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이 끝난 자리에서

GoodNovel 완결

절친이 미리 작성해 둔 이혼 합의서를 내게 건넸다. “5년이나 쫓아다녀서 겨우 유주원과 결혼했잖아. 그런데 갑자기 왜 이혼하려는 거야?” 나는 씁쓸하게 미소 지었다. “같이 밥을 안 먹어주니까.” 5시간 전, 나는 레스토랑 주소를 유주원에게 보냈다. “결혼 3주년이잖아. 여기 예약해 뒀어.” 답장은 거의 바로 왔다. “바빠. 시간 없어.” 5년 동안 쫓아다니고 3년 동안 결혼 생활을 하며 내가 돌려받은 것은 고작 그 한마디였다. 그날 회사 건물 아래에서, 나는 유주원이 단발머리 여자를 조심스럽게 챙겨 차에 태우는 모습을 봤다. 유주원을 5년 동안 쫓아다니는 동안 그의 답장은 처음엔 시큰둥한 한두 마디뿐이었다. 그러다 어느 순간부터 서로의 희로애락을 나누는 사이가 됐다. 하지만 이제는 며칠 걸러 한 번씩 바쁘다며 시간이 없다는 말만 돌아왔다. 나는 내가 예전만큼 잘하지 못해서 그런 줄 알았다. 알고 보니 그저 유주원의 사랑이 다른 사람에게로 옮겨간 것뿐이었다. 그때 휴대폰이 울렸다. 레스토랑에서 온 전화였다. “강서안 씨, 오늘 몇 분이 함께 오시나요?” 나는 이혼 합의서를 가방에 넣었다. “한 명이요.” 유주원이 그 여자와 그 레스토랑에 갔다는 걸 알고 있었다. ‘잘됐네. 오늘부터 네가 누구와 그 집의 시그니처 메뉴를 나눠 먹든 나와는 상관없어. 난 오롯이 나만을 위해 즐길 테니까.’

챕터 (1)

1화

절친이 미리 작성해 둔 이혼 합의서를 내게 건넸다. “5년이나 쫓아다녀서 겨우 유주원과 결혼했잖아. 그런데 갑자기 왜 이혼하려는 거야?” 나는 씁쓸하게 미소 지었다. “같이 밥을 안 먹어주니까.” 5시간 전, 나는 레스토랑 주소를 유주원에게 보냈다. “결혼 3주년이잖아. 여기 예약해 뒀어.” 답장은 거의 바로 왔다. “바빠. 시간 없어.” 5년 동안 쫓아다니고 3년 동안 결혼 생활을 하며 내가 돌려받은 것은 고작 그 한마디였다. 그날 회사 건물 아래에서, 나는 유주원이 단발머리 여자를 조심스럽게 챙겨 차에 태우는 모습을 봤다. 유주원을 5년 동안 쫓아다니는 동안 그의 답장은 처음엔 시큰둥한 한두 마디뿐이었다. 그러다 어느 순간부터 서로의 희로애락을 나누는 사이가 됐다. 하지만 이제는 며칠 걸러 한 번씩 바쁘다며 시간이 없다는 말만 돌아왔다. 나는 내가 예전만큼 잘하지 못해서 그런 줄 알았다. 알고 보니 그저 유주원의 사랑이 다른 사람에게로 옮겨간 것뿐이었다. 그때 휴대폰이 울렸다. 레스토랑에서 온 전화였다. “강서안 씨, 오늘 몇 분이 함께 오시나요?” 나는 이혼 합의서를 가방에 넣었다. “한 명이요.” 유주원이 그 여자와 그 레스토랑에 갔다는 걸 알고 있었다. ‘잘됐네. 오늘부터 네가 누구와 그 집의 시그니처 메뉴를 나눠 먹든 나와는 상관없어. 난 오롯이 나만을 위해 즐길 테니까.’ 제1화 절친과 헤어진 뒤, 나는 곧장 그 레스토랑으로 향했다. 안으로 들어서자마자 창가 구석 자리에서 한창 이야기를 나누는 두 사람이 보였다. 유주원은 몸을 살짝 틀어 맞은편 여자와 대화하고 있었다. “다음 주 인상파 전시회 표는 벌써 예매해 뒀어. 지난번에 보고 싶다던 모네 진품도 이번에 나온대.” 소예원은 내 시선을 알아차리더니 웃으며 포크로 유주원의 팔을 콕 찔렀다. 유주원은 그녀의 시선을 따라 고개를 들었다. 곧 그의 얼굴에 번져 있던 웃음이 순식간에 사라지고 미간이 깊게 찌푸려졌다. 