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물이 마르고 사랑도 끝날 때

GoodNovel 완결

육태윤과 함께 가족 모임에 참석했을 때, 내가 먼저 결혼해서 빨리 가정을 꾸리고 싶다고 말했다. 그러자 육태윤은 내가 자기 집안의 재산을 노리고 돈 때문에 자신과 결혼하려는 거라고 단정했다. 곧바로 사람들 앞에서 내 뺨을 열 대가 넘도록 때렸다. 그런 뒤 곧바로 질투하며 뛰쳐나간 소꿉친구를 쫓아가 버렸다. 나는 육태윤의 손을 붙잡고 가지 말라고 애원했지만, 화가 난 남자는 나를 계단 아래로 밀어 버렸다. 그 바람에 두 다리가 골절되고 두개골에 금이 갔다. 중환자실에서 한 달을 보내고서야 겨우 정신을 차렸다. 이번에는 더 이상 매달리거나 억지를 부리지 않았다. 해외에 있는 어머니에게 먼저 연락했다. “엄마, 지난번에 말했던 유산 상속 얘기 있잖아요. 나 그거 받아들이기로 했어요.”

챕터 (1)

1화

육태윤과 함께 가족 모임에 참석했을 때, 내가 먼저 결혼해서 빨리 가정을 꾸리고 싶다고 말했다. 그러자 육태윤은 내가 자기 집안의 재산을 노리고 돈 때문에 자신과 결혼하려는 거라고 단정했다. 곧바로 사람들 앞에서 내 뺨을 열 대가 넘도록 때렸다. 그런 뒤 곧바로 질투하며 뛰쳐나간 소꿉친구를 쫓아가 버렸다. 나는 육태윤의 손을 붙잡고 가지 말라고 애원했지만, 화가 난 남자는 나를 계단 아래로 밀어 버렸다. 그 바람에 두 다리가 골절되고 두개골에 금이 갔다. 중환자실에서 한 달을 보내고서야 겨우 정신을 차렸다. 이번에는 더 이상 매달리거나 억지를 부리지 않았다. 해외에 있는 어머니에게 먼저 연락했다. “엄마, 지난번에 말했던 유산 상속 얘기 있잖아요. 나 그거 받아들이기로 했어요.” 제1화 혼자 퇴원 수속을 마친 나는 택시를 타고 육태윤의 회사로 향했다. 회사 건물 앞에 서자, 9년 동안이나 일해 온 이곳이 갑자기 낯설게 느껴졌다. 고작 한 달 자리를 비웠을 뿐인데, 회사 시스템에서 내 정보는 흔적도 없이 삭제되어 있었다. 경비원마저 나를 안으로 들여보내 주지 않았다. 하는 수 없이 휴대폰을 꺼내 육태윤에게 전화를 걸었지만, 끝내 전화를 받지 않았다. 대신 하지연에게서 영상통화가 걸려 왔다. 화면 너머 하지연은 입꼬리를 올리며 다소 쑥스러운 듯 말했다. [네가 이렇게 빨리 퇴원할 줄은 몰랐네. 태윤이가 내 안전이 걱정된다고 요즘 회사에 낯선 사람은 못 들어오게 했거든.] [걱정 마. 내가 바로 경비원한테 들여보내라고 할게.] 굳게 닫혀 있던 문은 하지연의 한마디에 곧바로 열렸다. 나는 잠시 그 자리에 멍하니 서 있다가 천천히 안으로 들어갔다. 육태윤의 사무실 문은 닫혀 있지 않았다. 문을 열자, 몸을 제대로 가리지도 못하는 얇은 나시 차림으로 소파에 앉아 있던 하지연이 나를 보며 살짝 웃었다. 그 옆의 육태윤은 상의를 벗은 채였고, 두 사람 사이에는 유난히 야릇한 분위기가 감돌고 있었다. 나는 힐끗 보고 곧바로 시선을 거둔 뒤, 망설임 없이 사직서를 책상 위에 올려놓았다. 내가 자신을 무시하자 육태윤은 미간을 찌푸리며 내 앞을 막아섰다. 그리고 변명하듯 말했다. “지연이가 귀국한 지 얼마 안 됐잖아. 너도 알다시피 우리 두 집안은 워낙 가까워. 부모님도 나보고 지연이랑 좀 더 가까이 지내라고 하셨고.” “게다가 이 자리도 지연이가 너보다 더 잘할 수 있어.” “그것만이 이유는 아니야. 아직 몰랐구나? 나 태윤이랑 약혼해.” 하지연은 육태윤의 말을 끊더니 내게 손가락에 낀 다이아몬드 반지를 내보였다. 육태윤의 손에도 똑같은 반지가 끼워져 있었다. 