 얼굴이 벌게진 채 내 앞을 막아섰다.
“참으로 안됐네요, 부 사장님. 아니, 이제 뭐라고 불러야 하죠?”
나는 술잔을 든 채 움직이지 않고 유도현을 한 번 훑어보았다.
“누구시죠?”
“아니, 부예찬 씨! 곧 쫓겨날 판에 무슨 도련님 행세를 하는 거죠?”
나는 점점 일그러지는 유도현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아, 이제 기억났네.’
유도현은 어젯밤에도 내 사무실 문 앞에 무릎을 꿇고, 이마를 세 번이나 찧으면서 유씨 집안과 협력해 달라고 빌었던 사람이었다.
그리고 나는 그 자리에서 단칼에 거절했다.
‘유씨 집안의 규모조차 내 눈에 차지 않는데, 저런 인간이 지금 내 머리 꼭대기에서 놀려는 건가?’
‘유도현, 뒤끝 하나는 제대로 있는 인간이네.’
나는 한숨을 내쉬었다.
‘됐어, 이런 거지 나부랭이와 긁어 부스럼 만들 필요는 없어. 분명 또 대단한 형이 꾸민 짓이겠지.’
부자간의 사랑이 넘치는 눈물겨운 이 연극도 다 봤으니, 더는 여기에 있을 이유가 없었다.
정말이지 이런 결과는 철저하게 사람을 실망시킬 뿐이었다.
계속 짖어대는 유도현을 아랑곳하지 않고 몸을 돌려 걸어갔다.
“부예찬 씨, 거기 서요! 진짜 이대로 가겠다는 거예요?”
“이야, 한때 그렇게 잘나갔던 사장님께서 이제는 꼬리를 내리고 슬금슬금 도망치는 신세라니, 정말 놀라워요!”
내 앞길을 막은 유도현은 악의와 조롱이 가득 찬 얼굴로 웃었다.
“부예찬 씨, 당신 그 별 볼 일 없는 회사 시가 총액이 20억이 됐다면서요? 그냥 나한테 넘겨요. 어차피 곧 낙동강 오리알 신세가 될 텐데 힘 빼서 뭐 해요?”
“지금 좋은 거 좀 갖다 바치면 한 번쯤 기회를 줄 생각도 있어요. 뭐 심플하게 내 밑에서 잠자리 시중이나 드는 건 어때요?”
자존심을 한없이 깎는 유도현의 말에, 옆에 있던 남자는 좋은 기회를 놓칠세라 잽싸게 말을 받았다.
“20억을 가지고 뭘 그래? 부씨 집안에서 20억은 껌값이지. 큰 도련님 용돈만 해도 그것보다 많을 텐데?”
“그리고 유도현, 너도 참 취향이 별나긴 하다. 진짜 취향도 특이하네. 저런 건 공짜로 줘도 나는 안 가져. 하하하하하.”
오른쪽에서 여자들이 궁시렁 거리는 소리가 기분 나쁘게 들려왔다.
“이렇게 될 줄 알았으면 내가 그때 부예찬 사장님 밑에서 그렇게 목숨 걸고 일하는 게 아니었는데...”
그러더니 눈을 흘겼다.
“나는 진짜로 부예찬 사장님이 후계자가 될 줄 알았거든.”
그 말에 옆에 있던 여자는 코웃음을 치며 비아냥거렸다.
“멍청해서 그래. 네가 잘못 건 거야.”
“그러게. 지금 바로 상후 도련님한테 가서 일손이 필요하지 않은지 물어볼래.”
그 말을 하면서 못마땅하다는 듯 여자는 나를 노려보았다.
샴페인 잔을 들고 건들거리며 다가오는 장명석 사장은 비틀거리는 데다가 온몸에서 술 냄새가 풍겼다.
장명석은 잔을 들어 내 쪽으로 흔들어 보이더니, 손을 뻗어 술을 내 발치에 끼얹었다.
나는 더러워진 바짓단을 못마땅하게 내려다보았다.
‘쯧, 더럽기 짝이 없네.’
