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 번의 생, 두 번의 이별

GoodNovel 완결

사람들은 태자 박준영이 나를 무척 사랑한다고 말했다. 하지만 태자비를 택하던 그날, 박준영은 나를 지나쳐서 태자비의 여의를 내 언니 이하윤에게 건네줬다. 하지만 나는 슬퍼하지 않고 오a히려 웃었다. “전하, 언니와 백년해로하십시오.” 지난 생, 나는 아이를 가졌을 때, 침상 위에서 구르던 박준영과 언니를 발각했다. 이성을 잃은 나는 검을 들고 언니의 목을 쳤다. 그 뒤로 박준영은 평생 나를 미워했고 즉위한 뒤, 언니를 황후로 봉했을 뿐만 아니라 내가 목숨 걸고 낳은 아이까지 언니의 아이로 들였다. 나는 머리까지 자르며 황후를 폐위해 달라고 했지만 박준영은 조서를 찢고 나를 궁에 가둬버렸다. “너는 짐의 황후다. 평생 짐의 옆에서 떠날 생각은 하지 말거라!” 나중에 나는 황궁에서 도망쳐 나와서 병사들을 거느리고 변방을 지켰지만 적군에게 매복 당했다. 박준영은 홀로 나를 구하러 왔고 검과 화살을 막아줬다. 죽기 전, 그는 피로 물든 손으로 내 눈물을 닦으며 말했다. “하랑아, 날 위해 울지 마라. 이번 생에는 내가 너에게 미안했다. 다음 생이 있다면 나와 하윤이를 허락해다오.” 그 말을 들은 나는 힘겹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다시 눈을 떴을 때, 나는 태자비를 택하던 그날로 돌아왔다. 이번에 나는 박준영의 뜻대로 해주기로 했다.

챕터 (1)

1화

사람들은 태자 박준영이 나를 무척 사랑한다고 말했다. 하지만 태자비를 택하던 그날, 박준영은 나를 지나쳐서 태자비의 여의를 내 언니 이하윤에게 건네줬다. 하지만 나는 슬퍼하지 않고 오a히려 웃었다. “전하, 언니와 백년해로하십시오.” 지난 생, 나는 아이를 가졌을 때, 침상 위에서 구르던 박준영과 언니를 발각했다. 이성을 잃은 나는 검을 들고 언니의 목을 쳤다. 그 뒤로 박준영은 평생 나를 미워했고 즉위한 뒤, 언니를 황후로 봉했을 뿐만 아니라 내가 목숨 걸고 낳은 아이까지 언니의 아이로 들였다. 나는 머리까지 자르며 황후를 폐위해 달라고 했지만 박준영은 조서를 찢고 나를 궁에 가둬버렸다. “너는 짐의 황후다. 평생 짐의 옆에서 떠날 생각은 하지 말거라!” 나중에 나는 황궁에서 도망쳐 나와서 병사들을 거느리고 변방을 지켰지만 적군에게 매복 당했다. 박준영은 홀로 나를 구하러 왔고 검과 화살을 막아줬다. 죽기 전, 그는 피로 물든 손으로 내 눈물을 닦으며 말했다. “하랑아, 날 위해 울지 마라. 이번 생에는 내가 너에게 미안했다. 다음 생이 있다면 나와 하윤이를 허락해다오.” 그 말을 들은 나는 힘겹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다시 눈을 떴을 때, 나는 태자비를 택하던 그날로 돌아왔다. 이번에 나는 박준영의 뜻대로 해주기로 했다. 제1화 내 말이 떨어지자마자 모두가 어리둥절하게 나를 바라봤다. 상경 사람이라면 모두가 알고 있었다. 