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서진 옥과 우리 사이

GoodNovel 완결

만불사에서 사람들이 눈을 감고 기복패를 뽑고 있었다. 내가 뽑은 침향목 패에는 이렇게 적혀 있었다. [해마다 평안하기를. 온 세상이 손가락질해도 나는 늘 곁을 지키리라.] 힘찬 필체는 내 부군, 진북장군 서한주의 것이었다. 관리들의 부인들은 모두 부러운 눈길을 보냈다. "혼인한 지 삼 년이 지났는데도 서 장군께서는 여전히 부인을 이토록 아끼시는군요." 대수롭지 않게 여기던 나는 목패 뒷면에 새겨진 작은 ‘은’ 자를 발견하고 그대로 굳어 버렸다. 원초은은 서한주가 전쟁터의 시체 더미에서 구해 온 고아였다. 서한주는 내 손에서 목패를 빼앗으며 눈살을 찌푸렸다. "초은이는 의지할 곳도 없고 몸도 약하다. 내가 평안을 빌어 준 것이 뭐가 잘못이냐? 너는 이미 장군 부인으로 부족한 것 없이 살고 있는데, 그깟 애정까지 빼앗으려 드느냐?" 원초은은 눈시울을 붉히며 그의 소매를 붙잡았다. "장군께서는 언니를 나무라지 마십시오. 모두 제가 부족한 탓입니다." 나란히 선 두 사람을 바라보자 지난 삼 년이 모두 우스워졌다. 함께 도성에 갈 때면 서한주의 우산은 늘 원초은 쪽으로 기울었다. 자객의 습격을 받았을 때는 나를 칼날 앞으로 밀어 놓고, 발목을 삔 원초은만 안아 들고 빠져나갔다. "너는 무예를 익혔으니 견딜 수 있다. 하지만 초은이는 안 된다." 그는 내가 집안을 돌보고 함께 전쟁터에 나서 주기를 바라면서도, 연약한 원초은이 자신에게 의지하는 것을 즐겼다. "더는 따지지 않겠습니다." 나는 한 걸음 물러서며 서한주의 눈에 스친 당혹감을 바라보았다. "장군 부인의 자리와 그 부귀영화도 모두 돌려드리지요."

챕터 (1)

1화

만불사에서 사람들이 눈을 감고 기복패를 뽑고 있었다. 내가 뽑은 침향목 패에는 이렇게 적혀 있었다. [해마다 평안하기를. 온 세상이 손가락질해도 나는 늘 곁을 지키리라.] 힘찬 필체는 내 부군, 진북장군 서한주의 것이었다. 관리들의 부인들은 모두 부러운 눈길을 보냈다. "혼인한 지 삼 년이 지났는데도 서 장군께서는 여전히 부인을 이토록 아끼시는군요." 대수롭지 않게 여기던 나는 목패 뒷면에 새겨진 작은 ‘은’ 자를 발견하고 그대로 굳어 버렸다. 원초은은 서한주가 전쟁터의 시체 더미에서 구해 온 고아였다. 서한주는 내 손에서 목패를 빼앗으며 눈살을 찌푸렸다. "초은이는 의지할 곳도 없고 몸도 약하다. 내가 평안을 빌어 준 것이 뭐가 잘못이냐? 너는 이미 장군 부인으로 부족한 것 없이 살고 있는데, 그깟 애정까지 빼앗으려 드느냐?" 원초은은 눈시울을 붉히며 그의 소매를 붙잡았다. "장군께서는 언니를 나무라지 마십시오. 모두 제가 부족한 탓입니다." 나란히 선 두 사람을 바라보자 지난 삼 년이 모두 우스워졌다. 함께 도성에 갈 때면 서한주의 우산은 늘 원초은 쪽으로 기울었다. 자객의 습격을 받았을 때는 나를 칼날 앞으로 밀어 놓고, 발목을 삔 원초은만 안아 들고 빠져나갔다. "너는 무예를 익혔으니 견딜 수 있다. 하지만 초은이는 안 된다." 그는 내가 집안을 돌보고 함께 전쟁터에 나서 주기를 바라면서도, 연약한 원초은이 자신에게 의지하는 것을 즐겼다. "더는 따지지 않겠습니다." 