“어이쿠, 손이 미끄러졌네요. 그런데 부씨 집안이 여는 행사가 개나 소나 들어올 수 있는 자리는 아니잖아요.”
곧 장명석은 뭐가 그리 신났는지 크게 웃었다.
“예찬 씨, 낙심하지 마요. 능력이 좋으니까 아무 회사에나 들어가도 재기할 수도...”
장명석은 눈을 굴리며 일부러 말을 끊었다. 옆에 있던 사람들이 왁자지껄하게 웃음을 터뜨렸다.
장명석은 몸을 돌려 그 사람들과 잔을 부딪쳤다.
“솔직히 말해서 양자 주제에 시가총액 20억짜리 회사를 만들었다는 게 말이 돼요?”
“내가 보기엔 본인 돈을 부어서 겉만 그럴싸하게 만들어 놓은 거 아닌가 싶어요.”
“그 정도 수익으로 그럴싸하다고는 못 하죠. 아마 속옷까지 탈탈 털어서 만들었을 텐데요?”
“내가 보기엔 저 문으로 살아서 나갈 방법이나 먼저 궁리하는 게 좋을 거예요.”
그 몇 사람은 내 앞에서 또 크게 웃어 댔지만 나는 무념무상으로 옆에 서 있었다.
“비키세요.”
“뭐가 그렇게 급해요? 차기 회장님께서 아직 할 말이 남았다고 하던데요?”
몇 명은 나에게 위협을 가하듯 에워쌌다.
부상후는 그런 우리를 물끄러미 보더니 마침내 단상에서 내려왔다.
사람들은 알아서 길을 비키면서 모두가 몸을 돌려 부상후를 바라봤다.
느긋한 걸음으로 걸어오는 부상후의 구두 소리가 너무나 선명하게 들려왔다.
뚜벅뚜벅 걷는 한 걸음 한 걸음은 사람들의 가슴팍을 짓밟는 것처럼 위압감이 엄청났다.
곧 부상후는 내 앞에 와서 멈춰 섰다.
눈을 내리깔고 나를 바라보는 그 눈동자 속에는 살얼음 같은 찬 기운이 가득 어려 있었다.
“예찬아.”
부상후가 입을 열었다.
별로 높지 않은 목소리에도 불구하고 떠들썩하던 홀 전체가 순식간에 조용해졌다.
“원래대로라면 너는 나한테 졌기 때문에 우리 집안 사람이라는 신분을 박탈당해야 해.”
“또한 집안의 룰에 의해 제일 큰 벌을 받고 암시장에 던져지겠지. 그때부터 죽든 살든 그건 본인이 알아서 해야 할 거고.”
부상후는 자신의 손을 내 어깨에 툭 하고 얹었다.
엄지로 내 어깨를 누르기 시작하더니 힘이 조금씩 실리기 시작했다.
마치 내 뼈를 부러뜨리려고 작정한 사람처럼 말이다.
“그래도 우리가 한때 형제였던 걸 생각해서, 네가 길바닥에 나앉는 꼴은 차마 못 보겠거든.”
부상후는 손을 거두고 한 걸음 물러서더니 피식 웃으며 불쌍하다는 듯 나를 보았다.
게다가 살짝 올라간 입꼬리는 마치 불쌍한 사람을 동정하는 것처럼 느껴졌다.
“그러니까 앞으로 내 곁에 붙어서...’
부상후는 조롱하는 눈빛으로 내 정수리부터 발끝까지 느릿하게 훑더니 내 눈을 응시했다.
“개 노릇이나 해.”
제2화
순간 분위기가 싸해졌다가 곧 웃음이 터져 나왔다.
“개 노릇이라니, 하하하.”
“축하드려요! 이제는 부상후 부회장님이라고 불러야 하나요? 오늘 정말 좋은 일이 많이 있네요!”
“어떻게 보면 부예찬 사장님도 운이 좋은 거죠. 부회장님 곁에서 개 노릇을 할 수 있다니, 정말 복 받은 거 아닌가요?”