박준영은 내 신경을 안정시켜줄 등불을 찾기 위해 눈보라를 뚫고 삼천 개의 계단을 올라가서 호국사의 문을 두드린 이였다. 내가 말 등에서 떨어졌을 때도, 태자의 신분 따위 아랑곳하지 않고 나를 안고 의원을 찾아갔다. 박준영은 내가 아니면 그 누구와도 혼인하지 않겠다고 말했었다. 그래서 모두가 오늘 박준영의 옆에 설 이가 나라고 생각했다. 박준영도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는 잠시 멈칫했지만 곧 냉랭하게 나를 경계하기 시작했다. 그 순간, 나는 박준영도 함께 돌아왔음을 알아차렸다. 저번 생에 이하윤이 죽었다는 사실을 알고 나서도 박준영은 이런 눈빛으로 나를 바라봤었다. 나를 갈기갈기 찢어버릴 것 같은 그런 눈빛. “전하, 다음 생이 있다면 부디 저와 혼인해 주십시오.” 이하윤이 죽기 전에 남긴 이 한마디 때문에 박준영은 평생을 서로 미워하고 원망하며 살았다. 이하윤의 기일마다 박준영은 나를 이하윤의 화상 앞에서 무릎 꿇고 참회하게 했다. “네가 하윤이를 죽였다. 평생 네 죄를 뉘우치면서 살아!” 심지어 내가 목숨 걸고 낳은 자식들까지 박준영의 입김에 나를 어머니로 인정하려고 하지 않았다. 아이들은 내가 선물한 장명쇠까지 집어던지며 말했다. “네가 어마마마를 죽였다! 너는 우리의 어머니가 될 자격이 없다!” 하지만 적군이 쳐들어왔을 때, 박준영은 나 대신 화살을 막아주면서까지 나를 품에서 놓지 않았다. 그 이유는 하나였다. 다음 생에 내가 박준영과 이하윤의 인연을 허락하도록 하기 위함이었다. 그래서 지금의 나는 무척 담담했다. “전하, 제 언니와 인연을 맺게 된 것을 감축드리옵니다. 내 말을 들은 박준영은 미간을 찌푸렸다. 그때, 이하윤이 나에게 다가오더니 내 손을 잡았다. “하랑아, 네가 언짢다는 거 안다. 헌데 전하께서 마음에 품은 이가 나인 걸 어떡하겠니. 혹여라도 전하를 탓하진 말거라.” 말을 하는 이하윤이 손목에 하고 있던 금팔찌는 외할머니께서 내게 남겨주신 성인식 선물이었다. 그런데 어제 부모님께서는 오늘 이하윤의 기를 세워주겠다며 그 팔찌를 가져갔다. “언니 말이 맞습니다.” 나는 손을 빼내며 말했다. 연회가 끝난 뒤, 박준영이 내 앞을 막아섰다. 그는 나를 내려다보며 차가운 목소리로 말했다. “이하랑, 하윤이는 마음이 약해서 억울한 걸 못 견뎌 한다. 이 때문에 하윤이를 건드린다면 내 옛정 따위 봐주지 않을 것이다.” 박준영의 말을 들은 나는 씁쓸하게 웃었다. 전생의 나는 박준영이 즉위할 때까지 곁을 지키고 자객의 검을 막아주고 딸과 아들까지 낳아줬다. 그런데 박준영은 그 모든 것을 고작 옛정이라고 치부했다. “전하께서 언니를 택하셨으니 저도 전하의 뜻을 따르겠습니다.” 내 말을 들은 박준영의 표정이 굳었다. 그는 한참이 지나서야 입을 뗐다. “네가 말만 잘 듣는다면 네게 괜찮은 인연을 찾아줄 것이다.” 나는 박준영의 말을 들었지만 그에게 더 이상 눈길을 주지 않고 그곳을 떠났다. 내 처소로 들어섰을 때, 어머니께서는 봉황관을 꺼내고 있었다. 