그는 자리에서 일어나 빠른 걸음으로 내게 다가왔다. 말투에는 짜증이 묻어 있었다. “나 따라왔어? 내가 시간 없다고 했잖아. 굳이 여기까지 쫓아와서 왜 이래? 나 예원이랑 중요한 얘기 중이니까 먼저 가. 여기서 창피하게 굴지 말고.” “일 끝나면 기념일은 다시 챙겨줄게. 오늘은 네가 알아서 대충 먹어.” 내가 입을 열기도 전에 그는 몸을 돌려 자리로 돌아갔다. “예원아, 캐러멜 푸딩이 여기 대표 메뉴래. 지난번에 단 거 좋아한다고 했지? 먹어볼래?” 나는 그 자리에 서서 두 사람이 머리를 맞대고 메뉴를 보는 모습을 바라봤다. 어느새 손가락은 가방 속 이혼 합의서를 세게 움켜쥐고 있었다. 종이 모서리가 손바닥을 눌러 아팠다. 나는 입꼬리를 씩 올리며 씁쓸하게 웃고는 고개를 저었다. 적어도 오늘만큼은 예의를 갖춰 8년의 연애와 결혼을 마무리하길 바랐다. 그런데 유주원은 이제 내 앞에서 연기할 마음조차 없는 모양이었다. 마음이 무거운 만큼 몸도 점점 무기력해졌다. 더 생각하고 싶지 않아 나는 몸을 돌려 미리 예약해 둔 자리로 가서 내가 좋아하는 음식을 잔뜩 주문했다. 예전에는 유주원과 함께라면 늘 내가 좋아하는 것은 뒷전이었다. 유주원은 고수를 먹지 않았고 매운 것도 싫어했으며 너무 단 음식도 먹지 않았다. 나는 그걸 꼬박 8년 동안 기억했다. 하지만 내가 뭘 좋아하냐고 물으면 한참을 고민하다 겨우 가리는 게 없다는 말만 했다. 반면 소예원이 딸기 맛 막대사탕과 말린 망고, 당도 70% 타로 펄 음료를 좋아한다는 건 하나도 빠짐없이 기억하고 있었다. 오늘 나는 내가 좋아하지만 그가 싫어하는 음식만 골라 주문했다. 매운 갈비찜의 매콤한 소스가 혀끝에서 확 퍼졌다. 너무 매워 눈시울이 살짝 뜨거워졌다. ‘혼자 먹는 밥이 훨씬 더 맛있구나.’ 해가 질 때부터 거리에 불이 하나둘 켜질 때까지, 옆 테이블 손님은 몇 번이나 바뀌었다. 내가 레스토랑을 나설 때도 두 사람은 여전히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소예원은 몸을 가누지 못할 만큼 크게 웃고 있었고, 유주원은 그런 그녀를 바라보며 눈에서 꿀이 뚝뚝 떨어지고 있었다. 나도 본 적 있는 눈빛이었다. 유주원과 막 연애를 시작했을 때 우리도 저랬다. 길가에 핀 이름 모를 작은 들꽃 하나만 봐도 신이 나서 한참을 이야기했다. 씨앗이 퍼지는 방식에서 시작해 식물의 광합성 이야기를 하다가, 어느새 인간의 성장 주기까지 넘어가곤 했다. 그때의 우리는 할 말이 끝없이 많았고, 같은 박자 위에 올라탄 것처럼 대화가 잘 맞았다. 그런데 지금은 어떤가? 대화가 10마디만 넘어가도 싸움으로 번진다. 더 우스운 건, 싸움의 중심에는 늘 그의 소꿉친구 소예원이 있었다는 것이다. 3개월 전, 우리의 두 번째 집 인테리어 공사가 끝났다. 가구를 고르던 날만큼은 드물게 평화로웠고 우리는 심지어 그 집에서 살아갈 미래를 함께 상상하기도 했다. 제2화 그런데 유주원이 곧바로 찬물을 끼얹었다. “이 집은 예원이 취향대로 꾸미자. 가끔 와서 지낼 텐데 편안하게 느껴야지.” 나는 그 자리에서 굳어버렸다. “유주원, 여긴 우리 집이야. 왜 예원 씨 취향대로 꾸며야 하는데?” 그의 얼굴이 굳었다. “그냥 인테리어 스타일 뿐이야. 우리가 지금 사는 집은 네 뜻대로 꾸몄잖아. 예원이는 부모님이 늘 해외에 계셔서 혼자 지내기 힘들어해. 앞으로 자주 와서 지낼 텐데, 예원이가 좋아하는 스타일로 꾸미는 게 뭐가 그렇게 문제야? 