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로모션 로딩 중...
화려한 독립
한소원과 배민혁은 11년이라는 긴 시간을 함께해 왔다. 이 남자와 검은 머리 파뿌리 될 때까지 함께하리라 믿고 있을 때 배민혁이 바람을 피웠다. 그것도 3년이나... 한소원과 얼굴이 많이 닮았지만, 더 젊고 어린 여자에게 빠져버린 것이다. 이보다 더 최악은 없으리라 믿었던 그때 아들 한진우가 가족관계해체사유서를 내밀며 한소원이 본인들이 행복한 가족을 이루는 데 방해한다고 소리쳤다. 심장이 짓밟히는 듯한 고통 속에 한소원은 이혼 협의서에 서명했다. 그러면서 다시는 이 부자와 얽히지 않겠다고 굳은 결심을 내렸다.
챕터 (1)
1화
한소원과 배민혁은 11년이라는 긴 시간을 함께해 왔다.
이 남자와 검은 머리 파뿌리 될 때까지 함께하리라 믿고 있을 때 배민혁이 바람을 피웠다.
그것도 3년이나...
한소원과 얼굴이 많이 닮았지만, 더 젊고 어린 여자에게 빠져버린 것이다.
이보다 더 최악은 없으리라 믿었던 그때 아들 한진우가 가족관계해체사유서를 내밀며 한소원이 본인들이 행복한 가족을 이루는 데 방해한다고 소리쳤다.
심장이 짓밟히는 듯한 고통 속에 한소원은 이혼 협의서에 서명했다.
그러면서 다시는 이 부자와 얽히지 않겠다고 굳은 결심을 내렸다.
제1화
“유연아, 이혼 협의서 좀 작성해 줘.”
한소원의 말에 전화기 너머 이유연은 깜짝 놀라 입을 떡 벌렸다.
“소원아, 민혁 씨가 너를 얼마나 사랑하는데, 너도 잘 알잖아. 그렇게 고생해서 여기까지 왔는데 갑자기 왜 이혼하려고 그러는 거야? 혹시 뭔가 오해가 있는 거 아니야?”
“게다가 너희가 같이 있은 지 벌써 11년이야. 진우도 벌써 일곱 살이고. 아이까지 안 보고 살 수 있겠어?”
한소원은 차 창문 밖에서 나란히 쇼핑하는 세 사람을 응시하며 비꼬듯 입꼬리를 올렸다.
“배민혁이 바람을 피웠어. 몸매가 아주 좋은 모델하고. 그것도 3년이나.”
한소원과 닮은 그 여자는 예전에 배민혁이 막아서 한소원이 하지 못했던 일을 하고 있었다.
배민혁이 그 여자를 집 바로 건너편에서 살게 한 지도 벌써 3년째였다.
하지만 한소원은 어제야 알았다.
전화기 너머로 조용한 침묵이 흘렀다. 한소원은 고개를 돌려 창밖을 바라보았다.
차창 밖, 배민혁이 만나는 모델 김지연이 한진우의 손을 잡은 채 걸어가고 있었다. 두 사람의 얼굴에는 기쁜 미소가 번져 있었다. 배민혁은 내내 그들 뒤에서 흐뭇한 얼굴로 따라 걷고 있었다.
호응하듯 고개를 살짝 끄덕이다가도 물건을 사면 바로 앞으로 나와서 계산을 해줬다. 쇼핑백을 받아 경호원에게 건네는 동작을 보니 하루 이틀 해본 솜씨가 아니었다. 표정에는 본인조차 깨닫지 못한 너그러움과 다정함이 배어 있었다. 그것을 바라보는 한소원은 가슴이 바늘로 쿡쿡 찌르는 것 같았다.
뜨거운 눈물이 두 볼을 타고 줄줄 흘러내렸다. 무심코 눈물을 닦은 한소원은 울먹임이 조금 진정된 후 다시 밖에 나와 전화를 걸었다.
“보육원 새 책임자는 더 이상 뽑지 마. 다른 사람한테 맡기면 마음이 놓이지 않아, 내가 직접 할게.”
“다음 달, 그쪽으로 발령 내줘.”
말을 마친 한소원은 차 창문을 천천히 올렸다. 전화를 끊은 후 한 걸음에 집으로 돌아왔다.
집에 도착한 뒤에도 온몸은 끊임없이 떨렸다. 집 안의 히터까지 빵빵하게 틀고 이불 속으로 파고들었지만 추위에 몸이 여전히 덜덜 떨렸다.
의식이 점차 흐려질 무렵 배민혁이 돌아왔다.
방으로 들어온 배민혁은 이불 속으로 파고들며 한소원을 끌어안았다. 그러다가 이상한 한소원의 상태를 느꼈는지 눈살을 찌푸리며 그녀의 이마에 손을 얹었다.
“왜 이렇게 일찍 자? 안색은 왜 이렇게 창백하고? 어디 아파?”
그러고는 한소원의 머리를 감싸 안고 이마를 맞대며 체온을 재려 했다.