육태윤은 약혼 얘기에 대해 길게 설명하려 들지도 않았고, 그저 조용히 나를 바라볼 뿐이었다. 나는 고개를 들어 육태윤을 바라보다가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어.” 따지지도 않았고 해명을 요구하지도 않았다. 오히려 책상 위 서류를 가리키며 말했다. “사직서는 이미 제출했어. 지금 절차 진행 중이고, 업무 인계도 다 끝냈어.” 육태윤은 내가 그런 말을 할 줄은 전혀 예상하지 못했다는 듯 눈이 살짝 커졌다. 나는 몸을 돌려서 나갔다. 뒤에서 느껴지는 두 사람의 놀란 시선은 조금도 신경 쓰지 않았다. 다리에서 느껴지는 통증이 신경 하나하나에 생생하게 전해졌다. 지금도 그날 가족 모임에서, 질투한 하지연을 쫓아가기 위해 육태윤이 나를 계단 아래로 밀어 버렸던 순간이 떠오른다. 육태윤을 향한 내 사랑은, 중환자실에서 한 달 동안 죽음과 싸우며 버텨 낸 그 시간 속에서 이미 깨끗이 사라져 버렸다. 육태윤은 어느새 나를 따라와서 내 뒤에 서 있었다. 육태윤은 나를 뒤에서 끌어안고 고개를 내 목덜미에 묻은 채, 뺨을 살며시 내 목에 비볐다. “지연이랑 나는 어릴 때부터 함께 자란 사이잖아. 내가 결혼한다고 하면 질투할 수도 있어. 그러니까 약혼 얘기도 너무 신경 쓰지 마.” “육씨 가문과 하씨 가문은 원래 집안끼리도 잘 어울리는 사이니까...” “신경 안 써.” 나는 육태윤의 말을 잘라버린 채 남자와 거리를 뒀다. 9년을 함께한 사이, 그보다 더 가까운 스킨십도 수없이 해왔다. 하지만 지금은 육태윤이 가까이 다가오는 것조차 거부감이 들었다. 육태윤의 얼굴이 잠시 굳어졌지만, 고집스럽게 그 자리에 서서 움직이지 않았다. 제2화 육태윤은 내 태도를 확인하려는 듯 나를 바라보았다. “너랑 하지연은 소꿉친구잖아. 나보다 훨씬 오래 함께했고.” “약혼도 어른들이 정한 일이라며. 나도 더 이상 관여하지 않을게.” “그러니까 걱정하지 마. 나 정말 회사를 그만둘 거야. 질투해서 그러는 것도 아니고, 홧김에 그러는 것도 아니야.” 육태윤은 뭔가 말을 더 하려는 듯했다. 하지만 그때 하지연이 사무실에서 고개를 내밀며 소리쳤다. “태윤아, 내 속옷 어디에 넣어뒀어? 그 레이스 달린 거 있잖아...” 하지연은 나와 시선이 마주치자, 그제야 아무것도 모른다는 듯 천진난만하게 덧붙였다. “미안해. 네가 아직 여기 있는 줄 몰랐네. 나랑 태윤이는 워낙 오래 같이 지내다 보니까, 가끔 네가 태윤이 여자친구라는 걸 깜빡하게 돼.” 나는 건성으로 대답하고는 회사를 나섰다. 다음 날 아침, 내가 퇴원했다는 소식을 들은 어머니에게서 전화가 걸려 왔다. [몸은 좀 괜찮아? 엄마도 이제 나이가 들었잖아. 네가 얼른 돌아와서 엄마 곁에 있어 줬으면 좋겠어.] [그동안 넌 태윤이만 따라다니면서 아무런 명분도 지위도 없이 살았잖아. 그 집안 사람들한테 무시당하기까지 하고.] [상속 문제도 네가 마음을 돌려서 정말 다행이야. 네 새아버지 재산이 아주 많은 건 아니지만, 네가 남은 평생 걱정 없이 살기엔 충분해. 이제 더는 매일 전전긍긍할 필요도 없고.] 예전 같으면 어머니의 이런 말에 나는 곧바로 대꾸를 했을 것이다.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할 수 있다면 그걸로 충분하다고, 돈 따위는 중요하지 않다고. 하지만 지금은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육씨 가문에서 보낸 9년 동안, 처음부터 끝까지 내 자리는 없었다. [언제쯤 돌아올 거야? 