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돌아온 그날 밤의 다른 선택

GoodNovel 완결

신입직원 연수 과정에 참여 중인 인턴 한유진은 태풍이 몰아치던 밤, 부서 단톡방에 도움을 요청했다. 태풍으로 아파트가 침수되고 있는데 어디로도 갈 수 없다며, 내 남동생인 은혁이에게 근처 호텔까지 태워다줄 수 없겠냐는 것이었다. 전생의 나는 결국 그 부탁을 들어주며 은혁이를 한유진에게 보내고 말았다. 그리고 다음 날 아침. 한유진은 찢어진 브래지어를 움켜쥔 채 나타나 눈물을 흘리며 내 남동생이 자신을 성폭행했다고 고발했다. 대학교 신입생이었던 은혁이는 아무리 억울함을 호소해도 아무도 믿어주지 않았고, 결국 학교에서 정학 처분까지 받았다. 우리 가족도 무너졌다. 가업은 치명적인 타격을 입은 데다, 아버지는 뇌졸중으로 쓰러지셨고, 어머니 역시 극심한 스트레스를 견디지 못하고 쓰러졌다. 반면 한유진은 쏟아지는 동정 여론을 등에 업고, 우리 가족에게서 13억 원의 합의금을 받아내며 회사에서 정규직 전환에도 성공했다. 심지어는 내게 돌아올 승진 자리까지 차지했다. 그리고 어느 날, 내 앞에 나타나 비웃듯 말했다. “서은영 씨, 지금의 내가 있는 건 전부 당신 덕분이에요. 그날 당신이 은혁 씨를 보내지만 않았어도, 내가 여기까지 올라올 수 없었겠죠.” 그렇게 모든 것을 잃은 뒤 눈을 떴을 때, 나는 다시 태풍이 몰아치던 그날 밤으로 돌아와 있었다. 그리고 부서 단톡방에는 전생과 똑같은 메시지가 올라와 있었다. ‘집이 침수되고 있어요. 비가 너무 많이 와서 어디로도 갈 수가 없어요.’ ‘은영 씨, 혹시 동생분이 근처 호텔까지만 태워다줄 수 있을까요?’ 나는 차 키를 집어 들고 나가려는 은혁의 손을 즉시 붙잡으며, 부서 단체 채팅방에 답장을 보냈다. “은혁이는 가지 않을 거예요. 주소를 보내세요. 제가 직접 긴급구조대와 시 재난대응팀에 연락하겠습니다.”

챕터 (1)

1화

신입직원 연수 과정에 참여 중인 인턴 한유진은 태풍이 몰아치던 밤, 부서 단톡방에 도움을 요청했다. 태풍으로 아파트가 침수되고 있는데 어디로도 갈 수 없다며, 내 남동생인 은혁이에게 근처 호텔까지 태워다줄 수 없겠냐는 것이었다. 전생의 나는 결국 그 부탁을 들어주며 은혁이를 한유진에게 보내고 말았다. 그리고 다음 날 아침. 한유진은 찢어진 브래지어를 움켜쥔 채 나타나 눈물을 흘리며 내 남동생이 자신을 성폭행했다고 고발했다. 대학교 신입생이었던 은혁이는 아무리 억울함을 호소해도 아무도 믿어주지 않았고, 결국 학교에서 정학 처분까지 받았다. 우리 가족도 무너졌다. 가업은 치명적인 타격을 입은 데다, 아버지는 뇌졸중으로 쓰러지셨고, 어머니 역시 극심한 스트레스를 견디지 못하고 쓰러졌다. 반면 한유진은 쏟아지는 동정 여론을 등에 업고, 우리 가족에게서 13억 원의 합의금을 받아내며 회사에서 정규직 전환에도 성공했다. 심지어는 내게 돌아올 승진 자리까지 차지했다. 그리고 어느 날, 내 앞에 나타나 비웃듯 말했다. “서은영 씨, 지금의 내가 있는 건 전부 당신 덕분이에요. 그날 당신이 은혁 씨를 보내지만 않았어도, 내가 여기까지 올라올 수 없었겠죠.” 그렇게 모든 것을 잃은 뒤 눈을 떴을 때, 나는 다시 태풍이 몰아치던 그날 밤으로 돌아와 있었다. 그리고 부서 단톡방에는 전생과 똑같은 메시지가 올라와 있었다. ‘집이 침수되고 있어요. 