두 사람에게는 너무나도 익숙한 동작이었다. 연애 4년, 결혼 7년, 한소원의 사소한 변화까지도 꿰뚫고 있는 배민혁은 아주 자연스럽게 그녀의 상태를 물었다.
그러나 이번 한 번, 아직 그 여자의 향수 냄새가 가시지 않은 배민혁의 따뜻한 몸이 다가온 순간, 한소원은 조건반사적으로 그를 피했다.
한소원의 변화를 바로 알아차린 배민혁은 온몸이 살짝 굳었다. 그러더니 의아한 얼굴로 물었다.
“괜찮아.”
한소원은 목구멍까지 올라온 말을 삼킨 뒤 쉰 목소리로 대답했다.
“그냥 좀 피곤해서.”
배민혁은 별일 아니라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도 뭐 좀 먹고 자. 네가 좋아하는 거 포장해 왔어.”
한소원은 배민혁을 따라 식탁으로 갔다. 배민혁이 어느새 배달 음식 용기를 하나씩 열어놓은 상태였다.
입고 있던 옷이 좀 컸던 한소원은 젓가락을 집으려고 허리를 숙이다가 실수로 배민혁이 의자 등받이에 걸어둔 코트를 떨어뜨렸다.
탁 하는 소리와 함께 코트가 바닥에 떨어지면서 콘돔 하나가 튀어나왔다.
그 순간, 분위기가 완전히 얼어붙었다.
느긋하게 행동하던 배민혁은 살짝 멈칫하더니 이내 분노가 치밀어 오른 듯 화를 냈다.
“한소원! 누가 내 물건을 만지래! 예의도 없어? 우리가 아무리 부부라고 해도 기본적인 매너도 안 지키는 거야?”
한소원은 순간 얼굴이 창백해졌다. 미처 반응하기도 전에 배민혁이 노발대발하며 바닥의 콘돔을 주워 주머니에 넣었다. 그런데 너무 급하게 움직인 탓에 팔꿈치로 옆에 있는 뜨거운 국물을 건드리면서 국물이 한소원의 손 위에 그대로 쏟아졌다.
집 안 분위기가 완전히 얼어붙었다. 조용한 방 안에는 배민혁의 거친 숨소리와 한소원의 숨 참는 소리만 남았다.
얼마나 지났을까? 자신이 너무 과민반응 했음을 깨달은 배민혁이 쉰 목소리로 설명했다.
“물건은 친구가 장난으로 넣은 거야. 네가 오해하고 화낼까 봐 나도 모르게 톤이 좀 올라갔어. 손은 괜찮아? 어디 봐봐.”
뜨거웠던 국물은 식어버렸지만 두 손의 화상 부위는 어느새 붉게 달아올랐다.
한 번 훑어본 배민혁은 약상자에서 연고를 꺼내, 평소 한소원이 다쳤을 때마다 해줬던 것처럼 조심스러우면서도 정성을 다해 화상 상처를 처리해 줬다.
그런데 상처를 미처 처리하기도 전에 배민혁의 휴대폰이 울렸다. 벨 소리가 특별한 것을 보니 별도로 설정해 둔 것 같았다.
재촉하듯 메시지도 여러 통 왔다.
배민혁이 살짝 멈칫한 것을 느낀 한소원은 목구멍이 씁쓸해졌다.
“확인해 봐, 혹시 중요한 일일지도 모르잖아.”
그 말에 배민혁은 안도하며 휴대폰을 꺼냈다.
휴대폰 화면을 뚫어지게 바라보던 배민혁은 눈빛이 점점 어두워지더니 급하게 숨을 들이쉬었다. 그러고는 미안함이 가득한 눈빛으로 한소원을 바라보았다.
“소원아, 네 생일 선물로 주려고 주문 제작 맡긴 게 있는데... 문제가 좀 생긴 것 같아. 오늘 밤에 가서 다시 논의해야 할 것 같아. 너한테 가장 특별하고 소중한 선물을 주고 싶었는데...”
“국물도 많이 식었고 상처도 심하지 않으니까 네가 알아서 정리해. 나도 최대한 빨리 돌아올게.”
말을 마친 뒤 연고를 바르던 면봉을 한소원의 손에 다시 쥐여주고는 몸을 돌려 자리를 떴다.
문을 나서기 전에 의자 뒤에 걸쳐뒀던 코트를 챙겨 입었다.
한소원은 떠나는 배민혁의 뒷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두 손은 아직도 화끈거렸지만 수많은 바늘이 심장을 찌르는 듯한 아픔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었다.
배민혁과 11년을 함께해 온 한소원은 이 남자가 어떤 성격인지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
어쩌면 배민혁 본인조차 모를 것이다. 거짓말을 할 때면 말하는 속도가 얼마나 빨라지는지...
게다가 조금 전 핑계는 어제도 들었던 것이었다. 역시, 사랑에 빠진 사람은 판단력이 흐려지기 마련인가 보다.
대충 상처를 정리한 뒤 딱히 식욕도 없어 한소원은 한진우가 잠들었는지 확인하러 갔다.