엄마가 미리 준비해 놓게.] 나는 벽에 걸린 달력을 바라보았다. 빨간 동그라미로 표시된 날짜가 유난히 눈에 들어왔다. 열흘 뒤면 나와 육태윤이 사귄 지 10년이 되는 날이었다. “열흘만 더 있다가 갈게요. 여기 일만 다 정리하면 바로 갈게요.” 전화를 끊고 보니, 육태윤이 어느새 내 뒤에 서 있었다. 육태윤은 미간을 살짝 찌푸린 채 내 휴대폰 화면에 뜬 이름을 확인하려고 했다. “무슨 소리야? 누구랑 통화한 거야?” 나는 휴대폰을 엎어서 책상 위에 내려놓고 아무렇게나 둘러댔다. “친구가 새 일자리를 소개해 줬어.” “회사에 아직 네 자리는 있어. 굳이 그렇게 급하게 그만둘 필요 없잖아. 네 자리를 지연이가 대신하게 됐다고 해도 다른 자리도 많아.” 육태윤은 도무지 이해가 안 된다는 듯 입술을 깨물며 말했다. “필요 없어.” 내가 이런 태도를 보이자 육태윤도 화가 난 듯했지만, 입을 열기도 전에 아래층에서 하지연이 재촉했다. “태윤아, 오늘 본가에 가서 밥 먹기로 했잖아. 부모님 오래 기다리게 하지 말자.” 그 말을 듣는 순간, 내 손끝이 미세하게 떨렸다. 육태윤과 막 연애를 시작했을 무렵, 그의 부모님은 나를 탐탁지 않아 했다. 시골에서 올라온 가난한 여자가 어떻게 육씨 가문 같은 명문가의 아들과 어울릴 수 있겠냐는 것이었다. 하지만 본가에 갈 때마다 육태윤은 반드시 나를 데리고 갔고, 언제나 망설임 없이 나를 감싸며 부모님과 맞섰다. 육태윤은 나에게 약속했다. 자신이 있는 한, 육씨 가문에는 반드시 내 자리가 있을 거라고. 하지만 이번에 육태윤은 왠지 시선을 피했고 말투도 어색했다. “지난번에 그런 일이 있었잖아. 부모님도 몸이 편찮으신데, 너까지 보면 또 화를 내실 거야.” “오해하지 마. 약혼 얘기는 내가 부모님께 다시 말씀드려 볼게. 지연이는 부모님이 어릴 때부터 지켜봐 와서 아무래도 더 가깝게 느끼시는 거고.” “시간이 좀 지나면... 부모님도 더 이상 너를 문제 삼지 않으실 거야.” 육태윤의 말은 결국 하나같이 하지연을 감싸고 있었다. 육태윤이 나와 한 약속을 잊은 것도 아니었다. 다만 육태윤의 눈에는 나보다 더 아끼고, 더 지켜야 할 사람이 생겼을 뿐이었다. 나는 평소처럼 미소를 지어 보였다. 제3화 나는 반박하지도, 억지를 부리지도 않았다. 하지연이 몇 번 더 재촉하자, 나를 향한 육태윤의 인내심도 완전히 바닥났다. 육태윤은 뒤도 돌아보지 않고 떠나면서, 무심한 어조로 한마디를 남겼다. “나도 매일 네게 설명해 주는 게 힘들어. 제발 조금만 이해해 줘.” 육태윤과 다투기만 하면 그는 늘 지친 얼굴로 그 말을 하곤 했다. 그러면 나는 마음이 아파서 내가 너무 제멋대로 굴었던 건 아닐까, 스스로를 돌아보곤 했다. 스스로 마음을 다독인 뒤에는, 아무런 가치도 없는 이 관계 속으로 다시 빠져들곤 했다. 육태윤은 값비싼 정장을 입고 있었고, 하지연은 고급 맞춤 드레스를 차려입고 있었다. 나란히 걸어가는 두 사람의 모습은 정말 잘 어울려 보였다. 두 사람이 점점 멀어지는 뒷모습을 보며, 나도 마음을 가라앉히고 내 짐을 정리했다. 9년 동안 나와 육태윤은 수많은 추억을 남겼다. 예전의 나는 육태윤이 나를 사랑한다고 철석같이 믿었다. 집 안의 인테리어는 모두 내 취향에 맞춰져 있었다. 육태윤은 탁 트인 발코니를 좋아했고, 나중에는 아이들과 함께 그곳에서 햇볕을 쬐고 싶다고 했다. 하지만 우리는 아이를 갖기도 전에, 육태윤은 이미 나를 사랑하지 않게 됐다. 그때 이 집에는 집사나 가사도우미를 두지 않았다. 내가 위가 안 좋다는 걸 알기에, 육태윤은 매일 손수 영양식을 만들어 줬다. 