비가 너무 많이 와서 어디로도 갈 수가 없어요.’ ‘은영 씨, 혹시 동생분이 근처 호텔까지만 태워다줄 수 있을까요?’ 나는 차 키를 집어 들고 나가려는 은혁의 손을 즉시 붙잡으며, 부서 단체 채팅방에 답장을 보냈다. “은혁이는 가지 않을 거예요. 주소를 보내세요. 제가 직접 긴급구조대와 시 재난대응팀에 연락하겠습니다.” 제1화 부서 단톡방이 순식간에 조용해졌다. 몇 초 후, 한유진이 음성 메시지를 하나 보냈다. 메시지 너머로 거센 빗소리가 요란하게 들려왔다. “전 정말 긴급 구조대까지 개입시키고 싶지는 않아요. 오늘 밤에는 정말 생명이 위험한 다른 사람들도 있을 텐데, 제가 괜히 도움을 요청해서 그분들에게 가야 할 지원을 빼앗게 된다면 너무 죄책감이 들 것 같아요.” “제가 사는 아파트가 아직 그렇게 심각한 상황인 건 아니거든요. 그냥 은영 씨 집이 여기서 차로 10분밖에 안 걸리고, 은혁 씨가 지프차를 가지고 있다고 하니까, 혹시 근처 호텔까지만 데려다줄 수 있지 않을까 해서요.” 그러자 거의 기다렸다는 듯 동료들이 하나둘 의견을 보태기 시작했다. [오늘 밤 긴급구조대는 아마 정신없이 바쁠 거야. 우리가 굳이 신고를 하지 않을 수 있다면 안 하는 게 낫지.] [사륜구동 지프차라면 침수된 도로도 우버보다 훨씬 잘 지나갈 수 있을 거야.] 나는 곧바로 답장을 보냈다. [시에서는 이미 외출 금지 긴급명령을 내렸어요. 제 남동생은 아직 19살에 긴급구조대원도 아니고, 그 아이의 지프차 역시 구조 차량도 아니에요. 만약 은혁이에게 무슨 일이라도 생기면, 누가 책임지실 건가요?] 한유진이 곧바로 답장을 보냈다. [맞아요. 제가 괜한 부탁을 했네요. 다른 방법을 찾아볼게요.] 나는 이제야 대화가 정말 끝난 줄 알았다. 그런데 잠시 후, 또 다른 메시지가 올라왔다. [내일 아침 출근 시간까지 제가 나타나지 않으면 경찰에 신고해 주세요.] 부서 단톡방이 순식간에 난리가 났다. 다른 사람이 미처 답장하기도 전에, 상사인 강도윤이 대화에 끼어들었다. [서은영 씨, 한유진 씨는 당신 팀원이잖아요. 저는 우리 회사의 관리자들이 도움이 필요한 상황에서 자기 팀원이 아무도 도움 없이 방치되는 일이 없도록 책임 있게 챙길 거라고 믿습니다.] 소파에 앉아 있던 은혁이 고개를 돌려 나를 바라봤다. “누나, 그냥 내가 갈까?” 은혁은 겨우 19살이었다. 누군가를 도와주는 일이 설마 자신의 인생을 망쳐놓을 수도 있다고는 아직 생각하 못할 만큼 어린 나이였다. 나는 은혁이 집으려던 차 키를 조용히 다시 테이블 위로 밀어놓았다. “앉아.” “그래도 유진 씨 집이 침수되고 있다고 했잖아. 오늘 밤에는 거기서 지낼 수도 없다고 하고. 정말 아파트가 침수되고 있다면...” 내가 은혁의 말을 끊으며 말했다. “은혁이 네가 아니라, 그 사람을 도와줄 사람들이 따로 있어.” 나는 다시 부서 단톡방으로 시선을 돌렸다. [은혁이는 오늘 밤 개인적인 일정이 있어서 갈 수 없습니다.] [한유진 씨, 만약 정말 위험한 상황이고, 내일 아침까지 아무 연락도 되지 않는다면 제가 직접 신고해서 누군가가 한유진 씨의 상태를 확인하도록 하겠습니다.] 그러자 곧바로 누군가 답장을 보냈다. [서은영 씨... 너무 냉정한 거 아닌가요?] 다른 사람들도 비슷한 의견을 잇달아 보냈다. 알림은 쉴 새 없이 계속 울렸다. 그러던 중 강도윤이 나를 직접 태그했다. [정말 신중하게 생각하고 있는 거겠죠? 