방문 가까이 다가가자 안에서 잔뜩 흥분한 목소리가 귀에 들어왔다.
“지연 이모, 아빠 도착했어?”
“지연 이모, 내가 이모랑 아빠의 수호천사인 거 잊지 마. 이모와 아빠의 사랑은 내가 꼭 지켜줄게. 쓸모없는 엄마는 내쫓을 거야.”
한진우의 철없는 말에 김지연은 계속 웃음을 터뜨렸다. 그 웃음소리가 문틈 사이로 한소원의 고막을 파고들었다. 순간 속이 울렁거리며 심장이 다시 한번 욱신거렸다.
제2화
한소원은 바닥에 미끄러지듯 주저앉았다. 전에 없던 피로감이 온몸을 집어삼키는 듯한 느낌에 눈을 감은 채 두 손으로 얼굴을 가렸다.
밤새도록 멍하니 침대 옆에 앉아 도대체 언제부터, 어디에서부터 문제가 생긴 것인지 되짚었다.
두 사람의 사랑은 배민혁의 대시로 시작되었다.
한소원에게 첫눈에 반한 배민혁은 오직 한소원에게만 일편단심이었다.
학교 다닐 때 일부러 선생님께 찾아가 한소원 옆자리로 바꿔 달라고 할 때도 많았고 점심과 저녁 식사 시간 때면 항상 한소원 곁에 붙어 다니며 먹을 것을 챙겨주었다. 한소원이 친구와 어울릴 수 있도록 도와줬을 뿐만 아니라 계속 같은 반이 되기 위해 자신이 잘하는 과목을 포기하고 한소원이 듣는 수업을 따라서 신청했다.
처음에 한소원은 배민혁의 고백을 받아줄 생각이 없었다. 그러다 고등학교 3학년 때 그들이 있는 도시에 큰 지진이 일어났다.
떨어진 물건에 발목이 삔 한소원은 걸을 수 없어 밖으로 빠져나오지 못했다. 운동장에 도착한 배민혁은 한소원의 모습이 보이지 않자 선생님의 만류도 무시한 채 미친 듯이 교실로 다시 뛰어가 그녀를 업고 내려왔다.
계단을 내려갈 때 여진으로 낡은 벽화가 바닥에 떨어졌다. 그런 위험 속에서도 배민혁은 주저하지 않고 한소원을 품에 안아 보호했다. 반면 배민혁은 머리가 벽화에 맞아 피투성이가 되었다.
병원으로 이송된 후 배민혁은 이가 떨릴 정도로 아팠지만 한소원을 달래는 데만 집중했다. 구해준 것에 보답하고 싶으면 사귀어 달라고 고백했다.
그 모습에 한소원은 고개를 끄덕이며 승낙했다.
예상하지 못했던 한소원의 반응에 한참을 멍하니 있던 배민혁은 정신을 차리자마자 상처도 신경 쓰지 않은 채 팔에 꽂혀 있던 주삿바늘을 뽑아버리고 그녀를 품에 끌어안았다. 웃다가 울면서 떨리는 목소리로 평생 잘해주겠다고, 영원히 그녀를 아끼며 사랑해 주겠다고 약속했다.
두 사람은 같은 대학에 합격했다. 드라마 같은 사랑은 수많은 사람들의 부러움을 사기도 했다.
한소원은 고아라는 신분 때문에 늘 자격지심을 갖고 있었다. 배민혁은 그것을 알고 있었기에 대학교 3학년 때 성대한 프러포즈를 준비하여 자신의 마음을 보여주었다.
두 사람은 그렇게 4년 동안 연애했다. 졸업하던 그해, 배민혁은 가족의 엄청난 압박과 외부의 안 좋은 유언비어들을 무시한 채 한소원에게 세기의 결혼식을 선물했다. 한소원을 모두가 꺼리는 고아에서 세상 모든 사람들이 부러워하는 배씨 가문의 행복한 안주인으로 만들어 주었다.
결혼한 지 7년, 한진우는 올해 7살이 되었다. 모든 것이 꿈처럼 행복하기만 했다.
그런데 반년 전부터 배민혁의 태도가 갑자기 바뀌었다. 일이 바쁘다는 핑계로 밤새 돌아오지 않았고 출장도 잦았으며 한소원을 대하는 태도도 점점 더 형식적으로 변했다.
심지어 한소원이 한 번씩 적극적으로 다가가도 배민혁은 더 이상 관심을 주지 않았다.
배민혁이 집에 잘 오지 않자 한진우도 불만이 점점 커졌다. 행복한 가정을 이루지 못한 게 한소원 탓이라고 불평했으며 엄마가 아빠를 제대로 붙잡지 못해 자신이 아빠의 사랑을 잃었다면서 원망을 늘어놓기도 했다.
한소원은 남편이 회사 일 때문에 너무 바빠 자리를 비우는 것이라고 생각하며 스스로를 위로했다. 조금 지나면 나아질 거라고 여겼지만 반년 후 장장 70분에 달하는 영상 하나를 받게 되었다.