샴페인 잔이 부딪치며 쨍그랑거렸고, 웃음소리는 파도처럼 사방에서 밀려오는 듯했다.
나는 사람들 틈에 섞인 채 기고만장한 부상후를 차갑게 바라보았다.
날카롭던 눈빛이 이내 흥미롭다는 듯한 눈빛으로 바뀌었다.
나는 입꼬리를 끌어올리면서 웃었다.
‘부상후.’
‘나를 부씨 집안에 남겨 두다니, 정말 죽고 싶어서 환장을 했나 보네.’
“예찬아, 이미 아버지께 말씀드렸고 허락도 받았어. 말 안 들으면 죽는 줄 알아, 알겠어?”
부상후는 다시 고개를 돌려 사람들을 향해 웃더니 블랙카드 몇 장을 꺼내 들었다.
“자, 이 카드를 잡는 사람은 한 사람당 2억씩 가져갈 수 있어요! 차기 회장이 된 걸 축하하는 의미로 제가 쏠게요!”
“부상후 부회장님 만세!”
다음 날 이른 아침, 부씨 저택.
평소 내 옆자리에만 앉던 여동생 부세아가 어쩐 일인지 오늘은 내 맞은편으로 자리를 옮겼다.
“앞으로는 내 옆에 앉지 마.”
부세아는 우유잔을 들면서도 말투만큼은 평소 내게 어리광을 부리던 때와 똑같았다.
“똥물이 나한테까지 튀면 곤란하니까.”
아버지는 신문을 한 장 넘기더니 코웃음을 쳤다.
그리고 고개도 들지 않은 채 퉁명스럽게 말했다.
“양자는 역시 급이 안 돼. 우리 집안에 남고 싶다면 네가 해야 할 일이나 제대로 해.”
신문을 내려놓은 아버지는 그릇을 밀어 놓고 자리에서 일어나서 나가 버렸다.
나는 평소 얌전하기만 하던 부세아를 바라보며 물었다.
“세아야, 도대체 그게 무슨 뜻이야?”
그러자 부세아가 나를 향해 눈을 흘겨보며 입을 열었다.
“뭘 봐! 나 원래 이런 사람이었어! 전에는 내가 사람을 잘못 봤던 거고. 지금 보니 오빠는 내가 따를 가치조차 없더라.”
“나는 이제 큰오빠가 좋아.”
“그래.”
나는 피식 헛웃음을 지었다.
옆에 놓인 죽을 한 입 떠먹었는데, 만든 지 오래됐는지 꽤 미지근했다.
그릇 바닥이 손끝을 꾹 누르면서, 도자기 가장자리에서 손끝으로 서늘한 기운이 스며들었다.
사람을 잡아먹는 데 일가견이 있는 이 부씨 집안에서, 어릴 때부터 나를 따라다니며 내 편에 서 준 사람은 부세아가 유일했다.
그랬기에 나 역시 진심으로 부세아를 친동생처럼 아꼈다.
그런데 28년 동안 연기를 하고 있었을 줄이야.
원래는 부세아만큼은 놓아줄 생각이었다.
하지만 이제 보니 부씨 집안 사람들은 단 한 명도 빠져나가지 못하게 만들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곧이어 부상후에게서 메시지가 왔다.
[30분 뒤에 거실로 와.]
나는 휴대폰을 끄고 주머니에 넣었다.
그리고 죽을 마지막 한 입까지 싹싹 비운 뒤 입을 닦으면서 일어났다.
거실에는 사람들이 빙 둘러앉아 있었다.
부상후는 상석 소파에 몸을 늘어뜨린 채 두 다리를 탁자 위에 올려놓고 있었다.
“왔니?”
부상후가 나를 향해 턱을 까딱였다.
“저기 서 있어.”
나는 부상후를 한 번 흘겨봤지만 그래도 그쪽으로 걸어갔다.
부세아는 다이닝 룸에서 따라 나오더니 부상후의 소파에 비집고 앉았다.
“오늘 아침 식탁에서 그 표정 못 봤지? 아버지 앞에서는 찍소리도 못 하던데?”