나는 한 걸음 물러서며 서한주의 눈에 스친 당혹감을 바라보았다. "장군 부인의 자리와 그 부귀영화도 모두 돌려드리지요." 제1화 "소원아." 서한주는 절문 밖까지 뒤따라와 내 손목을 붙잡고 우산 아래로 끌어당겼다. 그는 내 손목을 감싸 쥔 채 엄지로 습관처럼 두어 번 부드럽게 문질렀다. 그 모습은 마치 조금 전 사람들 앞에서 나를 매섭게 나무란 사람이 자신이 아닌 듯했다. "너는 나와 정식으로 혼례를 치렀고, 훗날에도 나와 한 무덤에 누울 아내다. 초은이는 그저 위로 몇 마디를 받았을 뿐인데, 어찌 네 자리를 넘볼 수 있겠느냐?" 그는 몸을 숙여 내 속눈썹에 맺힌 빗물을 닦아 주며 목소리를 낮췄다. 예전에도 다툴 때마다 늘 이런 식이었다. 먼저 내 것을 빼앗은 뒤 부인의 자리와 평생을 약속하며 달랬다. 마치 내가 모든 것을 누리고 있으니, 다른 여인에게 나누어 주는 애정쯤은 참아야 한다는 듯이. 그때 등 뒤에서 기침 소리가 들리자, 서한주는 바로 내 어깨의 망토를 벗겨 원초은에게 둘러 주었다. 망토와 함께 내 몸에 남아 있던 온기마저 찬 바람 속으로 순식간에 흩어졌다. 원초은은 옷깃을 여미며 겁먹은 듯 나를 바라보았다. "언니께서도 추우실 텐데, 장군께서는 망토를 돌려주시어요." "소원이는 내공이 있어 추위를 견딜 수 있다. 너처럼 몸이 약한 줄 아느냐?" 서한주는 원초은의 옷고름까지 단단히 매어 준 뒤에야 내게 손을 내밀었다. "마차에는 셋이 탈 수 없다. 너는 비좁은 것을 싫어하니, 내가 함께 말을 타고 돌아가마." 그는 말 한마디로 나를 버리는 일을 배려인 양 꾸몄다. 나는 그가 내민 손을 지나쳐 홀로 빗속으로 걸어갔다. 집으로 돌아왔을 때는 왼쪽 어깨가 팔을 들지 못할 만큼 아팠다. 서한주는 젖은 옷을 벗겨 주고, 오래된 화살 상처 위에 손바닥을 얹어 굳은 근육을 천천히 풀어 주었다. 몸은 마음보다 먼저 그를 기억했다. 익숙한 온기가 닿자 팽팽하게 굳어 있던 어깨가 본능처럼 조금 느슨해졌다. 삼 년 전 내가 독에 중독되었을 때, 그는 눈보라를 뚫고 삼백 리 길을 달려 해독약을 구해 왔다. 이틀 밤을 꼬박 내 곁을 지키느라 두 눈이 벌겋게 충혈된 채, 다시는 내가 다치게 두지 않겠다고 손을 붙잡고 맹세했다. 지금도 내 상처를 어루만지는 이는 그였다. 거듭 내게 상처를 입히는 이도 그였다. 고민철이 문밖에 서서 나직이 아뢰었다. "장군님, 원초은 아씨께서 악몽을 꾸셨다는데... 누구도 곁에 오지 못하게 합니다." 서한주의 손이 멈췄다. 나는 처음으로 그의 소매를 힘껏 움켜쥐었다. "제가 가지 말라고 한다면, 그래도 가실 겁니까?" 서한주는 소매를 붙잡은 내 손을 내려다보다가, 잠시 후 몸을 숙여 이마에 입을 맞췄다. "소원아, 나를 배은망덕한 자로 만들지 마라." 그의 소매가 내 손가락 사이에서 조금씩 빠져나갔다. 그는 날이 밝을 때까지 돌아오지 않았다. 나는 겉옷을 걸치고 장부를 보관하는 방으로 향했다. 원초은이 머무는 별원과 해마다 복용하는 값비싼 약재는 물론, 그 명의로 된 점포 두 곳까지 모두 내 혼수에서 비용을 대고 있었다. 집사의 이마에 식은땀이 배어 나왔다. "장군님께서 부부 사이에는 네 것과 내 것이 따로 없다고 하셨습니다." 나는 장부의 마지막 장까지 넘겼다. 서한주는 내 돈으로 원초은을 보살피면서, 그녀의 고마움을 앞세워 자신이 정 많고 의리 있는 사람임을 증명하고 있었다. 