그 봉황관은 내가 삼 년 동안 모은 돈으로 사람을 찾아서 강남에서 제일 좋은 진주를 얻어 한땀 한땀 직접 만든 봉황관이었다. 박준영은 그 봉황관을 봤을 때, 참 예쁘게도 웃었다. “하랑아, 나와 평생 살아가고 싶다는 거로구나.” 그런 봉황관을 본 나는 저도 모르게 사람들을 막으려고 했다. 하지만 어머니는 그런 나를 보더니 하찮다는 듯 말했다. “뭘 하려는 게냐? 너는 이제 태자비가 될 수 없는 몸이니 이 봉황관은 네 언니에게 줘야지. 혼사 전에 쓸데없는 일을 만들었다간 내 절대 너를 용서치 않을 것이야!” 어머니의 말을 들은 나는 이를 악물고 천천히 옆으로 물러나 더 이상 아무 말하지 않았다. 사람들이 떠난 뒤, 나는 침상 아래에서 나무 상자 하나를 꺼냈다. 상자 안에는 낡아버린 혼서가 있었다. 삼 년 전, 한 사내가 전장으로 나가기 전, 자신이 살아 돌아온다면 혼인해 주겠냐고 물었었다. 그때 내 마음은 전부 박준영에게 향해있었기에 나는 대답을 해주진 않았다. 그리고 지금, 나는 드디어 붓을 들었다. “혼인하겠습니다. 헌데 저를 데리러 와주실 마음이 아직 있습니까?” 제2화 동궁에서 태자비를 택한다는 소문이 상경 전체에 파다하게 퍼졌다. 모두가 나를 웃음거리로 삼았다. “태자께서 전에 하랑 아씨 아니면 안 된다고 하지 않았어? 그럼 뭐하냐고, 지금은 다른 이를 택했는데. 사람들 앞에서 버림받았으니 누가 저 아씨랑 혼인하려고 하겠어?” “더러운 짓거리를 해서 태자의 미움을 산 거 아니야?” 사람들의 수군거림을 나는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려보냈다. 전생에는 더 듣기 힘든 말을 많이 들었기 때문이다. 머지않아 동궁에서 책봉례 의복을 보내왔다. 이하윤은 새빨간 의복을 바꿔 입고 구리거울 앞에서 이리저리 둘러봤다. 어머니는 그런 이하윤을 예뻐라하며 머리를 빗겨주고 비녀를 꽂아줬다. “하윤아, 정말 예쁘구나. 앞으로 누가 괴롭히거든 어머니에게 말하거라. 내 꼭 복수해 주마.” 아버지는 옆에 앉아서 지도를 보며 혼수로 보낼 좋은 점포를 고르고 있었다. 문밖에 선 나는 갑자기 전생에 시집가던 날이 생각났다. 이하윤은 밤새 울었고 어머니도 그런 이하윤이 안타까워서 함께 울었다. 아버지는 냉랭한 얼굴로 나를 꾸짖었다. “네 언니는 저리 울고 있는데 너는 단장할 마음이 드냐? 네 언니가 속상해하는 건 눈에 보이지도 않는 게냐?” 사실 나는 진작에 부모님께서는 날 사랑하지 않는다는 걸 알아차려야 했다. 어머니는 나를 낳으실 때, 난산을 겪으셔서 내가 어머니께 복수하기 위해 태어났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내가 두 달도 채 안 됐을 때, 멀리 떨어진 외조부 집에 보냈다. 나는 그곳에서 외조부께 말을 타고 활을 쏘는 방법을 배웠고 외조모께서는 촛불의 빛을 빌려 옷을 꿰며 주셨다. 내가 무릎이라도 다치는 날에는 외조부께서는 나를 업고 집으로 향했고 외조모께서는 애꿎은 승마장을 욕해댔다. 내가 열 살이 되던 해, 외조모께서 돌아가신 뒤, 나는 상경으로 돌아왔다. 