고씨 집안의 고지호가 담배 연기를 내뿜으며 입을 열었다.
“세아야, 너 며칠 전까지만 해도 작은오빠 뒤꽁무니만 따라다니면서 오빠라고 부르지 않았어?”
“그땐 내가 철이 없었잖아. 큰오빠, 미안해.”
부상후가 고양이를 어르듯 부세아의 머리를 쓰다듬자, 부세아는 아주 흡족한 표정으로 도도하게 턱을 치켜들었다.
예전에 나를 위해 나서 주던 때와 똑같은 표정이었다.
다만 이번에는 내 반대편에 서 있었다.
“그리고 고지호, 나는 부씨 집안의 유일한 딸이야. 그런데 네가 무슨 낯짝으로 나한테 그런 말을 해?”
“알았어, 알았어, 세아야. 내가 좋아하는 사람이 넌데, 내가 너에게 뭘 어쩌겠니?”
부세아는 다리를 꼬고 앉아서 사람들을 한 바퀴 둘러보았다.
그러다 마지막으로 구석에 앉아 있는, 살구색 롱드레스를 입고 앉은 젊은 여자에게 시선을 멈췄다.
그러더니 갑자기 다가가 그 여자의 어깨를 툭 쳤다.
“세림 언니, 언니 전에 작은오빠 좋아한다고 하지 않았어요?”
전세림의 얼굴에 난처한 기색이 스쳤다.
하지만 이내 경멸하는 눈빛으로 바라보더니 전세림이 입꼬리를 비틀었다.
“누가 그래?”
눈을 깜빡이던 부세아는 고개를 돌려 부상후를 눈꼬리가 휠 만큼 웃었다.
“큰오빠, 작은오빠를 세림 언니한테 줘요!”
그 말에 부상후가 허벅지를 ‘탁’ 치며 몸을 조금 일으키더니, 내 쪽으로 고개를 기울였다.
“야, 예찬아.”
나는 눈을 들어 부상후를 바라보았다.
“너하고 전세림이 정략결혼을 하는 건 어때?”
“지금 네 꼴에 세림이라면 엄청 과분한 거지. 하하하하하하.”
나는 미간을 찌푸리며 거절하려고 했다.
다른 이유는 없었다.
그저 이 무리에서 전세림은 함부로 할 수 있는 상대가 아니었으니까.
그런데 전세림이 먼저 자리에서 일어섰다.
내 앞으로 다가와서 혐오감이 가득한 얼굴로 입을 열었다.
“누가 너랑 엮이고 싶대?”
전세림은 고개를 들어 내 눈을 바라보더니 피식 웃었다.
그 웃음을 보는 순간, 나는 눈앞이 아득해졌다.
2년 전만 해도 전세림은 나를 미친 듯이 쫓아다녔다.
내가 좋아하는 흰 장미를 품에 안고 찾아왔고, 카드마다 이렇게 적었다.
[예찬아, 좋아해.]
그런데 지금 정신을 차리고 보니 전세림의 눈에는 냉담함만 가득했다.
“전에 너한테 관심이 있었던 건. 부씨 집안 후계자 자리에 어울리는 사람이라고 봤기 때문이야.”
“근데 지금은 어때? 도대체 왜 그렇게 고고한 척해? 내가 평생 너한테 매달릴 줄 알았어?”
“상후 오빠, 다른 사람한테 줘요. 이런 사람은 나는 필요 없으니까요.”
그 말에 부상후는 소파에 기댄 채 나를 보더니 입을 삐죽 내밀었다.
“들었지? 쟤가 너를 마음에 안 들어 해. 그럼 나중에 다시 이야기하자.”
나는 모두가 앉아서 벌이는 연극을 차갑게 바라보기만 할 뿐. 마음속에는 아무런 파동도 없었다.
그때, 주머니 속 휴대폰이 두 번 진동하자 나는 휴대폰을 꺼내서 화면을 열었다.
[보스, 사업 협력을 신청한 회사 리스트이니 확인 부탁드려요.]