위기 상황에서 사람을 어떻게 대하느냐는 그 사람의 인성을 잘 보여주는 법입니다.] 잠시 후, 한유진이 사진 한 장을 올렸다. 검게 탁해진 침수된 물이 나무 바닥 전체를 뒤덮고 있었다. 침대 옆에는 분홍색 슬리퍼 한 켤레가 물 위에 둥둥 떠 있었고, 물은 이미 매트리스가 놓인 침대 프레임까지 차오른 상태였다. 그리고 마지막 메시지가 하나 올라왔다. [팀장님, 서은영 씨를 탓하지는 말아 주세요.] 제2화 [아마 어린 남동생이 걱정돼서 그러시는 거겠죠. 밖의 날씨가 워낙 심각하니까요. 조금만 더 기다려볼게요. 어쩌면 비가 잦아들지도 모르니까요.] 한유진의 동정심을 유발하는 멘트에 부서 단톡방이 순식간에 폭발했다. [오늘 밤 태풍이 좋아질 기미는 전혀 없잖아.] [서은영 씨는 집이 고지대에 있으니까 괜찮겠지만, 모두가 그런 혜택을 누릴 수 있는 건 아니라고요.] [서은혁 씨가 누구를 구조하러 가는 것도 아니잖아요. 그냥 가장 가까운 호텔까지 태워다 주는 것뿐인데 너무한 거 아닌가요?] 끊임없이 울리는 알림 소리를 듣던 아버지가 서재에서 나왔다. 아버지가 창밖을 향해 시선을 돌리자, 거센 빗줄기가 유리창을 세차게 두드리고 있었다. “오늘 밤 은혁이는 절대 밖에 내보내지 마라.” 그 말은 전생에서 아버지가 했던 말과 조금도 다르지 않았다. 하지만 전생의 나는 아버지의 말을 듣지 않았다. 한유진은 대학을 갓 졸업하고, 이 도시로 이사 온 지도 얼마 되지 않았다. 혼자 살고 있으며, 이제 막 자신의 커리어를 만들어가려던 참이었다. 나는 그저 한유진을 도와주는 것이 사람으로서 당연히 해야 할 일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몇 주 뒤, 시위대가 우리 집 앞에 몰려들었다. 그들은 내 남동생을 강간범이라고 적은 피켓을 들고 있었다. 누군가는 우리 집 현관문에 붉은 페인트를 뿌렸고, 기자들은 며칠 동안이나 우리 집 앞을 지키며 진을 쳤다. 거래처들이 하루아침에 우리 가족 사업과의 거래를 끊어버리자, 아버지는 뇌졸중으로 쓰러지셨다. 어머니는 소리를 지르며 몰려든 사람들에게 둘러싸인 채 계란과 쓰레기까지 맞은 뒤 결국 심장마비를 일으키고 쓰러지셨다. 나는 아직도 두 분이 길바닥에 쓰러진 채 나를 향해 손을 뻗는 모습을 잊을 수가 없었다. 그날이었다. 나는 그제야 깨달았다. 무작정 베푸는 동정심은, 가장 사랑하는 사람들을 파멸시킬 수도 있다는 것을 말이다. 그때 휴대폰이 다시 진동했다. 새로운 알림이었다. 강도윤이 나를 태그했다. [서은영 씨, 지역 부사장 인사 결정은 다음 주에 최종 확정됩니다. 리더십은 분기별 실적만으로 평가되는 게 아닙니다. 팀원이 도움이 필요한 순간, 어떻게 행동했는지를 사람들은 기억합니다.] 그 말은 직접적인 명령은 아니었다. 은혁의 이름을 언급하지도 않았다. 그저 내가 얼마나 동정심 많고 배려심 있는 사람처럼 보이느냐에 따라 내 승진이 결정될 수도 있다는 사실을 아주 교묘하게 상기시키는 말이었다. 나는 답장을 보내기 전 잠시 키보드 위에 손가락을 올려놓았다. [제 대응은 회사의 긴급 상황 대응 절차에 완전히 부합합니다. 한유진 씨, 정확한 주소와 아파트 호수를 보내주세요.] [침수 때문에 밖으로 나가는 것조차 위험한 상황이라면, 시 재난 대응팀에 연락하고 필요할 경우 긴급구조대와 협조하겠습니다.] 한유진의 답장이 거의 바로 돌아왔다. [제발 그러지 말아 주세요. 지금 제가 사는 곳이 불법 재임대를 받은 집이라서요. 