너 왜 이렇게 속이 좁아?” 나는 기가 막혀 웃음이 나왔다. ‘내 집을 다른 여자의 취향에 맞춰 꾸미라고? 대체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야.’ 우리는 한 치도 물러서지 않았고, 그 집은 지금까지도 제대로 꾸며지지 못했다. 지금 생각해 보면 그때 바로 이혼했어야 했다. 괜히 미련을 버리지 못하고 기념일까지 기다려 대화를 시도한 내가 바보였다. 결국 마음을 접어야 할 때가 온 것이다. 유주원이 집에 돌아온 건 새벽 2시였다. 나는 소파에 앉아 꾸벅꾸벅 졸면서도 억지로 정신을 붙잡고 그를 올려다봤다. “유주원, 우리 얘기 좀 해야 해.” ... 유주원은 지친 얼굴로 앉아 있는 나를 힐끗 봤지만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그는 미간을 꾹 누르며 짜증 섞인 목소리로 말했다. “강서안, 꼭 이래야 해? 결혼기념일 한 번 못 챙긴 게 그렇게 큰일이야? 우리 이제 오래된 부부잖아. 그걸 붙잡고 밤새 이럴 거야?” “지금 몇 시인지 좀 봐. 나 하루 종일 일해서 피곤해. 너랑 말싸움할 시간이 없어.” 그는 몸을 돌려 욕실로 들어갔다. 10분 동안 물소리만 쏟아졌다. 씻고 나온 뒤에는 안방 문 근처에도 가지 않고 곧장 작은방으로 향했다. 쾅. 문을 세게 닫는 소리에 마지막 남은 졸음마저 완전히 흩어졌다. 집 안은 다시 죽은 듯 고요해졌다. 내 마음은 실타래처럼 엉망으로 헝클어졌고 가슴 속에는 서러움이 꽉 막혀 있었다. 나는 손에 든 이혼 합의서를 멍하니 바라보다가 예고도 없이 눈물이 툭 떨어졌다. 언제부터 우리는 대화조차 제대로 할 수 없는 사이가 된 걸까? 유주원이 가장 먼저 일상을 나누고 싶어 하는 사람이 소예원이 된 순간부터였을까? 내 그릇에 아무렇지 않게 고수를 집어넣기 시작했을 때부터? 아니면 유산의 아픔을 나 혼자 견디게 했을 때부터였을까? 어린 시절 앞뒤 가리지 않고 쫓아다니던 때부터 나란히 서서 평생을 약속하기까지. 그리고 지금은 문 하나를 사이에 두고 남보다도 못한 사이가 됐다. 나와 유주원은 고작 8년 만에 이렇게 되어버렸다. 손바닥 위로 떨어진 눈물을 내려다보며 나는 깊게 숨을 들이마신 후 펜을 들어 이혼 합의서에 내 이름을 적었다. 그리고 자리에서 일어나 침실로 들어갔다. 몸과 마음이 모두 지칠 대로 지쳐서인지 그날은 깊은 잠에 들었다. 다시 눈을 떴을 때는 이미 정오가 가까워져 있었다. 그런데 문을 열자마자 뜻밖의 불청객과 마주쳤다. 내가 나오자 소예원은 반갑다는 듯 활짝 웃었다. “서안 씨, 일어났어요?” 나는 그 자리에 멈춰 섰다. 유주원이 주방에서 나오며 짜증 섞인 목소리로 말했다. “왜 이제 일어나? 예원이는 온 지 한참 됐어.” 소예원은 유주원을 흘겨보며 타박하듯 말했다. 그러고는 테이블 위에 있던 벨벳 상자를 집어 들고 빠르게 다가와 내 손에 쥐여줬다. “유주원, 그렇게 말하지 마.” “서안 씨, 신경 쓰지 마세요. 원래 주원이는 말만 퉁명스럽지 속은 따뜻하잖아요. 이거 어제 서안 씨 주려고 일부러 고른 결혼기념일 선물이에요. 오는 내내 계속 고민하더라고요.” 나는 온몸이 불편했다. 구역질이 날 것처럼 불쾌했지만 차마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고마워. 뭔데?” 말을 끝내기도 전에 소예원이 상자 하나를 들고 다가왔다. 안에는 작디작은 목걸이 하나가 들어 있었다. 