제3화
부상후가 BS그룹을 넘겨받은 지 사흘째 되던 날, 큰 사건이 하나 터졌다.
해외의 잘 알려지지 않은 Q재단에서 협력 제안이 들어왔는데, 그 규모가 무려 600억 원에 달했다.
부상후는 휴대폰을 손에 든 채 사무실에서 뛰쳐나왔다.
얼마나 신이 났는지 말로 다 표현하기 어려울 정도였다.
“네, 아버지. 바로 그 재단이에요!”
“600억짜리 프로젝트를 제가 따냈어요!”
“제가 반드시 잘해서 BS그룹을 더 높은 곳으로 끌어올릴게요.”
그 말을 옆에서 같이 듣고 있던 홍정원은 눈시울을 붉혔다.
[아들, 엄마는 네가 해낼 줄 알았어. 예찬이 걔가 26년 동안 발버둥을 쳐도 무슨 소용이야? 너는 사흘이면 충분한데.]
부상후는 서류를 탁자에 내던졌다.
서류가 촤르륵 흩어졌다. 소파에 털썩 몸을 묻은 채 다리를 꼬던 부상후는 나를 향해 턱을 치켜들었다.
“부예찬, 이리로 빨리 튀어와.”
“형, 말은 똑바로 해.”
나는 창가에 놓인 의자에서 일어나 부상후에게 걸어갔다.
기분이 좋아서인지 오늘따라 나에게도 꽤나 부드럽게 굴었다.
곧 부상후가 발끝으로 탁자 모서리를 툭툭 건드렸다.
“봤어? 해외 Q재단이 나한테 600억짜리 프로젝트를 같이하자고 매달렸어.”
나는 고개를 숙여 펼쳐진 서류를 한 번 훑어보다 시선이 오른쪽 아래로 미끄러졌다.
원형의 직인이 페이지 끝에 찍혀 있었다. 회사 사인란의 Y라는 이니셜이 천장 조명을 받으면서 희미하게 반짝였다.
그때 부세아가 갑자기 휴대폰을 내 얼굴 앞에 들이밀었다.
화면 속 SNS 게시물 아래에는 벌써 ‘좋아요’가 백 개 가까이 달려 있었다.
“봤어? 작은오빠가 그렇게 오래 애써 봐야 뭐 해? 이런 큰 프로젝트는 큰 오빠가 따냈는데...”
“역시 엄마 말이 맞았어. 솔직히 나랑 큰오빠는 원래 가족이지만 작은 오빠는 애초에 양자였잖아.”
“그러면서 우리 집안의 것까지 탐내다니, 정말 욕심이 끝이 없나 봐.”
부세아의 비아냥거리는 말에 나는 눈을 내리깔았다.
곧 부상후의 얼굴이 갑자기 굳어지더니 서류를 내 앞으로 밀었다.
“이거, 잘할 수 있지? 예찬아?”
그 말에 부세아가 미간을 찌푸렸다.
“큰오빠, 이건...”
“끼어들지 마.”
부상후는 부세아의 말을 잘라버리고 내 정강이를 발끝으로 툭툭 건드렸다.
“너 능력 좋다면서? 그 별 볼 일 없는 회사를 시가총액 20억까지 키웠다면서?”
“내가 키우는 개가 이렇게 능력이 좋은 걸 보면, 주인인 내가 개를 잘 길들인 셈이겠지.”
그러고는 허리를 숙이고 내게 바짝 다가오면서 목소리도 한층 더 낮아졌다.
“사흘. 그 안에 완성된 기획안을 내놔.”
그러고는 한 박자 뜸을 들인 뒤 말을 이었다.
“못 하면 발가벗겨서 우리 집에서 쫓아내 버릴 거야.”
“거리에 끌고 다니면서 망신도 톡톡히 줘야지.”
마지막 몇 마디는 얼음이 바닥에 툭툭 떨어지는 것처럼 차갑고 싸늘했다.
부세아는 휴대폰을 거두고 소파 안으로 몸을 움츠렸다.
거실은 조용해졌다.