구조대가 오면 집주인이 저를 당장 내쫓을 거예요. 저는 이제 막 졸업해서 가진 것도 없는데 제가 가진 유일한 집까지 잃을 수는 없어요.] 부서 단톡방의 동정 여론은 완전히 한유진 쪽으로 기울었다. [이미 저렇게 힘든 상황에 처해 있는데, 회사 규정 뒤에 숨지 마세요.] ‘내가 한유진을 곤란하게 만들고 있다고? 그들 중 단 한 명이라도 생각해 본 사람이 있을까?’ ‘나를 도저히 빠져나올 수 없는 곤란한 상황에 몰아넣는 건 한유진이라는 사실을.’ [난 서은영 씨가 진심으로 자기 팀원들을 아끼는 사람이라고 생각했는데요. 제가 잘못 봤나 보네요. 도움이 필요한 사람을 도와줄 수도 있으면서, 그냥 지켜보기만 하고 말이죠.] [불쌍한 한유진 씨. 저런 팀장을 만났으니 얼마나 힘들겠어요.] 나는 작게 코웃음 쳤다. [한유진 씨에게 차가 필요하다고 생각하는 분이 있다면, 직접 자원해서 데려다주세요. 제 남동생은 오늘 밤 이 집을 떠나지 않을 겁니다.] 나는 메시지를 전송하고, 부서 단톡방의 알림을 껐다. 그리고는 휴대폰 화면을 잠가버렸다. 내 뜻을 굽히지 않은 대가로 승진을 놓치게 되든, 심지어 회사를 그만두게 되든 상관없다고 생각했다. 그로부터 1초도 지나지 않아 은혁의 휴대폰 화면이 켜졌다. 은혁은 미간을 찌푸리며 휴대폰 화면을 내게 보여줬다. 한유진 님이 회원님과 연결하고 싶어 합니다. 한유진은 어떻게 알아냈는지 은혁의 비공개 계정까지 찾아낸 모양이었다. 한유진이 보낸 연결 요청에는 단 한 문장만 적혀 있었다. [괜히 불편을 끼쳐서 죄송해요. 저는 처음부터 당신을 이 일에 끌어들이고 싶지 않았어요.] 나는 은혁의 손에서 휴대폰을 가져왔다. [거절, 그리고 차단.] 은혁은 놀란 표정으로 나를 바라봤다. “그래도 괜찮은 사람처럼 보이는데. 일부러 누군가를 조종하려는 것 같지는 않아.” 나는 은혁의 눈을 똑바로 바라봤다. “은혁아, 이건 꼭 기억해.” “정말 위험한 상황이라면 긴급구조대에 연락하고, 건물 관리사무소에도 연락해. 그리고 제대로 된 해결 방법을 찾는 게 정상이야.” “그런데 누군가가 그런 정상적인 방법은 싹 무시한 채 굳이 너한테만 도움을 요청한다면, 그건 구조받는 것과는 전혀 다른 이유로 네게서 원하는 게 있기 때문이야.” 은혁은 눈을 한 번 깜빡였다. 내 말이 은혁의 머릿속에 깊이 남은 듯했다. 나는 은혁의 등을 살짝 밀어 방으로 향하게 했다. “지금부터는 계속 집 안에 있어. 밖에는 절대 나가면 안 돼.” 은혁은 고개를 끄덕였다. “약속할게.” 잠시 후, 은혁의 방문이 닫히는 소리가 들렸다. 철컥- 그제야 나는 비로소 안심하며 숨을 내쉴 수 있었다. 제3화 눈시울이 뜨겁게 달아올랐다. 이번만큼은 다시는 내 남동생도, 우리 가족도 파멸하게 두지 않을 것이다. 다음 날 아침. 내가 사무실에 들어선 지 얼마 지나지도 않았는데 복도에서 누군가 다급하게 비명을 질렀다. “누가 좀 빨리 올라가 봐요! 한유진 씨가 옥상 주차장 난간 끝에 서서 뛰어내리겠다고 하고 있어요!” 전생에서 나는 똑같은 말을 들었었다. 귀를 찌르는 듯한 날카로운 이명이 귓가를 가득 메웠다. 순간, 발밑의 공간이 기울어지는 듯했고 나는 하마터면 균형을 잃을 뻔했다. 그러나 이내 정신을 가다듬고 사람들을 따라 옥상 주차장으로 올라갔다. 여전히 빗줄기는 건물을 세차게 후려치고 있었다. 주변의 고층 빌딩 사이로 거센 바람이 울부짖었다. 전생에서 보았던 바로 그 장면이 다시 내 눈앞에 펼쳐졌다. 