나는 허리춤에 찬 패를 풀어 장부 위에 눌러 놓았다. "오늘부터 장군부에서는 내 혼수에 손대지 못한다." "원초은에게 들어간 돈도 장군에게 한 푼도 빠짐없이 갚으라 하거라." 제2화 다음 날은 서가 노부인의 탄일 연회였다. 원초은이 차를 올리려고 몸을 숙이자 옷깃 사이로 초승달 무늬가 있는 붉은 옥패가 미끄러져 나왔다. 나는 술잔을 쥔 손에 힘을 주었다. 어머니는 전사하기 전, 붉은 옥패 하나를 내 품에 넣어 주셨는데, 그것은 심씨 가문에 남은 유일한 유품이었다. 나는 그것을 화장함 가장 깊숙한 곳에 넣어 둔 채 누구에게도 보여 주지 않았다. 그런데 그 옥패는 반으로 잘려, 한쪽은 비녀가 된 채 서한주가 내민 비단함에 담겨 있었다. "어제 너를 화나게 했으니 오늘은 제대로 사과하려고 준비했다." 서한주는 직접 옥비녀를 꺼내 내 머리에 꽂아 주었다. "옥패가 너무 커 네가 차지도 않기에 장인에게 두 개로 나누어 만들라 했다. 하나는 네가 지니고, 하나는 초은이의 몸을 지키는 데 쓰면 된다." 나는 머리에서 옥비녀를 뽑았다. "누구의 허락을 받고 손대셨습니까?" 서한주의 입가에 걸려 있던 미소가 순간 굳었다. "옥은 그대로다. 모양만 바꾸었을 뿐이다." "제 어머니께서 남기신 유품입니다." "알고 있다." 서한주는 내 손을 잡으며 난처하다는 듯 나를 바라보았다. "그 옥이 전쟁터에서 너를 살아 돌아오게 해 주었으니, 그 복을 빌려 초은이도 지켜 주고 싶었다. 심 부인께서는 생전에 마음이 어진 분이셨다. 살아 계셨다면 고아가 된 아이가 밤마다 두려움에 떠는 모습을 외면하지 않으셨을 게다." 원초은은 황급히 목에 걸린 옥고리를 풀었다. "언니, 심 부인의 유품인 줄은 몰랐습니다. 지금 바로 돌려드리겠습니다." 순간 붉은 끈이 끊어지면서 옥고리가 펄펄 끓는 국 속으로 굴러떨어졌다. 뜨거운 국물이 튀자 원초은이 비명을 질렀다. 서한주는 곧장 그녀를 품에 안고, 조금 붉어진 손을 감싸 쥔 채 약을 가져오라 재촉했다. 옥패에는 초승달 무늬를 가로지르는 금이 나 있었다. 손바닥이 새빨갛게 데었지만 통증은 느껴지지 않았다. 원초은에게 약을 발라 준 서한주는 내 손을 발견하고 미간을 찌푸렸다. "정신이 나간 게냐?" 그는 내 손목을 거칠게 움켜쥐었다. "옥이 깨졌으면 다시 고치면 된다. 물건 하나 때문에 손을 데다니, 내가 걱정해 주기를 바란 것이냐? 아니면 초은이가 죄책감을 느끼게 하고 싶은 것이냐?" 나는 서한주를 똑바로 바라보았다. "십이 년 전 이 옥이 눈밭에 떨어졌을 때, 밤새 무릎을 꿇고 찾아다닌 사람이 누구였습니까?" 서한주의 손끝이 잠시 굳었다. 그해 그는 열 손가락이 얼어붙도록 눈밭을 헤맨 끝에 어머니의 유품을 찾아 주었다. 그리고 이제 그것을 제 손으로 망가뜨렸다. 그는 내 시선을 피한 채 손바닥에 묻은 국물을 닦아 주었다. "사람은 지난 일만 붙들고 살 수 없다. 더 좋은 옥을 구해 보상하마." 연회가 절반쯤 지났을 무렵, 서한주는 사람들 앞에서 원초은을 서씨 족보에 올리고 의누이로 삼겠다고 선언했다. 서가 노부인은 웃으며 서씨 가문 여인들만 지닐 수 있는 금 자물쇠 장식을 원초은의 목에 걸어 주었다. 원초은의 목에는 어머니의 붉은 옥과 서씨 가문의 금 자물쇠가 나란히 걸려 있었다. 하나는 나를 낳아 준 가문의 것이었고, 다른 하나는 내가 시집온 가문의 것이었다. 