어느 브랜드에서 사은품으로 주는 듯한 아주 작고 보잘것없는 목걸이였다. 유주원이 상자를 받아 들고 딱딱하게 설명했다. “예원이가 신상 가방 갖고 싶대서 같이 쇼핑하러 갔어. 마침 사은품 증정 금액에 딱 맞길래, 이 목걸이가 네 스타일이랑 잘 맞는 것 같아서 돈 조금 더 내고 샀어.” 내가 받지 않자 그는 한마디를 더 붙였다. “넌 의사라 너무 화려한 건 안 어울리잖아. 그래서 일부러 무난한 걸로 골랐어.” 내가 뭐라 말하기도 전에 그는 바닥에 놓인 명품 쇼핑백 몇 개를 집어 내 발치로 툭 던졌다. “여기 예원이가 방금 갈아입은 옷들이야. 네가 좀 빨아서 정리해 줘. 우리 조금 있다 현대미술 살롱에도 가야 해서 먼저 나갈게.” 두 사람은 웃고 떠들며 끝까지 나를 쳐다보지도 않은 채 밖으로 나갔다. 제3화 마치 나는 부르면 언제든 달려오는 가사도우미에 불과한 것 같았다. 어질러진 집 안을 바라보자 가슴이 답답하게 막혔다. 목 안에 솜뭉치가 걸린 것처럼 숨을 쉴 때마다 씁쓸한 통증이 번졌다. 그때 휴대폰이 갑자기 진동했다. 병원 단체 채팅방이었다. 국제 의료 구호 활동 지원자 모집 공지였다. 나는 그 문장을 바라보다 심장이 순간 빠르게 뜀박질하는 것 같았다. 어쩌면 정말 좋은 기회일지도 몰랐다. 이곳을 떠나 유주원에게서 멀어지고, 스스로 완전히 독립할 수 있는 공간을 만드는 것. 심호흡을 크게 하고 숨을 고른 뒤 나는 휴대폰을 들고 이 공고에 지원했다. ... 지원까지 마친 나는 몸을 추스르고 병원으로 가서 관련 서류를 제출했다. 모든 일을 끝낸 뒤 나는 카카오톡을 열었다. 대화창은 여전히 내가 보낸 마지막 문자에서 멈춰 있었다. [일 끝나면 연락해. 할 말 있어.] 답장은 없었다. 전화를 걸려고 휴대폰을 들던 순간, 숏폼 플랫폼에서 새 게시물 알림이 떴다. 영상 속 소예원은 한 작품의 예술적 가치를 설명하며 거침없이 말을 이어가고 있었다. 표정도 목소리도 자신감으로 빛났다. 유주원이 찍은 영상이었다. 게시물에는 이런 글이 달려 있었다. [예원은 한 번 본 건 절대 잊지 않아. 정말 대단한 기억력이야.] 나는 손가락 마디가 하얗게 질리도록 휴대폰을 꽉 쥐며 전화를 걸었다. “전시장 밖 카페에서 기다릴게. 30분 안에 안 오면 내가 직접 들어갈 거야.” “강서안, 또 왜 이래? 내가...” 유주원이 말을 끝내기도 전에 전화를 끊었다. 그의 짜증 섞인 목소리는 통화 종료음 너머로 사라졌다. 나는 카페에 앉아 시간을 세었다. 30분이 거의 다 되어 자리에서 일어나 직접 찾으러 가려던 순간이었다. 유주원이 소예원을 데리고 느긋하게 카페 안으로 들어오는 모습이 보였다. 소예원이 먼저 걱정스러운 얼굴로 입을 열었다. “서안 씨, 전화 목소리가 너무 다급해서 무슨 큰일이라도 난 줄 알았어요. 그래서 주원한테 빨리 오자고 했어요. 제가 도와드릴 일이라도 있어요?” 유주원은 내 굳은 얼굴을 보자 오히려 더 짜증이 난 듯했다. “대체 무슨 일인데 이렇게 급해? 전화로 말하면 안 돼? 꼭 여기까지 찾아와서 이래야 해?” 나는 그의 곁에 딱 붙어있는 소예원을 힐끗 보고 몸을 돌렸다. 소예원이 곧장 따라와 친한 척 내 팔짱을 끼고 다시 자리에 앉혔다. “서안 씨, 화내지 마세요. 주원은 그냥 제가 전시장에 혼자 있는 게 걱정돼서 같이 온 것뿐이에요. 온 김에 커피나 한잔하고 가세요.” 그녀는 세상 순진한 얼굴로 웃었다. 예전 같았으면 벌써 팔을 뿌리쳤겠지만 나는 지금 그저 감각이 마비된 듯 소예원이 끄는 대로 앉았다. 