나는 고개를 숙여 탁자 위에 펼쳐진 서류를 바라보았다.
오른쪽 아래에 찍힌 직인의 윤곽이 조명 아래에서 유난히 선명하게 보였다.
“그래.”
부상후는 나를 2초쯤 말없이 바라보다가 나갔다.
아마도 내가 울거나 무릎 꿇으면서 용서를 빌기를 바랐을 것이다.
그러나 나는 아무런 표정도 짓지 않았다.
부세아도 뒤를 따라서 나갔다.
내 옆을 지나면서 어깨로 나를 툭 쳤는데도 눈길 한 번 주지 않았다.
“같이 가, 큰 오빠.”
그렇게 거실에는 나 혼자만 남았다.
탁자 옆에 선 채 내 손에 든 서류 뭉치가 꽤 묵직하게 느껴졌다.
‘이게 과연 복일까? 아니면 화일까? 근데 형은 정말 준비는 된 거야?’
그 생각을 하며 나는 피식 웃었다.
제4화
나는 사무실에서 사흘 밤을 꼬박 새웠다.
그때 사무실 문을 밀고 들어온 부세아의 얼굴에는 웃음이 가득했다.
“아직도 밤새고 있어?”
“작은오빠는 개 노릇도 이렇게 열심히 하네. 어쩐지 이렇게 오래 살아남았다 싶었어.”
그 뒤를 따라 고지호가 들어오면서 코웃음을 쳤다.
“세아야, 지금 네 작은오빠는 상후 형한테 길들여져서 찍소리도 못 하는 사람이야. 어떻게 너네 집안 사람이라고 할 수 있겠어?”
나는 상대하기도 귀찮아서 담요를 끌어다 얼굴을 덮었다.
내가 아무런 반응도 하지 않자 두 사람도 재미가 없었는지 돌아갔다.
당직을 서던 청소 아주머니가 문 앞을 지나다가 따뜻한 물 한 컵을 들고 들어왔다.
책상 모서리에 컵을 내려놓더니 내 눈을 가리켰다.
“아무리 젊어도 밤은 그만 새요. 눈이 다 빨개졌어요.”
나는 고개를 들고 청소 아주머니를 보면서 미소를 지었다.
“걱정해 주셔서 감사해요. 거의 다 끝나 가요.”
청소 아주머니는 그 말을 듣더니 한숨을 쉬며 밖으로 나갔다.
‘그래, 다 끝나 가.’
나는 입꼬리를 살짝 끌어올렸다.
내가 내부에 남아 있지 않았다면, 이 증거들을 찾아내는 데 훨씬 더 많은 시간이 더 걸렸을 테니까.
내가 기획안을 건넸을 때, 부상후는 파티를 열고 술을 마시고 있었다.
그리고 그 기획안을 받지도 않고는 발끝으로 탁자를 툭툭 차며 말했다.
“거기 놔둬.”
그러나 나는 꿈쩍도 하지 않고 물었다.
“형, 600억짜리 프로젝트를 어떻게 해야 하는지는 굳이 내가 말해 주지 않아도 되겠지?”
“쯧, 네가 알려 줄 필요 없어.”
부상후는 짜증 났는지 몸을 일으켜 서류를 두어 장을 넘기고는 곧바로 펜을 집어들고 사인했다.
펜촉이 종이 위를 미끄러지면서 잉크가 배어들었다.
곧이어 부상후는 고개를 들더니 꺽하고 트림을 했다.
“됐어. 꺼져.”
나는 사인부터 확인했다.
그때 등 뒤에서 부세아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큰오빠, 작은오빠가 수작을 부릴 수도 있는데 그건 안 무서워?”
“쟤가 감히? 쟤는 우리 집안을 떠나면 아무것도 아니야. 본인이 아무리 싫어도 죽기 살기로 내 곁에 붙어서 저런 노릇을 할 수밖에 없어.”
안타깝게도 나는 부상후의 예상과는 전혀 다른 선택을 했다.
다음 날 내가 서류를 미처 정리하기도 전에, 누군가 발길질을 하면서 사무실 문이 벌컥 열렸다.