그 두 가지가 이제 모두 원초은의 것이 되었다. 서한주는 다시 내 곁에 앉아 데인 손을 감싸 쥐었다. "내가 초은이에게 신분을 마련해 준 것도 너를 위해서다. 이제 초은이는 내 의누이가 되었으니, 네가 그 아이를 받아들이지 못한다며 흉보는 사람도 없을 게다." "소원아, 나는 네 체면을 지켜 주려고 애쓰는데 너는 어찌 여전히 기뻐하지 않는 것이냐?" 나는 그의 손가락을 하나씩 떼어 냈다. 원초은이 옷을 갈아입겠다며 자리에서 일어나자 허리춤에 찬 검은 패가 드러났다. 그 패가 있으면 군 본영을 드나들며 문서를 전달할 수 있었지만, 단독으로 병력을 움직일 수는 없었다. 내 시선을 따라 패를 본 서한주는 아무렇지도 않게 말했다. "초은이는 밤마다 자주 발작을 일으킨다. 내가 도성에 없을 때 저 패를 가지고 군영에 가면 군의를 부를 수 있으니 내어 준 것이다." 고민철은 원초은의 패를 옷자락 안에 넣어 주며 웃는 얼굴로 말했다. "염려하지 마십시오. 소인이 지켜볼 테니 아무 일도 없을 것입니다." 연회가 끝나고 원초은이 곁채에서 나왔을 때는 허리춤의 패가 사라져 있었고, 고민철도 보이지 않았다. 반 시진이 지나자 서쪽 성문 방면에서 갑자기 다급한 북소리가 세 번 울렸다. 군대가 밤중에 성을 나설 때 보내는 신호였다. 제3화 이튿날 아침, 병부 연무장에는 열아홉 구의 시신이 가지런히 놓여 있었다. 마지막 흰 천이 걷히자 하태호의 모습이 드러났다. 얼굴 절반이 피로 뒤덮인 채, 허리에는 여전히 심가군의 낡은 구리 호각을 차고 있었다. 십이 년 전 심씨 가문이 무너졌을 때, 어린 나를 시신을 나르는 수레에 숨긴 뒤 불길 속에서 업고 나온 사람이 바로 하태호였다. 어제까지만 해도 아들이 열여섯이 되면 내게 보내 창술을 배우게 해도 되겠느냐고 사람을 시켜 물어 왔다. 그런 하태호의 오른손이 무언가를 꽉 움켜쥐고 있었다. 굳어 버린 손가락을 하나씩 펼치자 피에 흠뻑 젖은 엿 한 알이 보였다. 청석협(青石峽)은 도성에서 삼십 리 떨어진 곳이었다. 지난밤 누군가 내 옛 인장으로 병력을 요청한 뒤, 서한주가 관리하는 보조 인장까지 찍어 군령을 완성했다. 내 인장은 이미 효력을 잃어 요청자가 나라는 사실만 증명할 뿐, 실제로 군사를 움직일 권한을 부여한 것은 서한주의 인장이었다. 병부시랑이 두 인장을 탁자 위에 내려놓았다. "서 장군, 해명하시게." 원초은은 병풍 뒤에 숨어 치맛자락을 떨고 있었다. 서한주는 원초은을 한 번 바라보더니 태연히 사람들의 시선을 가로막았다. "소원이가 제게 인장을 찍어 달라고 청했습니다." 나는 고개를 번쩍 들었다. 서한주의 얼굴은 마치 미리 합의한 일을 말하듯 평온했다. "청석협에서 심가군의 유품이 발견되었다는 말을 듣고 사람을 보내 가져오려 했습니다. 저는 제 부인을 믿었기에 자세히 살피지 않았습니다." 병부는 두 인장을 거둔 뒤, 내게 외출을 삼가고 처분을 기다리라 명했다. 사람들이 모두 떠난 뒤에야 원초은이 병풍 뒤에서 나와 무릎을 꿇었다. "언니의 옛 인장을 가져간 사람은 저입니다." 원초은은 울면서 서신 한 통을 내밀었다. "오라버니가 살아 있으니 청석협으로 오라는 서신을 받았습니다. 호위 몇 명만 데려가려 했을 뿐, 사람이 죽을 줄은 몰랐습니다." 서한주는 몸을 숙여 원초은을 일으켜 세웠다. "민철아, 초은이를 데려가라." 