내가 더 이상 소란을 피우지 않자 유주원도 한결 편해진 표정으로 자리에 앉았다. 소예원이 메뉴판을 집어 내 앞으로 밀었다. “서안 씨, 이 코코넛 라테 드셔보세요. 새로 출시된 메뉴인데 저랑 주원이 아까 마셔봤거든요. 진짜 맛있어요.” 말을 마친 그녀는 유주원의 팔을 흔들며 애교 섞인 목소리로 말했다. “너 아메리카노 마시지 말고 나랑 이 2잔 세트 시키면 안 돼? 여기 곰돌이 커플 키링 주는데, 나 이거 진짜 오래 갖고 싶었단 말이야.” 유주원은 반사적으로 나를 바라봤다. 우리는 소예원 때문에 셀 수 없이 많이 싸웠다. 그가 다른 여자와 커플 아이템을 맞추는 걸 내가 가장 싫어한다는 사실은 누구보다 유주원이 잘 알고 있었다. 유주원은 모든 걸 알면서도 매번 소예원을 내 앞에 데려왔다. 그의 떠보는 듯한 시선과 마주친 순간, 나는 속눈썹이 살짝 떨리며 잠깐 멍해졌다. 예전의 나라면 이런 일로 유주원과 세상이 뒤집힐 만큼 싸웠을 것이다. 하지만 이제는 아무래도 상관없었다. 나는 무심하게 말했다. “그래. 귀엽네.” 유주원은 당황한 듯 잠깐 멈칫하며, 미간을 더 깊게 찌푸렸다. 그는 몇 초간 망설이다가 결국 소예원이 커플 세트를 주문하지 못하게 했다. 대신 나를 힐끔거리며 내가 어떤 반응을 보일지 살피고 있었다. 아쉽게도 유주원은 실망할 수밖에 없었다. 한 사람, 한 가지 일 때문에 계속 싸우는 것도 정말 지긋지긋했다. 나는 고개를 돌려 창밖만 바라보며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유주원이 몇 번이나 말을 걸려 했지만, 나는 그저 고개를 끄덕이며 알았다는 말로 대충 흘려버렸다. 반면 소예원은 곁에서 끊임없이 새로운 주제를 꺼내며 활기차게 떠들었다. 전시회에서 음악회로, 디자이너에서 컬렉터로 전환하며 유주원과 쉼 없이 이야기를 주고받았다. 우리 사이에 흐르는 어색한 분위기를 전혀 감지하지 못한 것처럼 말이다. 나는 완전히 제삼자가 된 기분으로 조용히 옆에 앉아 두 사람의 대화를 들었다. 나는 커피를 세 번이나 리필하는 동안 몇 번이고 일어나려 했지만, 그때마다 소예원이 붙잡았다. 제4화 “서안 씨, 주원이랑 할 말 있다면서요? 그렇게 급하게 가지 마세요.” 유주원도 슬슬 짜증이 난 듯 테이블을 손가락으로 두드렸다. “그러니까, 대체 무슨 말 하려는 건데? 빨리 해. 나랑 예원이 저녁에 동창회도 가야 해.” 나는 입꼬리를 살짝 올렸지만 눈에는 웃음기가 없었다. “너랑 내 얘기는 네가 진짜 시간 날 때 다시 해. 이제 나 가도 돼?” 유주원은 할 말을 잃은 듯 입을 벌렸다가 결국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그는 몇 초간 침묵하다가 조금 찔리는지 차분하게 말했다. “그럼 먼저 들어가. 동창회 끝나면 네가 좋아하는 망고 크레이프 사 갈게. 그때 제대로 얘기하자.” 나는 손을 휘저으며 자리를 뜨며, 그가 내 쪽으로 뻗은 손도 자연스럽게 피했다. 뒤에서 유주원이 나를 불렀다. “서안아. 내일 네가 보고 싶어 하던 영화 개봉하잖아. 같이 보러 가자.” 나는 대충 고개만 끄덕였을 뿐 마음에 담아두지도 않았다. 나는 집으로 돌아오자마자 짐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나는 이미 서명한 이혼 합의서를 가장 눈에 잘 띄는 곳에 펼쳐 두고, 그 위에 집 열쇠를 올려놓았다. 그리고 그대로 집을 나섰다. 차에 막 올라탄 순간 휴대폰이 울렸다. 