배민혁은 한소원이 예상했던 것보다 훨씬 더 빨리 바람을 피웠다. 지난 3년 동안 찍은 700여 개의 사진들과 영상들, 그 속에는 나체 상태의 배민혁과 김지연이 있었다.
두 사람은 서로 목을 감싸 안은 채 뒤엉켰다. 한소원이 스스로를 의심하며 자기 탓이라고 여길 때, 그들은 밤낮 가릴 것 없이 늘 함께 있었다.
똑똑.
갑작스러운 노크 소리에 한소원은 하던 생각을 멈췄다. 눈물에 시야가 흐려진 것도 미처 몰랐다. 울렁거리는 속을 겨우 진정시킨 뒤 영혼이 나간 사람처럼 터벅터벅 걸어 문을 열었다.
문밖에 이유연이 서 있었다.
이유연은 한 번만 더 참으라고 한소원을 말리지도 않았고, 꼬치꼬치 캐묻지도 않았다. 대신 작성해 온 이혼 협의서를 건넸다.
한소원은 협의서를 자세히 보고 싶은 마음도 없었다. 몇 장 넘기다가 서명란에 거침없이 자신의 이름을 썼다.
서명하는 손놀림은 그 어느 때보다도 단호했다.
제3화
배민혁은 그날 집에서 나간 후, 며칠 동안 회사에 머물렀다.
매일 밤 열 시가 되면 한소원에게 메시지를 보냈다. 하지만 내용은 고작 몇 글자뿐이었다.
[요즘 좀 바빠.]
[진우 잘 챙겨, 네 몸도.]
한소원은 예전처럼 일일이 캐묻지 않았다. 잔소리도 더 이상 하지 않았다. 요즘 뭘 하는지, 묻지 않아도 알 것 같았다. 그래서 배민혁이 돌아오지 않으면 한소원은 더욱 일에 집중했다.
며칠 후 한진우의 생일이 되었다. 예년 같으면 이맘때쯤 세 가족이 모여 한소원이 직접 만든 케이크를 먹으며 심플하면서도 화기애애하게 한진우가 한 살 더 먹은 것을 축하했을 것이다.
그러나 이번 생일은 예전과 달랐다. 한소원과 한진우는 밤 열 시까지 배민혁을 기다렸지만 배민혁은 결국 돌아오지 않았다.
한진우가 원망스러운 눈빛으로 한소원을 바라보며 불만 가득한 목소리로 말했다.
“아빠는 왜 아직도 안 오는 거야? 전화 한 번 더 해 봐, 케이크 크림이 다 녹겠어.”
한소원은 오늘 밤만 배민혁에게 벌써 다섯 번이나 전화를 걸었다. 하지만 아들의 재촉에 다시 전화를 집어 들었다.
통화연결음이 한참 울린 후에야 전화가 연결되었다. 한소원이 묻기도 전에 배민혁이 먼저 한마디 했다.
“소원아, 오늘 밤에는 못 갈 것 같아. 너는... 음...”
“진우랑 생일 잘 보내. 돌아가면 제대로 보상해 줄게. 일단은 이만... 나 기다리지 마...”
배민혁의 목소리는 이상하리만큼 무거웠다. 말을 마치자마자 한소원에게 말할 시간을 단 1초도 주지 않고 곧바로 전화를 끊었다.
전화가 끊기자 한진우가 한소원 앞으로 다가왔다.
“아빠 언제 온대?”
“오늘 못 온대.”
한소원의 대답에 한진우의 얼굴이 순식간에 어두워졌다. 난폭한 표정을 짓더니 한소원이 선물한 선물을 내리치며 고래고래 소리 질렀다.
“다 필요 없어! 재수 없어! 엄마가 아빠를 제대로 붙잡지 못하니까, 아빠가 집에 안 오는 거잖아!”
“엄마도 부모 사랑 못 받았잖아. 집도 없이 고아로 컸잖아. 그런데 왜 나까지 아빠 사랑 못 받게 하는 거야? 엄마랑 똑같은 사람으로 만들려고 그러는 거야? 정말 지겨워!”
어린아이의 목소리는 마치 악마의 포효처럼 한소원의 고막을 찌르며 뇌리를 강타했다. 귓가에 윙윙거리는 이명이 울려 퍼지며 가슴이 오랫동안 가라앉지 않았다.
얼굴이 하얗게 질린 채 경악한 표정으로 한진우를 바라보았다.
그러나 한진우는 자신이 한 말에 문제가 있다는 것을 전혀 느끼지 못한 채 계속해서 공격적인 말을 쏟아냈다.
“엄마는 왜 그렇게 못난 거야? 그니까 한소원이란 사람이 왜 내 엄마냐고!”
“다른 애들 엄마는 변호사이고 의사인데, 엄마는? 엄마는 할 줄 아는 게 뭐야? 매일 그 가난하고 더러운 애들만 돌보고 다니잖아! 다른 애들은 외할머니 외할아버지가 있는데 나는 엄마 때문에 외할머니도 외할아버지도 없잖아! 남들이 나를 어떻게 보겠어!”