부상후가 급하게 뛰어 들어오면서, 문이 열리는 순간 거센 바람이 일었다.
부상후는 내 옷깃을 움켜쥐더니 의자에서 나를 끌어올렸다.
“부예찬! 너 도대체 무슨 짓을 한 거야!”
부상후의 엄지가 내 쇄골 위를 꾹 짓누르고 있어서 숨이 막힐 것 같았다.
“600억! 600억짜리 프로젝트를! 너 이 자식이...”
“사인한 건 형이야. 나하고는 상관없어. 이 손 놔, 나 아직 할 일이 남았어.”
나는 담담한 말투로 부상후의 손을 쳐냈다.
그때 복도에서 발소리가 들려왔다.
이어 아버지의 무겁고 차가운 목소리가 들렸다.
“대체 무슨 일이야?”
아버지는 문 앞에 서 있었고, 그 뒤로 비서와 부세아가 따라왔다.
“아버지! 부예찬이 낸 기획안에 문제가 있어서, 젠장, 600억짜리 협력 프로젝트가 취소됐어요!”
아버지는 책상 위에 펼쳐진 서류를 훑더니 결국 내 얼굴에 시선을 멈췄다.
“부예찬.”
나는 고개를 돌려 아버지를 보았다.
“부씨 집안이 너를 28년이나 키웠는데, 이런 식으로 갚아?”
아버지의 목소리는 높지 않았다.
하지만 한 글자 한 글자가 망치처럼 내리치는 것 같았다.
곧 부세아도 목소리를 높였다.
“아버지! 분명 일부러 그런 거예요! 큰오빠가 잘되는 꼴을 못 보는 거라고요!”
아버지가 한 걸음 앞으로 나와서 부상후의 옆에 섰다.
그렇게 두 사람이 좌우로 내 앞을 막아섰다.
“거기가 어떤 곳인지 알기나 해?”
아버지는 손가락으로 책상을 툭툭 두드렸다.
“Q재단은 탑 클래스급의 재단이야. 그런데 네가 이런 사고를 치는 바람에 우리 집안 체면을 다 깎아 먹었고.”
“일부러 그런 거야? 상대를 죽자고 물고 늘어지면서 본인이 만신창이가 되는 이런 수법이나 쓰다니. 네 머리를 겨우 이런 데 쓰라고 공들여 키운 줄 알아?”
부상후의 손에 힘이 더 들어갔다.
“부예찬, 무슨 수를 쓰든 그 프로젝트 다시 따내!”
곧 부상후의 다른 손이 올라갔다.
주먹이 허공을 가르며 내 머리를 향해 날아오자, 더 이상 참기 힘들었다. 나는 곧바로 부상후의 손목을 붙잡았다.
예상과 전혀 다르게 흘러가는 상황에 부상후는 잠시 멈칫했다.
확실히 내가 맞받아칠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한 모양이었다.
“야, 너 지금 막은 거야?”
아버지 역시 얼굴을 일그러뜨리며 쏘아붙였다.
“반항하는 거야?”
“제가 낸 기획안에는 문제가 없어요.”
나는 부상후의 손을 뿌리쳤다.
“문제가 어디에 있는지는 두 분이 잘 아실 텐데요?”
입가에는 비웃음이 걸려 있었다.
아버지는 나를 때리려고 손을 들어올리면서 얼음장처럼 차가운 목소리로 말했다.
“아직도 변명하는 거야? 거기 누구 없어? 이 불효막심한 자식을 붙잡아.”
“우리 집안의 룰대로 널 가만두지 않겠다.”
이윽고 복도에서 두 사람이 부랴부랴 들어왔다.
나는 책상 모서리에 등을 붙인 채 뒤로 살짝 물러섰지만, 더는 물러날 곳이 없었다.
곧 두 사람은 내 어깨를 짓누르고 손목을 묶었다.
아버지가 손에 들린 채찍으로 나를 향해 거세게 내리치려던 그때,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멈추세요! 부예찬 사장님한테 손대면 안 돼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