어머니는 상스럽다며 나를 미워했고 아버지는 내가 예의를 모른다며 싫어했다. 이하윤은 두 사람의 등 뒤에 숨어서 이렇게 물었다. “혹 저 아이가 새로 온 하녀입니까?” 나는 어머니, 아버지의 환심을 사기 위해 채찍과 활을 내려놓고 가야금을 배우고 붓글씨를 배우기 시작했다. 그렇게 나는 점점 그들이 좋아하는 모습으로 변해갔다. 그리고 시간이 지나 나와 박준영은 궁 연회에서 다시 만났다. 박준영은 변방의 군영에서 일여 년 있었기에 나와 함께 말을 탔었다. “하랑아, 너는 말을 타고 자유로움을 누려야 하는 사람이다.” 박준영이 나의 손을 잡고 말했었다. 하지만 나를 궁에 가둬놓고 내 두 다리를 못 쓰게 만든 이도 박준영이었다. “하랑아, 전하께서 나를 데리고 서원으로 가서 말을 태워주기로 했으니 너도 함께 가자꾸나.” 내가 등을 돌려 떠나려던 그때, 이하윤이 나를 불러세웠다. 이하윤은 내게 거절할 기회도 주지 않고 마차에 태웠다. 하지만 서원에 도착했을 때, 나는 이하윤을 등에 태운 한길을 보게 됐다. 한길은 외조부께서 나를 위해 직접 고른 말이었다. 나는 얼른 한길에게 다가갔다. “고삐 주십시오!” 그 모습을 본 이하윤이 도발하듯 웃었다. “아깝냐? 하지만 전하께서 이미 내게 주셨다.” 이하윤이 내게 가까이 다가와서 작게 말했다. “너는 변방에서 외조부 사랑을 받고 상경에서는 전하의 사랑을 받지 않았느냐? 네가 뭔데?” 이하윤은 그렇게 말하더니 비녀를 뽑아 한길의 배를 힘껏 찔렀다. 그러자 한길이 처절한 울음소리를 내며 미친 듯이 울타리로 달려들었다. “전하, 살려주십시오!” 그때, 이하윤이 울먹이며 소리쳤다. 그 모습을 본 박준영은 얼른 다가와서 이하윤을 안고 말 등에서 내려왔다. 이하윤은 박준영의 품에 안겨서 눈물을 뚝뚝 떨궜다. “전하, 저는 그저 하랑이 말을 타보고 싶었을 뿐인데… 제가 잘못한 것 같습니다.” 그 말을 들은 박준영은 더 물어보지도 않고 곧장 내 앞으로 다가와 목을 움켜쥐더니 나무 기둥에 내 몸을 거칠게 밀어붙였다. 순간 목에서 고통과 함께 숨이 막혀왔다. “하윤이가 말을 잘 타지 못한다는 걸 알면서 하윤이를 해치려 한 게냐? 내가 널 너무 봐줬나 보구나!” 박준영의 말에도 나는 아무 변명 하지 않았다. 전생에도 이하윤이 죽은 뒤, 박준영은 나에게 이하윤의 위패 앞에 무릎을 꿇고 사죄하게 했다. 내가 거절하자 박준영은 내 머리를 잡고 돌바닥에 머리를 몇 번이고 찧었다. 피가 바닥을 적셨지만 박준영은 차갑게 한마디 했을 뿐이다. “다음 생이 있다면 내 절대 하윤이를 다치게 하지 않을 것이다.” 내가 박준영을 바라보자 그는 나를 바닥으로 밀쳐버렸다. 힘없이 바닥으로 쓰러진 나는 피 섞인 기침을 쏟아냈다. 멀지 않은 곳에서 한 호위가 한길을 꽉 누르고 있었다. 그리고 박준영이 활을 들었다. 그 모습을 보자 나는 심장이 쿵 내려앉았다. 그래서 얼른 박준영의 소매를 잡았다. “전하, 한길이가 놀라서 그런 것이니 제발 살려주십시오. 한길을 죽이지 말아주십시오!” 