하지만 지금에 와서는 그 모든 것이 이미 희미한 기억 속에 묻혔다. 예전의 육태윤은 내가 출근길에 추울까 봐 몰래 목도리를 떠 주기도 했다. 솜씨는 서툴렀지만 사랑이 가득 담겨 있었다. “남들이 다 가진 건 너도 가져야지.” 육태윤은 내게 목도리를 둘러주며 볼에 입을 맞췄다. 그러고는 내 머리를 쓰다듬으면서 큰 고양이처럼 내 목덜미에 얼굴을 비비고 애교를 부렸다. “퇴근하면 일찍 들어와. 안 그러면 네 남자친구가 걱정할 거야.” 언제부터인지 육태윤은 우리 관계에 싫증을 내기 시작했다. 내가 처음 육태윤에게 청혼했을 때, 육태윤은 우리가 아직 너무 어리다며 너무 일찍 결혼하면 다른 부부들처럼 서로를 보기도 싫어질 거라고 했다. 두 번째 청혼 때는 서프라이즈를 준비했는데, 우연히 육태윤이 친구들과 나누는 대화를 듣게 됐다. “희진이한테는 이제 신선함도 다 사라졌어. 너무 재미없어. 그래도 나한테 워낙 잘해주니까 헤어지고 싶지는 않고.” “여자가 남자한테 청혼했는데도 아무 반응이 없으면, 더는 사랑하지 않는다는 걸 정말 모르는 건가?” 마지막에는 내 모든 것을 걸고, 육태윤의 부모님 앞에서 육태윤과 결혼하고 싶다고 말했다. 심지어 결혼 예물이나 예단도 필요 없다고까지 했다. 하지만 그 자리에는 육태윤의 소꿉친구 하지연도 있었다. 그 사실을 알게 된 하지연은 화를 내며 질투했다. 하지연이 화를 내자 육태윤도 당황했다. 한때 나를 사랑했던 마음도 누구도 나를 해치지 못하게 하겠다던 다짐도 모두 잊은 채, 결국 자기 손으로 나를 계단 아래로 밀어 버렸다. 몇 번이고 사랑을 표현했지만 번번이 벽에 부딪히고 나서야, 나는 마침내 육태윤이 줄곧 기다려 온 사람이 누구인지 깨달았다. 눈가에서 눈물이 갑자기 흘러내리면서 낡은 목도리 위로 떨어졌다. 나는 얼굴을 한 번 닦고 깊이 숨을 들이마셨다. 나는 사람을 불러 발코니 창을 막았다. 9년 동안 육태윤을 위해 써 온 일기장을 찢어 버렸다. 낡은 목도리는 라이터로 깨끗하게 태워 버렸다. 그 뒤로 일주일 내내 육태윤은 내게 문자 한 통 보내지 않았다. 나도 일찌감치 육태윤의 집에서 짐을 빼냈다. 육태윤은 내가 토라진 거라고 생각하고는 신경도 쓰지 않았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자, 육태윤은 그제야 나라는 사람이 있었다는 걸 떠올린 듯했다. 출국을 사흘 앞둔 날, 내가 육태윤과 사귄 지 꼭 10년째를 맞았다. 육태윤이 드물게 나에게 전화를 걸어왔다. [우리 10주년 기념일이 얼마 안 남았어. 식당을 예약해 뒀으니까, 가서 우리 제대로 얘기 좀 하자.] 그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육태윤이 보낸 식당 주소가 담긴 문자가 도착했다. 그곳은 나와 육태윤이 처음 연인이 되기로 한 바로 그 식당이었다. 여느 해와 마찬가지로, 매년 기념일마다 나는 육태윤에게 줄 선물을 준비했다. 제4화 올해는 그것도 마지막이었다. 나는 식당에 앉아 시간이 흘러가는 모습을 바라보았다. 약속 시간은 이미 30분이나 지났지만 육태윤은 여전히 나타나지 않았다. 육태윤에게 전화를 걸려던 바로 그때, 식당 밖 하늘에 갑자기 불꽃놀이가 터지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 불꽃 사이로 선명한 글자가 나타났다. [하지연, 생일 축하해.] 모든 사람들이 그 광경에 시선을 빼앗겼다. 나도 그제야 나타나지 않았던 육태윤을 찾아낼 수 있었다. 