얼굴이 잔뜩 일그러진 채 말을 하는 한진우는 전혀 일곱 살짜리 아이로 보이지 않았다. 녀석은 코웃음을 치더니 화가 난 얼굴로 선물을 내리치고는 발을 동동 구르며 방으로 뛰어갔다.
쾅.
문이 닫히는 소리가 났다.
그런데 일 분이 지나기도 전에 혼자 화를 삼키기 힘들었는지 잔뜩 성난 표정으로 다시 뛰어나와 한소원 앞에 종이 한 장을 내던졌다.
“엄마랑 모자 인연 끊을 거야! 당신 같은 못난이 엄마를 내 엄마로 인정할 수 없어!”
한마디 외치고는 한소원이 만든 케이크를 힘껏 뒤엎은 후 몸을 돌려 방으로 달려갔다.
한소원은 자리에 멍하니 서 있었다. 멍한 눈빛으로 내던져진 종이 위의 글자를 확인한 순간 눈에 비통함이 스쳤다.
[가족관계해체사유서.]
[나 한진우는 한소원과의 모자 관계를 평생 단절합니다.]
뒤틀리고 흩어진 글씨 아래에는 빨갛게 피가 맺힌 듯한 지장이 찍혀 있었다.
한소원은 아이가 이런 글을 썼다는 게 도무지 믿기지 않아 오랫동안 멍하니 서서 종이만 응시했다. 가슴은 마치 차바퀴에 수없이 짓밟힌 듯 저릿저릿했다.
이내 방 안에서 어렴풋이 대화 소리가 들려왔다.
“지연 이모, 아빠랑 언제 결혼할 거야? 나 이모 결혼식 때 꽃을 뿌리는 화동 해 줄게.”
“엄마가 너무 쓸모없어서 아빠가 집에 안 오는 거잖아. 이모가 내 엄마면 아빠도 분명 제때 집에 올 거야. 이모가 내 엄마였으면 얼마나 좋을까, 꿈에서조차 이모가 우리 엄마인 꿈을 꾼다니까.”
그 말을 듣는 순간 한소원은 몸에 흐르는 피가 얼어붙은 듯 그 자리에 굳어버렸다. 그녀의 존재 자체가 한진우에게 정말로 혐오스러운 모양이었다.
한진우는 엄마의 신분이 창피하다고 생각했다. 한소원이 자신의 체면을 깎아 먹으며 엄마 때문에 아빠가 자기를 보러 오지 않는다고 여겼다. 그래서 한소원에게는 끊임없이 저주만 퍼부었지만 김지연에게는 말끝마다 이모라고 부르며 상냥하게 대했다.
한소원은 입꼬리를 올렸지만 미소는 그 어느 때보다도 흉해 보였다.
넋이 나간 듯 발걸음을 옮겨 방으로 돌아간 뒤 한진우가 내던진 가족관계해체사유서를 꺼내 자신의 이름을 서명했다. 그러고는 잘 접어서 선물 봉투에 넣었다.
그러고는 생일 선물과 함께 한진우가 받은 선물 더미 속에 집어넣었다.
이 선물을 한진우가 보게 된다면 분명 매우 좋아하고 기뻐할 것이다.
제4화
다음 날 아침, 배민혁은 만취한 채 김지연의 부축을 받으며 집 안으로 들어왔다.
배민혁을 한소원 곁에 놓아줄 때 김지연은 일부러 옷깃을 벌려 키스 마크 흔적들을 애매하게 드러냈다. 그러고는 한소원의 귀에 대고 낮은 소리로 속삭였다.
“어제 민혁 오빠랑 좀 과하게 달렸더니, 오빠가 너무 많이 취했네요. 수고하세요.”
앙탈 섞인 숨을 내쉰 뒤 어깨를 한번 으쓱하고는 또각또각 하이힐 소리를 내며 천천히 밖으로 걸어 나갔다.
가벼운 걸음걸이에는 오만하면서도 득의양양한 기색이 가득했다. 기쁨을 감추는 게 아주 어려운 듯 보였다.
복잡한 시선으로 김지연의 뒷모습을 바라보던 한소원은 시선을 돌려 배민혁을 바라봤다. 눈시울이 시큰거렸지만 꾹 참으며 문을 닫고 배민혁을 끌어 침대 위에 내팽개쳤다.
배민혁은 사실 완전히 취하지는 않았지만 한소원이 거침없이 침대 위에 내던져 버리자 엄청난 충격에 머릿속이 띵해졌다. 하늘이 빙글빙글 도는 듯했고 귀에서는 윙윙거리는 소리가 났다.
그러다가 어딘가 불편한지 눈썹을 찌푸리더니 진정하려는 듯 거칠게 숨을 내쉬었다.
하지만 미처 진정하기도 전에 한소원이 다시 돌아왔다. 평소와 같이 꿀물을 줄 거라고 생각한 배민혁은 손을 내밀었지만 손에 닿은 건 컵이 아닌 펜이었다.
“배민혁, 아직 자면 안 돼.”