그때, 이하윤이 박준영의 소매를 잡고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전하, 무섭습니다…” 그 말이 끝나자마자 박준영이 활을 쏘았고 날카로운 화살은 한길의 목을 꿰뚫었다. “안돼!” 나는 울부짖으며 한길에게 달려갔다. 한길은 피웅덩이에 쓰러진 채 힘들게 고개를 돌려 내 손에 얼굴을 비볐다. 그 온기는 꼭 나를 안아 말 등에 태워주던 외조부의 따뜻한 품 같았다. 머지않아 한길은 미동도 하지 않았다. 그 모습이 내 눈물 때문에 흐릿해졌다. 활을 잡고 있던 박준영의 손이 멈칫했지만 곧 그는 눈길을 돌렸다. “태자비를 다치게 했으니 죽어 마땅하다.” 곧이어 이하윤의 목소리도 들려왔다. “전하, 하랑이를 탓하지 마십시오. 하랑이가 저 말을 많이 아낍니다. 외조부께서 남겨주신 말이라서.” 이하윤의 말을 들은 박준영이 그녀의 허리를 잡더니 등을 돌렸다. “내 더 좋은 말을 골라주마.” 점점 차갑게 식어가는 한길을 보며 나는 그제야 깨달았다. 한번 죽은 것은 다시 돌아올 수 없다는 걸. 제3화 내가 저택으로 들어가자마자 얼굴 위로 찻잔 하나가 날아왔다. 뜨거운 피가 눈썹뼈를 타고 흘러내렸고 곧 눈앞이 새빨개졌다. 아버지는 대청에 앉아계셨고 안색은 무척 어두웠다. “꿇어!” 어머니는 나를 보자마자 다가와서 욕하기 시작했다. “하윤이가 전하랑 말을 타러 갔는데 네가 감히 하윤이를 해치려고 들어? 하윤이를 죽여야 그만둘 거냐?” 어머니의 말을 들은 내가 입을 떼기도 전, 박준영이 창백한 얼굴을 한 이하윤을 안은 채 들어왔다. “어머니, 하랑이한테 뭐라고 하지 마십시오. 그 말을 너무 소중하게 생각해서 잠깐 이성을 잃었던 겁니다.” 피로 물든 내 얼굴을 확인한 박준영은 잠깐 멈칫했다. 그러자 이하윤이 기침을 했다. 그 소리에 박준영은 얼른 고개를 숙이고 이하윤의 옷을 여며줬다. “아직 무섭냐?” 어머니는 안쓰럽다는 듯 이하윤을 바라보다 다시 나를 쏘아봤다. “멀뚱히 서서 뭘 하는 게야? 가법을 들여라!” 어머니의 말을 들은 어멈들은 나를 바닥에 누르더니 회초리로 손바닥을 때렸다. 회초리 한 번에 내 손바닥은 부어올랐다. 그 고통에 나는 어깨를 떨었지만 입술을 꼭 깨물었다. 전생에 나는 박준영을 위해 자객의 검을 막아줬었다. 그때 상처가 너무 깊어서 뼈까지 보일 지경이었지만 나는 아프다는 말을 하지 않았다. 그때의 박준영은 나를 안고 눈물을 흘렸다. “하랑아, 앞으로 너를 다치게 하는 자는 내가 절대 가만두지 않을 것이다.” 서른 번의 회초리를 맞고 난 내 손바닥은 살가죽이 벗겨졌다. 이하윤은 그제야 입을 열었다. “어머니, 모레 제 혼인식 날, 하랑이의 배웅을 받고 싶습니다. 그러니 그만하십시오.” 어머니는 이하윤의 말을 듣고 나서야 손짓했다. “사당으로 끌고 가거라! 하윤이를 위한 기도경을 아흔아홉 개 베껴 써야만 나올 수 있다!” 사당은 음습했다. 나는 방석 위에 앉아 있었고 붓을 잡은 손이 자꾸 떨려왔다. 글을 쓸 때마다 손바닥의 상처가 다시 터졌다. 머지않아 경전지는 내 피로 물들었다. 깊은 밤이 되었을 때, 나는 고열에 시달렸다. 어렴풋이 누군가 내 손을 잡고 피를 닦아내는 손길이 느껴졌다. 