나는 두 사람의 앞을 가로막았다. "원초은이 인장을 훔친 탓에 열아홉 명이 목숨을 잃었습니다. 그런데도 이대로 돌려보내시겠습니까?" "여기에 남는다고 죽은 이들이 살아 돌아오는 것은 아니다." 서한주는 고민철에게 원초은을 데려가라 명한 뒤 문을 닫고, 진술서 한 장을 내 앞에 밀어 놓았다. 진술서에는 내가 아버지와 오라버니를 그리워한 나머지 몰래 순방영의 병력을 요청했고, 서한주는 아무것도 모른 채 나를 믿고 인장을 내주었다고 적혀 있었다. 하지만 원초은의 이름은 단 한 번도 나오지 않았다. "서명하거라." 서한주는 먹까지 갈아 내 앞에 놓았다. "북적(北狄)이 국경에 병력을 모으고 있다. 이런 때에 내가 갇혀서는 안 된다. 초은이도 군영의 인장을 훔친 죄로 옥에 갇히면 사흘을 버티지 못한다." "너는 대대로 나라에 공을 세운 심씨 가문의 후손이자 내 부인이다. 작위를 빼앗기고 근신하는 선에서 끝날 테니, 내가 반드시 지켜 주마." "나는 어떻게든 살 수 있으니, 장군과 원초은의 죄를 대신 뒤집어쓰라는 말씀입니까?" 서한주는 내 뒤로 다가와 손가락 사이에 붓을 쥐여 주었다. "나를 도울 수 있는 사람은 너뿐이다." 귓가에 따뜻한 숨결이 닿았다. 목소리는 다정하기까지 했다. "부부라면 본디 어려움도 함께 견뎌야 하지 않느냐. 소원아, 나는 내 목숨을 너에게 맡기고 등을 보여 줄 수도 있다. 그런데도 내 믿음이 부족하단 말이냐?" 나는 붓을 내던졌다. 먹물이 튀어 진술서에 적힌 '심' 자가 번졌다. "서명하지 않는다면요?" 서한주는 한참 동안 침묵하다 입을 열었다. "이미 병부에 네가 병력을 요청했다고 증언했다." 처음부터 내 뜻을 물을 생각 따위는 없었던 것이다. 이미 나를 죄인으로 만들어 놓고, 그저 내가 순순히 받아들이기만을 바랐다. 밤이 되자 서한주는 약을 들고 찾아와 침상 곁에 앉아 내 손을 감싼 붕대를 풀었다. "아직 아프냐?" 나는 손을 들어 그의 뺨을 후려쳤다. 서한주는 고개가 돌아갈 만큼 맞고도 화를 내지 않았다. 잠시 후 오히려 내 손을 받쳐 들고 붉어진 손바닥에 입을 맞췄다. "아프지 않으냐?" "나를 벌해도 좋다. 이 일이 잠잠해지면 초은이를 장원으로 보내고 너만 바라보며 살겠다." "소원아, 나는 목숨까지 내줄 수 있다. 허니 이번 한 번만 나를 대신해 감당하거라." "어찌 내 사정을 조금도 헤아려 주지 못하느냐?" 십여 년을 사랑한 얼굴을 바라보는데 뼛속까지 서늘해졌다. 서한주는 내게 칼을 꽂고, 제 손으로 상처에 약을 발랐다. 그러고는 그것이 사랑이라고 말했다. 삼경이 되자 내관 한 명이 소리 없이 별원으로 들어와 호송 공문을 내밀었다. "폐하께서는 진술을 믿지 않으십니다." "도난당한 것은 삭주(朔州) 무기고에서 쓰는 쇠붙이입니다. 사흘 뒤 마님께서는 용의자로 삭주에 압송되어, 무기의 제작 기록과 병력을 움직인 문서, 이동 경로에 남은 검문 기록을 확인하시게 됩니다." "다만 아직 죄를 벗지 못하셨으므로 감군의 감시에서 벗어나실 수 없으며, 공개적으로 군사를 이끄실 수도 없습니다." 내관은 잠시 말을 멈췄다. "폐하께서는 단 한 가지만 물으셨습니다." "열아홉 명의 목숨을 앗아 간 진실을 직접 밝혀낼 수 있겠습니까?" 나는 소매 속에 든 반쪽짜리 붉은 옥을 움켜쥐었다. 날카로운 모서리가 손바닥을 파고들었다. "할 수 있습니다." 제4화 사흘 뒤, 병부는 감찰관이 지켜보는 조건으로 충열사 참배를 허락했다. 