한소원이 이혼 협의서의 제일 뒷장으로 넘긴 뒤 배민혁 앞으로 내밀었다.
“이혼하자, 계약서에 서명해.”
배민혁은 미간을 찌푸리며 짜증 난 티를 팍팍 냈다. 속도 울렁거리는 상황에 한소원이 이상한 말만 하자 매우 불만스러운 듯했다. 짜증스럽게 혀를 차더니 반쯤 눈을 감은 채 한소원의 지시에 따라 자신의 이름을 썼다.
“또 보육원 후원이야?”
“필요한 게 있으면 내 카드 직접 찾아서 써, 왜 이렇게 음흉하게 계약서 같은 걸 만드는 거야? 내가 그 정도 돈도 없어 보여?”
보아하니 한소원이 무슨 말을 했는지 제대로 듣지 못한 모양이었다.
한소원도 굳이 설명하고 싶지 않았다. 그저 가만히 서서 배민혁이 끝까지 서명하는 것을 지켜보았다.
서명을 마친 배민혁은 계약서를 접어 한소원에게 돌려준 뒤 곧바로 침대에 쓰러져 괴로운 표정을 지으며 미간을 문질렀다.
예전 같으면 한소원은 배민혁의 이런 모습에 남편이 뭐라고 말하지 않아도 스스로 다가가 그의 머리를 주물러 주면서 편하게 해 주려고 노력했을 것이다. 하지만 오늘은 그저 한 번 훑어본 뒤 계약서를 들고 자리를 떴다.
한소원이 나가는 순간, 배민혁은 웬일인지 갑자기 눈을 떴다. 가슴 한가운데가 불편하게 뛰기 시작했지만 머릿속이 너무 복잡해 더 이상 생각할 여유가 없었다. 그렇게 얼마 버티지 못하고 이내 깊은 잠에 빠져들었다가 저녁이 된 후에야 다시 눈을 떴다.
배민혁이 방문을 나오자 눈이 빠지게 아빠를 기다리고 있던 한진우가 아빠의 다리를 껴안았다.
“아빠, 올해 내 생일 소원, 아직 들어주지 않았어.”
배민혁이 돌아왔다는 소식을 들은 녀석은 방 옆에 쪼그리고 앉아 아빠가 나오기를 기다렸다. 배민혁을 진심으로 존경하는 녀석인지라 혹시라도 아빠가 쉬는 것을 방해할까 봐 시끄럽게 굴지 못한 채 문 앞에서 계속 기다리고 있었던 것이다.
자상한 아빠의 눈빛을 본 한진우는 활짝 미소를 지으며 부엌에서 나오는 한소원을 향해 의기양양하게 눈썹을 치켜올렸다.
“이름을 바꿀 거야.”
“아빠 성을 따를 거야! 아니면 김...”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배민혁이 얼굴을 찌푸리더니 당황한 듯 한진우의 입을 막았다.
“무슨 헛소리를 하는 거야!”
“드라마나 만화처럼 성을 아무렇게나 바꿀 수 있는 줄 알아? 너 벌써 일곱 살이야, 이제 철 좀 들어!”
한진우를 꾸짖는 와중에도 배민혁은 수시로 한소원을 흘낏흘낏 쳐다보았다. 아내의 안색이 아무런 변화가 없는 것을 확인하고서야 마음을 내려놓은 듯 숨을 내쉬었다.
어찌나 긴장했는지 이마에 식은땀까지 송골송골 맺혔다. 숙취도 완전히 사라진 듯했다.
“그럼 다른 소원으로 하지 뭐... 아빠랑 둘이 밥 먹으러 갈 거야, 엄마는 빼고.”
“이건 되지?”
배민혁의 눈빛에 약간의 망설임이 스쳤다. 조심스럽게 한소원을 쳐다보았지만 그녀는 아무렇지도 않은 듯 아주 담담하게 말했다.
“여보, 진우 말대로 해.”
“이제 일곱 살이니까, 제법 철도 들었고 자기가 뭘 원하는지 알 때도 됐지.”
배민혁의 눈빛에 살짝 의문이 스쳤다.
뭔가 한소원이 좀 달라진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왜 갑자기 이렇게 너그러워진 거지?’
제5화
저녁에 배민혁과 한진우가 나간 후, 한소원도 외출했다.
이유연과 집 아래 음식점에서 만나기로 약속한 한소원은 이혼 협의서를 건네며 최대한 빨리 처리해 달라고 부탁했다.
이혼 협의서 제일 마지막에 적힌 두 사람의 서명을 확인한 이유연은 한숨을 내쉬었다.
하지만 더 이상 다른 말은 하지 않고 급하게 몇 입 먹더니 일하러 가야 한다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고민하던 일을 드디어 처리한 한소원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래서 오래 머물지 않고 가방을 집어 들고 함께 나가려 했다.
그런데 문을 나서자마자 이유연이 화장실에 가겠다며 들고 있던 가방을 한소원에게 맡기면서 문 앞에서 잠시 기다려 달라고 했다.