한유진은 옥상 주차장 가장자리 근처에 서서 구겨진 데다 빗물에 흠뻑 젖은 옷차림을 하고 있었다. 떨리는 손에는 마치 증거물이라도 되는 듯 찢어진 천 조각을 꼭 쥐고 있었다. 한유진은 나를 발견하는 순간, 시선을 정확히 내게 고정했다. 그러자 눈가에 순식간에 눈물이 차올랐다. “서은영 씨... 서은혁 씨가 저를 성폭행했어요! 여기 그 사람의 정액이 묻어 있다고요!” 한유진은 손가락을 떨며 찢어진 천 조각을 들어 올렸다. “서은영 씨, 저도 일이 이렇게까지 커질 줄은 정말 몰랐어요. 하지만 눈을 감을 때마다 어젯밤에 있었던 일이 계속 떠올라서 무서워요. 당신 남동생 때문에 제 인생이 완전히 망가졌다고요” 사람들 사이에서 수군거리는 소리가 퍼져 나갔다. 점점 더 많은 직원이 의심스러운 눈빛으로 나를 바라보기 시작했다. 강도윤이 굳은 얼굴을 한 채 내 쪽으로 돌아섰다. “서은영 씨, 동생한테 전화해 보세요. 지금 당장요.” 나는 강도윤의 눈을 똑바로 바라보며 말했다. “제 남동생은 어젯밤 집 밖으로 한 발짝도 나가지 않았어요. 한유진 씨를 성폭행했을 리 없습니다.” 나는 휴대폰을 꺼내 서은혁의 이름을 눌렀다. 몇 번 신호음이 울린 뒤, 영상통화 화면에 은혁이의 얼굴이 나타났다. “누나?” 나는 휴대폰 화면을 한유진 쪽으로 돌렸다. “은혁아, 지금 어디야?” “집인데.” “어젯밤에 밖에 나갔어?” 은혁이는 미간을 찌푸렸다. “아니. 누나가 시키는 대로 계속 방에 있었어. 밤새 게임하고 있었는데.” 그 순간, 한유진이 홱 고개를 들었다. “거짓말이에요.” 한유진이 휴대폰 화면을 노려보며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당신이잖아요. 어젯밤에 검은색 재킷을 입고, 검은색 지프차를 몰고 나를 찾아왔었잖아요.” 눈물이 한유진의 뺨을 타고 흘러내렸다. “그러고는 내 브래지어를 억지로 찢었잖아요. 내 목에 난 이 멍을 보라고요. 전부 당신이 한 짓이잖아요.” 은혁이의 몸이 그대로 굳어버렸다. 얼굴은 순식간에 새빨갛게 달아올랐다. 갑작스러운 성폭행 혐의와 주변에서 쏟아지는 경악 어린 시선에 너무 큰 충격을 받은 탓인지, 은혁이는 몇 마디밖에 하지 못했다. “거짓말이야! 난 밤새 집에서 게임하고 있었다고요!” 그러자 한유진은 마치 그 말이 자신에게 또 한 번 치욕을 준 것처럼 반응하며, 히스테릭하게 비명을 질렀다. “거짓말하지 마세요! 어젯밤 그 사람은 당신이었어요! 당신이 나한테 누나가 좀 차갑게 굴 수도 있지만 사실은 사람을 잘 챙기는 사람이고, 나를 데려다 달라고 당신을 보냈다고 했잖아요. 그래서 내가 당신 차에 탔던 거라고요.” 눈물이 한유진의 얼굴을 타고 계속 흘러내렸다. “나한테도 남자친구가 있어요. 내가 왜 이런 일로 거짓말을 하겠어요?” 그 말을 듣자 동료들이 나를 바라보는 눈빛이 더 차가워졌다. “역시 돈 많은 집안에서 자란 애들은 다르구먼. 이런 짓을 해놓고도 죄책감 하나 없이 저렇게 서서 부정하는 걸 보니 말이야.” “저런 사람은 반드시 제대로 조사를 해야 해. 가족이 운영하는 회사까지 전부 조사해야 한다고.” “이번이 처음이 아닐지도 몰라. 세상에, 완전히 괴물이잖아.” 은혁이의 얼굴에서 핏기가 싹 사라졌다. 사방에서 자신을 향해 쏟아지는 비난의 시선에 둘러싸인 은혁이는 지금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조차 제대로 받아들이지 못하는 겁먹은 아이처럼 보였다. “난 밤새 내 방에서 게임하고 있었어요! 