제례가 끝나면 곧바로 삭주로 압송될 예정이었다. 영당 밖에는 유가족들이 무릎을 꿇고 있었고, 하태호의 아들이 아버지의 투구를 품에 안은 채 내 앞을 가로막았다. 열세 살밖에 되지 않은 아이의 두 눈은 울어서 퉁퉁 부어 있었다. "심 장군님, 아버지는 장군님이 군공을 세우려고 부하의 목숨을 희생시키는 분이 아니라고 하셨습니다." "그런데 왜 아버지를 보내셨습니까?" 주변의 울음소리가 일시에 멎었다. 사람들은 모두 내가 심씨 가문의 유품 몇 점을 되찾으려고 열아홉 명의 병사를 죽게 했다고 믿고 있었다. 나는 몸을 낮춰 피 묻은 엿을 아이의 손에 쥐여 주었다. "조금만 기다려 다오." "반드시 진실을 밝혀 주마." 그때 뒤에서 발소리가 들렸다. 뒤늦게 나타난 서한주의 곁에는 원초은도 있었다. 손목에 흰 천을 감은 원초은은 영당에 들어오자마자 털썩 무릎을 꿇었다. "오라버니가 살아 있을지도 모른다는 소식을 언니께 전한 탓에 언니께서 충동적으로 일을 저지르셨습니다. 원망할 사람이 필요하다면 언니를 제때 말리지 못한 저를 원망해 주십시오." 잘못을 인정하는 듯했지만, 결국 병력을 움직인 사람이 나라고 못 박는 말이었다. 하태호의 노모가 눈을 붉힌 채 달려들어 향로로 내 이마를 내리치려 했다. 서한주가 손을 들어 향로를 막아 내자 뜨거운 향재가 온몸에 쏟아지고 손등이 순식간에 벌겋게 데었다. 이어 나를 품에 감싸안았다. 그 순간 나도 모르게 그의 소매를 붙잡았다. 마치 오래전처럼 여전히 내 앞을 지켜 주던 소년인 것만 같았다. 그러나 곧 서한주는 내 어깨를 누르며 낮은 목소리로 재촉했다. "잘못을 인정하고 위로금도 갑절로 치르겠다고 약조하거라. 네가 고개만 숙이면 이 일은 조용히 넘어갈 수 있다." 나는 붙잡았던 그의 소매를 천천히 놓았다. "인장을 훔친 사람은 원초은이고, 군령을 승인한 사람은 장군입니다. 그런데 어째서 제가 사죄해야 합니까?" 원초은은 돌연 비녀를 뽑아 제 목에 들이댔다. "언니는 제가 죽어야만 만족하시겠습니까?" 서한주는 비녀를 빼앗고 원초은을 품에 끌어안았다. "아무도 네가 죽기를 바라지 않는다." 원초은이 진정된 뒤에야 서한주는 나를 돌아보았다. 얼굴에는 이미 노기가 서려 있었다. "열아홉 명의 목숨값은 내가 치르겠다. 남겨진 가족들도 모두 돌볼 것이다. 초은이는 목숨까지 끊으려 했다. 헌데 무엇을 더 바라는 것이냐?" "정녕 초은이의 목숨까지 내놓으라는 것이냐?" "심소원, 네 아버지와 오라버니가 전사했을 때도 다른 이들까지 함께 죽으라 하지는 않았다. 네가 죽은 이들의 일을 끝까지 놓지 못하는 것도 결국 나와 초은이 중 한 사람을 택하라고 몰아세우려는 것이 아니냐." 서한주는 내 손목을 세게 움켜쥐고 힘주어 말했다. "좋다. 똑똑히 말해 주마." "내 부인은 오직 너뿐이다. 내 가산도 후사도, 죽은 뒤 나와 함께 묻힐 자리도 모두 네 것이다. 초은이를 첩으로 들이지도, 손대지도 않을 것이다." "초은이는 그저 내 보호를 바랄 뿐인데, 무엇이 그리 못마땅하단 말이냐?" 영당에는 열아홉 개의 위패가 조용히 늘어서 있었다. 하태호의 아들이 엿을 힘껏 움켜쥐자 녹은 엿물이 손가락 사이로 흘러내렸다. 그 모습을 보니 더는 무슨 말을 해도 소용없을 것 같았다. 그때 사당 밖에서 병사들의 갑옷이 부딪치는 소리가 들려오더니, 병부시랑이 호송대를 이끌고 영당 안으로 들어왔다. "폐하의 명이다. 