육태윤은 정장을 입고 장미꽃을 든 채, 한쪽 무릎을 꿇고 하지연에게 청혼하고 있었다. 저 멀리 빌딩 전광판에는 육태윤과 하지연의 약혼 포스터가 흘러가고 있었다. “육 대표님 정말 통이 크시네. 1분에 2억짜리 대형 화면을 통째로 빌리다니.” “근데 육 대표님 여자친구가 원래 저렇게 생기지 않았던 것 같은데?” “여자친구는 무슨. 부자들이 이리저리 만나고 노는 건 흔한 일이잖아. 그런 여자는 그냥 잠시 즐기는 애인 같은 거지.” “눈앞에 있는 저분이 진짜야. 어릴 때부터 함께 자란 소꿉친구라잖아. 곧 결혼도 한다던데.” 사람들의 수군거림이 귀에 꽂힐 때마다 비웃음처럼 들렸다. 알고 보니 10주년이 아니라, 하지연의 생일이자 청혼 파티였던 것이다. 나는 가볍게 한숨을 쉬고 준비했던 선물을 쓰레기통에 버렸다. 그리고 이 자리를 떠나려 했다. 그런데 주인공인 하지연이 어느새 내 앞에 나타나 있었다. 하지연은 육태윤 곁에서 보여주던 온화하고 순진한 얼굴을 버리고, 나를 보며 도발적으로 웃었다. “오늘이 너랑 태윤이가 사귄 지 10년째 되는 날이라며? 말해줄게. 태윤은 그게 10주년이라는 것도 기억하지 못했어.” “오늘이 마침 내 생일이라서, 그제야 너라는 사람이 있다는 걸 떠올린 것뿐이야.” 예전 같았으면 나는 벌써 하지연과 붙어 싸웠을지도 모른다. “그래? 그럼 둘이 행복하게 잘 살아. 애도 많이 낳고.” 나는 입꼬리를 올린 채 하지연을 밀어내고 자리를 뜨려고 했다. 그런데 하지연이 갑자기 발을 헛디디면서 그대로 바닥에 주저앉았다. 테이블 위의 샴페인이 전부 그녀에게 쏟아졌다. 내가 미처 대응하기도 전에, 옆에서 달려온 육태윤이 그 모습을 보게 됐다. “강희진! 이제 그만 좀 해!” 육태윤은 말도 없이 내 옷깃을 잡더니 테이블 모서리로 세게 밀쳤다. 깨진 유리 조각이 손바닥에 박히는 순간, 피가 터져 나오듯이 쏟아졌다. “내가 약혼 문제는 알아서 처리한다고 했잖아. 그런데 왜 또 지연이를 다치게 해!” 유리 조각은 아직 손바닥에 박혀 있었고, 찢어지는 듯한 통증이 온몸으로 퍼져 나갔다. 내가 해명할 틈도 없이, 옆에서 전혀 다치지도 않은 하지연이 갑자기 가슴을 움켜쥐며 숨을 가쁘게 몰아쉬었다. 육태윤은 완전히 당황해서 떨리는 손으로 기사에게 전화를 걸었고, 급기야 눈시울까지 붉어졌다. “너 지연이한테 천식 있는 거 몰라? 지연이는 너처럼 강한 애가 아니야!” 육태윤은 나를 향해 고함을 지르며 모든 불만을 나에게 쏟아냈다. “그렇게 결혼하고 싶으면 다른 놈이랑 해! 난 절대 너랑 결혼 안 해! 꺼져, 다시는 내 눈앞에 나타나지 마.” 주변 사람들은 모두 내 모습을 비웃었고, 손바닥의 통증은 점점 무뎌져 갔다. 나는 두 사람이 점점 멀어져 가는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그래도 심장은 어쩔 수 없이 욱신거렸다. 나는 깊게 숨을 들이마신 뒤 조용히 말했다. “육태윤, 우리 헤어지자. 사귄 지 10년째 되는 오늘, 여기서 끝내.” 육태윤이 내 마지막 말을 들었는지조차 알 수 없었다. 대답 대신 돌아온 건 차 바퀴가 일으킨 먼지뿐이었다. 나는 가장 빠른 비행기표를 예약해서 이곳을 떠났다. 탑승을 앞둔 순간까지 육태윤의 영상통화가 쉬지 않고 울려댔다. 내가 육태윤의 연락처를 삭제하자, 모르는 번호로 문자를 계속 보내왔다. [어디야? 그만 좀 말썽 부리면 안 돼?] 내가 휴대폰을 쓰레기통에 버릴 때까지도 메시지는 끝없이 이어졌다.

More GoodNovel Novel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