증인도 있다고요! 못 믿겠으면 직접 물어보면...” 하지만 은혁이가 말을 끝내기도 전에 한유진이 갑자기 터져 나오듯 울기 시작했다. “서은영 씨는 당신 누나잖아요. 당연히 당신 편을 들겠죠.” 한유진은 숨조차 제대로 쉬기 어려울 정도로 심하게 울고 있었다. “나는 성폭행을 당했다고요. 그런데 지금 여기서 당신들은 모든 상황을 뒤집어서 오히려 나를 거짓말쟁이로 몰아가고 있잖아요? 내가 정말 죽는 것 말고는 다른 선택을 할 수 없게 만들 거예요?” 그 모습을 본 사람들은 더욱 감정적으로 변했다. “이건 너무하잖아! 한유진 씨가 고작 인턴이고, 당신들 가족처럼 돈도 인맥도 없다고 해서 이런 일을 저지르고도 빠져나갈 수 있다고 생각하는 거예요?” “잘못을 저지른 사람이 이제는 피해자를 죄인처럼 몰아가려고 하는데, 이게 말이 돼?” 화가 난 몇몇 남성 동료들이 주먹을 꽉 쥔 채 내 쪽으로 다가왔다. “그만해요. 누군가는 저 사람이 저지른 일에 대한 대가를 치르게 해야죠.” 내가 앞으로 나서서 회사 동료들을 막으려던 순간, 등 뒤에서 귀에 익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만!” 내가 뒤를 돌아보자, 옥상 주차장 쪽으로 다급히 달려오는 내 부모님이 보였다. 제4화 “분명 뭔가 착오가 있을 겁니다.” 군중 속에 있던 한 남자가 차갑게 비웃었다. “저 사람 말 좀 들어봐. 강간범 뒤에 항상 ‘우리 아들은 절대 그런 짓을 할 애가 아니에요’라고 말하는 부모들이 꼭 있지.” “어쩌면 바로 그런 부모들 때문에 저런 사람들이 계속 빠져나가는 걸지도 모른다고.” 아버지의 얼굴이 붉게 달아올랐다. “우리 집 현관 앞 CCTV가 설치되어 있어요. 어젯밤 은혁이가 집을 나갔다면 그 장면이 분명 영상에 찍혀 있을 겁니다.” 그러자 한유진이 거의 즉시 받아쳤다. “직접 설치한 CCTV 영상이 무슨 증거가 된다는 거죠? 그 영상이 조작되지 않았다는 걸 어떻게 믿어요?” “시스템 자체가 당신들 소유인데. 당신들처럼 돈과 자원이 많은 사람들이라면 기록을 바꾸는 게 그리 어려운 일도 아니잖아요.” 몇몇 사람들이 고개를 끄덕였다. “자기들이 직접 관리하는 CCTV가 무슨 증거가 된다고 그러는 거야? 자기들 무죄를 입증하려고 영상을 조작했는지 누가 알아?” “이제 보니까 왜 저렇게 뻔뻔한지 알겠네. 가짜 알리바이까지 미리 준비해 놓은 거네. 처음부터 다 계획했던 거라고. 정말 잔인한 사람들이구먼.” 어머니의 두 손이 떨리기 시작했다. “당신들도 아무런 증거도 없잖아요. 이 여자 말만 듣고 내 아들을 범죄자로 몰아가고 있잖아요. 이건 명예훼손이에요!” 그 말을 듣는 순간, 한유진은 갑자기 몸을 난간 쪽으로 바짝 밀어붙였다. 한유진의 눈은 분노와 고통으로 붉게 물들어 있었다. “사모님, 지금 제가 당신 아들한테 누명 씌우기 위해 제 명예를 스스로 망치고 있다고 말씀하시는 거예요? 맞아요. 당신들 가족은 돈이 많죠.” “저 같은 사람이 어떻게 당신들 같은 사람들과 싸울 수 있겠어요? 오늘 저는 저의 무죄를 증명하기 위해 제 목숨까지 걸겠어요.” 강도윤이 즉시 앞으로 나서며 얼굴이 순식간에 창백해졌다. “한유진 씨, 제발 무모한 짓은 하지 마세요. 원하는 게 있다면 뭐든 이야기해요. 다 같이 방법을 찾아보자고요.” 한유진은 입술을 깨물었다. 