한소원이 룸에서 나와 모퉁이를 지나칠 때 웨이터가 옆으로 스쳐 지나가며 옆쪽 룸의 문을 열었다. 그 안에서 대화 소리가 흘러나왔다.
“아빠, 다음에도 우리 같이 밥 먹으러 나오자. 나는 아빠랑 지연 이모랑 같이 밥 먹는 게 제일 좋아.”
“이모도 진우랑 같이 밥 먹는 게 너무 좋아. 다음에 이모 집에 또 놀러 와. 이모가 진우랑 아빠한테 케이크 해 줄게.”
“아이고, 한 가족 아니에요? 너무 닮으셔서 한 가족인 줄 알았어요.”
웨이터의 말에 한진우와 김지연 두 사람은 기분이 좋아졌는지 입을 가리며 웃었다.
메시지를 확인하고 있던 배민혁은 그 말에 눈살을 살짝 찌푸렸다. 그들의 말을 끊기 위해 고개를 든 순간 문틈 사이로 밖에 있는 한소원과 시선이 마주쳤다.
“소원아!”
배민혁은 바로 쫓아 나와 해명하려 했다. 그러더니 뭐라고 하기도 전에 표정이 살짝 변하더니 룸 문을 닫아 김지연의 얼굴을 가려버렸다.
눈에는 당황한 기색이 숨겨져 있었다. 입을 여러 번 뻥긋거렸지만 아무 말도 하지 못한 채 안절부절못하고 있었다. 바로 그때 날카로운 아이의 목소리가 터져 나왔다.
“엄마! 우리 미행한 거야?!”
“엄마가 직접 가도 된다고 했잖아! 다 허락해 놓고 왜 변태처럼 따라오는 거야? 할 일이 없어? 그렇게 한가해?”
한진우는 잔뜩 일그러진 얼굴로 소리쳤다. 그러더니 배민혁과 한소원 틈 사이로 몸을 비집고 들어와 온 힘을 다해 한소원을 밀쳤다.
방심하고 있었던 한소원은 비틀거리며 몇 걸음 뒤로 물러섰다. 다행히 옆에 벽기둥이 있었기에 그걸 붙잡으며 몸의 균형을 잡았다.
“한진우! 엄마한테 그게 무슨 말버릇이야!”
“누가 엄마를 함부로 밀라고 했어? 예의는 다 밥 말아 먹은 거야?”
배민혁이 눈살을 찌푸리며 한소원 곁으로 다가가 부축하면서 아들을 꾸짖었다.
한진우는 배민혁을 존경하면서도 아빠라는 존재에 대해 많이 두려워했다. 그래서 처음으로 아빠한테서 꾸중을 듣자 얼굴이 창백해졌다. 분노도 순식간에 사라진 듯 입술만 질끈 깨물며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아이고, 애들인데 왜 그래요.”
상냥한 목소리가 들리더니 김지연이 룸에서 나와 한진우를 감싸며 웃는 얼굴로 대신 변명해 줬다.
“진우가 아직 어려서 철이 없잖아요. 어린아이가 한 말과 행동, 그렇게 진지하게 받아들일 필요 없잖아요.”
김지연과 한소원은 많은 부분에서 닮아 있었다.
두 사람이 나란히 서니 비교가 되어 더욱 닮아 보였다.
중요한 것은 김지연의 몸에 배민혁의 외투가 걸쳐져 있다는 것이었다.
김지연이 룸에서 나올 줄 예상하지 못했던 배민혁은 순간 가슴이 철렁했다. 당황한 얼굴로 한소원을 바라보며 설명했다.
“소원아, 지연이는 회사에서 새로 계약한 모델이야. 마침 협업 논의 중이라 같이 식사하는 중이고.”
“감기에 걸린 것 같아서 내 외투를 빌려준 거야.”
한소원은 눈 속의 감정을 억누르며 배민혁이 그녀의 허리에 무심코 두른 손을 떼어냈다. 그러고는 남편을 완전히 믿고 이해하는 듯한 아내의 태도로 말했다.
“괜찮아, 알고 있어. 계속 먹어, 나는 볼일이 있어서 먼저 가볼게.”
말이 끝나자마자 화장실에 갔던 이유연이 돌아왔다.
“소원아, 너 그 협의서...”
하지만 말을 마치기도 전에 배민혁을 발견한 이유연은 하던 말을 멈췄다. 동작도 굳어졌다.
“무슨 협의서?”
배민혁이 이유연의 말을 듣고 되물었다.
한소원은 가방 아래에 있던 협의서를 손으로 돌돌 말며 아무렇지 않은 듯 둘러댔다.
“아무것도 아니야, 그냥 보육원 하나 더 후원하려고. 두 사람, 들어가서 계속 식사해. 우리는 먼저 갈게.”
처음부터 끝까지 한소원은 시종일관 담담한 표정이었다.
한진우가 버릇없이 욕을 해도, 아들이 힘껏 밀쳐도, 자신과 어느 정도 닮은 김지연을 보고도, 그녀가 배민혁의 외투를 걸치고 있는 것을 보아도, 전혀 화내는 기색이 없었다.
감정의 기복조차도 없었다.