눈을 떠보니 내 앞에 한쪽 무릎을 굽히고 앉은 박준영이 보였다. 나는 그를 보자마자 손을 확 빼냈다. “전하께서 어쩐 일이십니까?” 내 말을 들은 박준영이 미간을 찌푸렸다. “하윤이가 자꾸 너를 가엽게 여겨서 내 하윤이와 혼인한 뒤, 너를 첩으로 들이기로 했다. 하윤이는 몸이 약하니 네 아이를 하윤이 아이로 들일 것이다. 그럼 너도 내 옆에 남을 수 있고 자매간의 의리도 다한 셈 칠 수 있을 것이다.” 그 말을 듣자마자 나는 멍해졌다. 전생의 나는 난산 때문에 애를 낳다가 죽을 뻔했다. 딸이 크게 아팠을 때도 나는 얼굴 한번 보는 것도 허락되지 않았고 아들이 처음으로 붓을 들고 쓴 이름은 이하윤이었다. 내가 화가 나서 벼루를 들었을 때, 문밖에서 갑자기 울음소리가 들려왔다. 이하윤이 문 앞에 서서 눈물을 떨구고 있었다. “하랑아, 내 아직 동궁으로 시집가지도 않았는데 벌써 전하를 꼬드기려 드는 게냐?” 곧이어 다른 발걸음 소리가 들려왔고 어머니가 모습을 드러내더니 내 뺨을 내려쳤다. “천박한 것! 하윤이가 전하와 혼인하는 게 투기가 나서 기어코 하윤이를 해치려고 드는구나.” 맞은 뺨이 화끈했지만 나는 오히려 웃음이 났다. “네, 투기 맞습니다.” 순간, 사당 안은 정적에 휩싸였다. “이하윤이 태어날 때부터 두 분의 사랑을 받은 것이 너무 투기가 납니다. 이하윤이 덥다고 한마디 했을 뿐인데 제 얼음 창고를 뜯어서 이하윤의 처소로 옮기시지 않으셨습니까.” 순간, 두 생에 걸친 모든 억울함이 한꺼번에 밀려들었다. “이하윤이 백성들에게 죽을 나눠주는 게 힘들다고 했더니 그 뜨거운 햇볕에 저를 세워놓고 어질다는 칭찬을 들었던 건 이하윤이었지요. 제가 몸져누웠을 때도 이하윤이 성남 다과를 먹고 싶다고 했다고 함박눈이 오는 날, 저를 집 밖으로 내쫓으셨고요.” 나는 어머니를 보며 또박또박 말했다. “저는 두 분의 여식이 아닌가요?” 내 말을 들은 어머니의 안색이 조금 변했다. 박준영도 멈칫하더니 조금 머뭇거렸다. 그런데 그때, 이하윤이 창백한 얼굴로 울기 시작했다. “하랑이 네가 나를 이리 미워하는 줄 몰랐다. 그럼 내가 이 태자비 자리를 너에게 돌려주고 죽음으로 사죄하마.” 이하윤은 그렇게 말하더니 힘없이 바닥으로 쓰러졌다. 그 모습을 본 박준영은 놀라서 이하윤을 안아 들었다. “어의를 부르거라!” 반시진 뒤, 어의가 굳은 얼굴로 바닥에 무릎을 꿇고 있었다. “큰아씨는 심맥이 약하셔서 화를 내거나 놀라면 기가 손상되는 체질입니다. 하여 반드시 가까운 혈육의 피를 사흘 연속으로 먹어야 안정될 수 있습니다. 어의의 말을 들은 어머니는 내 앞으로 다가왔다. “하랑아, 하윤이는 태자비다. 하윤이에게 무슨 일이 생겨선 안 된다.” 그러자 아버지도 맞장구를 쳤다. “그깟 피 좀 빼는 거 조금만 참으면 금방 지나간다.” 그 말을 들은 나는 심장이 아파왔다. “제가 싫다고 한다면요?” 그때, 박준영이 몸을 일으켰다. 그의 눈빛은 무척 차가웠다. “잡아라.” 박준영의 말을 들은 어멈들은 나에게 다가와 내 어깨를 꽉 눌렀다. 비수가 내 손목을 그었고 내 피가 그릇 안에 고이기 시작했다. 