화면에 뜬 이름은 유주원이었다. 나는 눈썹을 살짝 찌푸렸다. ‘동창회 간다고 하지 않았어? 나한테 전화할 시간은 있나 보네.’ ... 전화를 받자마자 유주원의 다급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서안아, 오늘 나 집에 못 들어가. 예원이 어머니가 갑자기 뇌출혈로 쓰러지셔서 수술해야 한대. 내가 같이 해외로 가봐야 할 것 같아.” 나는 코웃음을 쳤다. ‘그럼 그렇지.’ “그럼 네가 사 온다던 망고 크레이프는? 영화는? 우리 얘기는 또 언제 할 건데?” 전화 너머는 소란스러웠지만, 그의 말투가 바뀌는 것은 분명히 느낄 수 있었다. 유주원은 냉정하고 짜증이 섞인 목소리로 대답했다. “너 의사잖아. 뇌 수술이 얼마나 급한지 몰라? 사람 목숨이 달린 일인데 지금 먹을 거나 생각해? 내가 돌아가면 얘기해.” ‘하지만 네가 돌아올 때쯤이면 나는 이미 떠나고 없을 텐데.’ 나는 휴대폰을 꽉 쥐고 마침내 소리를 지르고 말았다. “유주원, 소예원 일도, 소예원 부모님 일도 나보다 늘 더 중요해? 소예원한테는 부모도 있고 친척도 있고 친구도 있어. 의지할 사람이 너 하나뿐인 게 아니잖아. 그런데 너 기억해? 나는 너 하나뿐이었어.” 전화 너머에서 유주원이 잠시 멈칫했다. 나는 적어도 유주원이 조금은 마음이 흔들릴 줄 알았다. 하지만 다시 들려온 목소리는 오히려 더 차가웠다. “강서안, 제발 억지 좀 그만 부리면 안 돼? 예원이는 나랑 어릴 때부터 여동생처럼 같이 자란 애야. 내가 챙기는 게 당연하잖아. 좀 너그럽게 생각하면 안 돼? 매번 모든 잘못을 예원이한테 돌리지 마. 예원이는 아무 잘못 없어.” “그만해.” 나는 떨리는 목소리로 그의 말을 끊었다. “그런 말 듣고 싶지 않아. 유주원, 지금 집에 한 번만 와. 우리 확실히 정리하자. 그다음 어디를 가든 안 막을게.” 유주원은 나의 울음 섞인 목소리를 전혀 눈치채지 못한 듯, 그저 지치고 귀찮다는 듯 말했다. “서안아, 나 지금 너랑 싸울 시간 없어. 우리 둘 다 좀 진정하자. 내가 돌아가서 얘기해.” 그 말과 함께 유주원은 그대로 전화를 끊었다. 다시 전화를 걸어보니 이미 휴대폰이 꺼져 있었다. 나는 카카오톡을 열어 문자를 보냈다. 그러자 눈을 찌르는 듯한 빨간 느낌표가 보였다. 유주원이 나를 차단한 것이었다. 나는 웃음과 함께 눈물이 터져 나왔다. 유주원은 늘 그랬다. 자기가 하고 싶은 일이 생기면 누구도 막을 수 없었다. 그는 망설임 없이 방해되는 모든 걸 치워버렸다. 나까지도 말이다. 이제 상관없었다. 작별 인사를 하든 못 하든 중요하지 않았다. 어차피 이혼 합의서를 보면 다 알게 될 테니까. 나는 휴대폰을 가방에 던져 넣고 곧장 공항으로 차를 몰았다. 탑승하기 전, 그에게 마지막 문자를 보냈다. “유주원, 이혼 합의서는 거실 테이블 위에 두고 왔어. 난 이미 사인했어.” 몇 분이 지나도 답은 오지 않았다. 나는 아무렇지 않게 웃으며 비행기 창밖의 하늘을 찍어 SNS에 올렸다. [8년은 여기서 끝. 이제 다시 시작.] 앞으로의 8년은 온전히 나답게 살아갈 것이다. 비행기는 천천히 이륙해 두꺼운 구름층을 뚫고 올라갔다. 나는 창가에 기대 눈을 감았다. 비행기가 착륙하는 순간, 수많은 문자가 쏟아져 들어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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