용의자 심소원을 삭주 무기고로 압송해 군수용 철의 제작 기록과 병력 요청 문서, 이동 경로의 검문 기록을 확인하게 하라. 지금 즉시 출발하라." 서한주의 얼굴이 굳었다. "아직 옛 상처도 낫지 않았습니다. 그런 몸으로 어찌 북방까지 간단 말입니까?" "이의가 있다면 직접 입궁하여 폐하께 아뢰시게." 서한주는 내 앞을 막아서며 다시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소원아, 조사가 끝나면 증거를 내게 넘겨라. 내가 네 누명을 벗겨 주마." "고민철은 북방의 길을 잘 알고 너와도 오랫동안 알고 지낸 사이다. 그에게 호위를 맡겨야 나도 안심할 수 있다." "네가 돌아오면 초은이를 장원으로 보내마. 그러면 우리도 예전으로 돌아갈 수 있다." 나는 안주인의 금패를 풀어 그의 손에 놓았다. 이어 서씨 가문의 옥패와 곳간 열쇠, 혼인하던 날 서한주가 내 칼자루에 직접 매어 준 동심결까지 하나씩 모두 꺼내놓았다. 그제야 서한주의 낯빛이 변했다. "진작부터 떠날 생각이었느냐?" 그때 원초은이 갑자기 손목을 감싸 쥔 채 쓰러졌다. 서한주는 나를 붙잡고 있던 손을 놓고 황급히 원초은을 받아 안았다. 나는 그 틈에 두 사람을 지나쳐 밖으로 나왔다. 성문이 닫히기 직전 북쪽으로 향하는 호송 마차에 오르자, 뒤늦게 쫓아온 서씨 가문의 호위가 상처에 바를 약을 건넸다. "장군께서는 원초은 아씨를 돌보셔야 해서 직접 배웅하지 못하십니다." "또한 북방의 추위를 며칠 견디지 못하고 나면, 세상에서 마님의 성미를 받아 줄 사람은 장군뿐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되실 거라고 하셨습니다." 나는 동심결을 성벽 아래 물길로 던지고, 약상자는 열어 보지도 않은 채 성문 앞에 내려놓았다. 뒤에서 육중한 성문이 완전히 닫히자, 서씨 가문의 사람이 따라오지 않는 것을 확인한 진찬후가 마차의 휘장을 걷고 막 봉인한 밀서를 건넸다. [원경준은 삼 년 전 북적의 땅에서 숨졌으며, 버려진 유해의 신원도 확인되었다.] 밀서에는 원초은이 처음 받았던 서신도 함께 들어 있었는데 뒷면에는 익숙한 필체로 지시가 적혀 있었다. [초은이는 그저 오라버니를 찾으려는 것이다. 이 서신은 군의 기록에 남기지 말고 소원이에게도 알리지 마라. 고민철이 알아서 처리하게 하면 된다.] 서한주의 서명이었다. 서한주는 수상한 점을 발견하지 못한 것이 아니었다. 그저 이번에도 원초은의 잘못을 덮어 주기로 한 것뿐이었다. 진찬후가 밀서의 마지막 장을 펼치다 눈빛을 굳혔다. [부장 고민철은 군수용 철을 빼돌려 팔아넘긴 혐의를 받고 있다. 호송대에서 발견되는 즉시 붙잡을 것.] 때마침 마차 밖에서 고민철의 웃음 섞인 목소리가 들려왔다. "앞쪽 관도에 눈이 쌓였으니 응수령(鷹愁嶺)으로 돌아가겠습니다." "그곳에는 역참도 없으니 마님께서 조용히 몸을 돌보실 수 있을 것입니다." 나는 허리춤에 숨겨 둔 붉은 옥 조각을 눌러 잡았다. 마차는 이미 관도를 벗어나 인적 없는 눈 덮인 골짜기로 들어서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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