나는 고통에 눈앞이 새까매졌지만 어머니는 계속 재촉했다. “많이 받아라. 하윤이는 몸이 약해서 많이 필요할 것이다.” 그 순간, 나는 더 이상 고통이 느껴지지 않았다. 피를 내준 뒤, 나는 별채로 끌려왔다. 그리고 시간이 얼마나 지났을까, 비둘기 하나가 서신을 물고 왔다. 나는 거덜난 몸을 끌고 비둘기에게 다가가 다리에 묶인 죽통을 풀어냈다. 서신에는 글 한 줄이 쓰여있었다. “하랑아, 네가 달라고 했던 가사약이다. 내 나중에 꼭 너와 혼인하마.” 환약을 손에 쥔 나는 그제야 눈물을 떨궜다. 제4화 이튿날 아침, 나는 누군가의 웃음소리를 듣고 잠에서 깨어났다. “동궁의 예물이 도착했는데 오십 년이 된 여아홍에 상경 최고의 장인이 만든 봉관도 있대.” “제일 중요한 건 선황후께서 직접 준비하신 백옥 동심패지. 정비한테만 내려준다고 했어." 그때, 누군가 피식 웃었다. “저기 있는 분이 어찌 이길 수 있겠어? 한낱 변방에서 자란 사람이 동궁 자리를 엿보다니.” 그 말을 들은 나는 이불을 꽉 잡았다. 그 목소리는 내가 알고 있는 목소리였다. 삼 년 전, 집사에게 맞아서 목숨이 간당간당하던 때, 내가 저 하인을 옆에 두고 상처까지 치료해 줬다. 그때, 하인은 내 발밑에 납작 엎드린 채 울면서 앞으로 나 하나만을 주인으로 섬기겠다고 말했었다. 날이 완전히 밝았을 때, 어머니께서 별채에 들르셨다. 하지만 어머니는 내게 눈길 한번 돌리지 않고 명하셨다. “둘째 아씨의 예물을 전부 하윤이 처소로 옮기거라. 오늘 하윤이 혼인식이니 예단이 적어선 안 되지.” 어머니의 말을 들은 나는 고개를 들었다. “어머니, 그것은 외조모께서 제게 남겨주신 예단입니다. 장군부 낙인이 찍혀있고 제 이름이 적힌 것인데 어찌…” 내 목소리를 들은 어머니는 그제야 나를 바라봤다. 그리고 다음 순간, 어머니께서는 내 뺨을 내려쳤다. 그 힘에 나는 힘없이 쓰러졌고 입 안에서 피비린내가 느껴졌다. “네 것이라고?” 어머니는 콧방귀를 뀌었다. “하윤이는 태자비다! 하윤이 체면이 곧 우리 이씨 집안 체면이야! 겨우 동궁 첩으로 들어가는 주제에 예물을 남겨둬서 뭘 하려고?” ‘첩이라니?’ 어머니의 말을 들은 내가 어리둥절해하자 동궁의 내시 하나가 웃으며 앞으로 나서더니 봉책문을 펼쳐 들었다. “전하께서 둘째 아씨와의 옛정을 생각하여 태자비와 함께 입궁하라고 전하셨습니다. 첩이긴 하지만 다른 이들은 이 자리도 감지덕지라고 생각합니다.” 그 말을 들은 내 심장은 차갑게 식었다. 어멈들은 이미 나무상자를 밖으로 옮기고 있었다. 나는 맨발로 어멈들에게 달려가서 상자를 꽉 잡았다. “놓아라! 내 것이다!” 그 모습을 본 어머니는 채 아물지 못한 내 손목을 힘껏 밟았다. 순간, 상처가 다시 터지면서 피가 흘러내렸다. 하지만 어머니는 역겹다는 듯 말했다. “오늘 좋은 날이니 소란 피우지 말거라. 아니면 내가 네 다리를 부러뜨릴 것이다.” 그렇게 나는 바닥에 쓰러진 채 나무상자가 하나씩 내 처소에서 나가는 모습을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누군가 심장을 후벼파듯 지독하게도 아팠다. 