목소리는 떨리고 있었다. “저 사람들이 자신들이 저지른 일을 인정했으면 좋겠어요. 책임을 지게 하고 싶어요.” 한유진은 원망이 가득한 눈으로 우리 부모님을 바라봤다. “당신들 가족이 당신들 아들이 저지른 일에 책임지길 원해요. 정말 옳은 일을 해야 한다고 믿는다면, 말로 변명만 하지 말고 행동으로 보여주세요.” 그 말을 끝낸 한유진은 옥상 가장자리 쪽으로 한 걸음 더 다가갔다. 분위기가 순식간에 아수라장이 됐다. “진짜 뛰어내리려고 해!” “누가 좀 막아봐!” 강도윤이 몸을 홱 돌려 나를 향해 소리쳤다. “서은영 씨, 한유진 씨가 난간 끝에 서 있잖아요. 일단 원하는 게 뭐든 들어주겠다고 하세요. 당신 가족은 돈이 많잖아요. 사람 목숨보다 돈이 더 중요한 겁니까?” 한유진은 한쪽 다리를 난간 밖으로 넘겼다. 옥상 테라스 끝에 매달린 한유진의 몸은 공포에 질린 듯 떨리고 있었다. “내가 죽으면, 서은혁은 평생 나에게 시달리게 될 거야. 저 사람이 어떤 괴물인지 모두가 알게 만들겠어. 강간범이자 살인자라고. 절대 편하게 살게 두지 않을 거야!” 한유진의 눈에는 절망과 분노가 뒤섞여 있었다. 부모님은 겁에 질렸다. “제발, 뛰어내리지 마세요. 무슨 일이 있었든 말로 해결할 수 있다고요. 보상 문제도 얘기해 보죠, 일단 난간 안쪽으로 들어오세요.” 아버지는 떨리는 손으로 백지 수표를 꺼냈다. 나는 아버지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고 있었다. 일단 한유진을 난간에서 떨어뜨려 놓은 뒤, 나중에 진실을 조사하려는 것이었다. 전생에서도 아버지는 똑같은 백지 수표를 꺼내 들었다. 아버지는 돈을 주면 우리에게 진실을 조사할 시간을 벌 수 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 수표는 결국 우리 가족이 서은혁의 죄를 인정했다는 첫 번째 ‘증거’가 되어버렸다. 아버지가 금액을 적기 위해 수표 위에 펜을 든 순간이었다. 그 모습을 본 한유진의 눈에 숨기기도 전에 잠깐의 흥분과 기대가 스쳐 지나갔다. “잠깐만요.” 나는 손을 뻗어 아버지의 손을 막았다. 모두가 충격에 빠진 시선으로 지켜보는 가운데, 나는 한유진을 향해 돌아섰다. “한유진 씨, 마지막으로 한 번만 물을게요. 어젯밤 당신 아파트에 찾아온 사람이 정말 제 남동생 은혁이라고 확신하나요?” 한유진은 아버지 손에 들린 수표를 바라보며, 단호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확신해요. 그 사람이 재가 되어도 알아볼 수 있을 정도로 확실해요. 제 속옷에 증거도 있다니까요. 거기에 그 사람 DNA가 묻어 있어요.”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요. 그렇게까지 확신한다면, 원하는 걸 그대로 드리죠.” 내가 휴대폰을 꺼내자, 한유진이 침을 삼켰다. 목소리에는 감추지 못한 기대감이 묻어 있었다. “계좌이체로 하시려고요? 좋아요. 13억이에요. 단 한 푼도 깎을 생각 마세요.” 나는 차갑게 웃었다. “13억? 아니요. 당신이 원하는 정의 말이에요. 그건 제가 제대로 드리죠.” 그 말을 끝으로 나는 휴대폰 잠금을 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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