머지않아 북소리가 앞마당을 가득 메웠다. 박준영이 이하윤을 데리러 온 거였다. 나는 침상을 짚고 일어나서 베개 밑에 넣어뒀던 가사약을 꺼냈다. 환약을 한참 바라보던 나는 결국 꿀꺽 삼켰다. 그때 문이 거칠게 열리더니 어멈들이 쳐들어와서 나를 일으켜 세웠다. “둘째 아씨, 전하께서 아씨를 뵙고 싶다고 하십니다.” 그렇게 나는 어멈들의 손에 이끌려 앞마당으로 나갔다. 어머니와 아버지는 상석에 앉아계셨고 이하윤은 혼례복을 입은 채 박준영의 품에 기대어 있었다. 이하윤은 나를 보더니 다정하게 말했다. “하랑아, 네가 전하와 혼인하고 싶어 한다는 걸 알고 있다. 헌데 동궁으로 발을 들이려면 조건이 하나 있다.” 이하윤의 말이 끝나자마자 하인이 새까만 탕약을 내왔다. 박준영은 잠시 망설이다 입을 뗐다. “마셔라. 이젠 하윤이 몸이 좋아졌으니 태자비가 동궁의 아이를 낳아야 한다. 너는 첩으로서 가져서는 안 될 생각은 지우는 게 좋을 거다.” 그 말을 들은 나는 제자리에 굳어있다 소리쳤다. “박준영, 나는 절대 너와 혼인하지 않을 것이다!” 순간, 박준영의 눈빛이 사나워졌다. 꼭 내 말에 상처를 입은 것처럼. “이하랑, 분수도 모르고 날뛰지 말거라.” 박준영이 나에게 다가와 턱을 잡으려고 했지만 나는 찻잔을 들어 바닥으로 힘껏 던졌다. 그리고 제일 날카로운 부분을 내 목으로 가져갔고 순간 핏방울이 맺혔다. 사람들은 그 모습을 보곤 놀라서 수군거렸다. 이하윤은 눈시울을 붉히며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하랑아, 전하의 아이를 낳고 싶어서 피임탕을 먹지 않으려는 게냐?” 이하윤의 말을 들은 어머니는 화가 나서 일어나더니 욕을 퍼부었다. “천한 것! 네가 정녕 미쳤나 보구나. 오늘 하윤이 혼인을 망쳐야만 속이 시원하겠냐?” 아버지도 탁자를 내려치며 소리쳤다. “다들 뭘 하느냐? 저것이 잡고 있는 물건을 뺏어라! 더 부끄러운 꼴을 보이기 전에.” 박준영은 나를 뚫어져라 바라보며 차갑게 물었다. “이하랑, 나는 네 체면을 봐주려고 했으나 네가 거절한 것이다! 여봐라, 저것을 묶어서 후문으로 동궁으로 들여라. 오늘 피임탕도 반드시 먹여야 할 것이다!” 박준영의 명에 사람들이 나에게 달려들었다. 누군가는 내 손목을 잡았고 누군가는 내 팔을 힘껏 잡았다. 부서진 찻잔 조각은 내 손바닥에 상처를 남기며 떨어져 나갔다. 나는 그들의 힘을 이길 수가 없었다. 억지로 피임탕을 삼킨 순간, 배에서 지독한 고통이 느껴졌고 목에서 피비린내가 났다. 나는 갑자기 피를 토하며 바닥에 깔려 있던 빨간 천 위로 쓰러졌다. 눈을 감기 전, 창백한 얼굴을 한 박준영이 허둥지둥 달려오는 모습이 보였다. “하랑아!” 누군가 내 숨을 확인하려는 듯 코 밑에 손가락을 가져다 대는 것이 느껴지더니 곧 바닥에 무릎을 꿇었다. “전하… 둘째 아씨께서 숨을 쉬지 않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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