배민혁은 마음속으로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지만 웬일인지 마음이 걷잡을 수 없이 심란했다.
한소원의 얼굴이 너무 평온했기 때문이다.
자신이 붙잡을 수 없는 무언가가 은연중에 흘러내리고 있다는 느낌이 들었다.
말로 설명할 수 없는 감정에 기분까지 불쾌해졌다.
제6화
한소원이 떠난 후, 밥 먹을 기분이 사라진 배민혁은 옆에서 아부하는 김지연을 완전히 무시해 버렸다. 그녀가 돌려준 외투를 쓰레기통에 던져 버리고는 자리에서 일어나 더러운 쓰레기를 보듯 위에서 아래로 그녀를 흘겨보았다.
“내가 했던 말 잊었어?”
“김지연, 내 앞에서 머리 굴리지 마. 수작 같은 거 부릴 생각 하지 말라고! 너는 그럴 자격이 없어.”
말을 마친 뒤 김지연의 애원과 사과를 무시한 채 내내 창백한 얼굴을 하고 있던 한진우의 손을 잡고 성큼성큼 밖으로 나갔다.
그렇게 한마디도 없이 차에 올라탄 뒤 곧바로 집으로 향했다.
배민혁이 집에 도착했을 때 한소원은 이미 와 있었다.
한소원이 떠나는 뒷모습이 마음에 걸렸는지 배민혁은 그 장면이 머릿속에 떠올라 오는 내내 계속 심란했다.
집에 도착한 후 아무렇지 않게 조용히 있는 한소원의 모습을 보자 붕 떠 있던 마음도 비로소 제자리를 찾은 듯했다.
하지만 불안함과 아내에 대한 미안함 때문에 뭔가 보상해 주고 싶었다. 주머니 여기저기를 뒤져 보다가 마침 선물 상자 하나를 발견했다.
망설임 없이 포장지를 뜯고 안에 든 목걸이를 손에 쥐었다.
“소원아, 새해 선물이야.”
천천히 다가가 몸을 한소원에게 기대며 다정하게 한소원의 귓가에 속삭였다. 그러고는 웃으면서 손에 든 목걸이를 그녀의 얼굴 앞에 내려놓았다.
한소원이 갑작스러운 선물을 보며 기쁨의 감탄사를 내뱉기를 기다렸다.
그러나 한참을 기다려도 예상했던 반응이 없자 배민혁은 의아한 표정으로 몸을 일으켰다.
“마음에 안 들어?”
“이 목걸이, 지난달에 나한테 선물로 줬잖아. 결혼기념일 선물로.”
가슴이 철렁 내려앉은 배민혁은 눈빛이 살짝 흔들렸다. 고개를 살짝 숙이자 하얀 목 아래 목걸이가 걸려 있는 것을 볼 수 있었다. 게다가 방금 꺼낸 목걸이와 완전히 똑같은 디자인이었다.
그제야 이 목걸이에 대한 기억이 머릿속에 떠올랐다. 한소원이 이 목걸이를 한 것이 예쁘다며 김지연이 자신도 갖고 싶다고 했다. 그리 과한 요구가 아니라 생각해 배민혁은 김지연의 소원을 들어주었다.
오늘 오후 비서가 목걸이를 건네주자 배민혁은 대충 주머니에 쑤셔 넣었다. 그러다가 저녁에 한바탕 소란을 겪으면서 머릿속에 한소원 생각뿐이었다. 그래서 그 일을 까맣게 잊고 있었던 것이다.
살짝 당황했지만 3년 동안 숨겨온 내연녀라 곧바로 아무렇지 않은 척하며 정신을 차렸다. 그동안 이런 상황에 어떻게 대처할지 경험이 많이 쌓였기 때문이다. 그래서 목걸이를 다시 거둬 쓰레기통에 던져버렸다.
“아마 점원이 잘못 포장한 것 같아. 됐어, 이런 건 너무 싸구려라 너한테 안 어울려. 다음에 경매에서 제일 예쁜 걸로 사 줄게.”
“며칠 후에 같이 쇼핑하러 가자. 새해도 다가오는데 갖고 싶은 거 있으면 말해. 이 남편이 사 줄게.”
한소원은 입꼬리를 살짝 올렸다. 대충 얼버무리며 승낙하는 척했지만 그녀의 눈빛이 얼마나 차가운지 배민혁은 보지 못했다.
4일 후, 배민혁은 한소원을 근처 쇼핑몰로 데려갔다.
한소원은 쇼핑에 큰 흥미가 없었지만 배민혁은 아주 열심히 그녀에게 줄 선물을 골랐다. 주얼리, 의류, 신발, 가방, 한소원이 한 번만 더 쳐다봐도 망설임 없이 계산했다.
주변에서 감탄하는 탄성 소리가 터져 나오며 칭찬도 쉴 새 없이 쏟아졌다.
“대박! 완전 부자잖아! 나도 이렇게 돈 많고 멋진 남자가 곁에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
“남자는 자기가 사랑하는 데 돈을 쓴다잖아. 배 대표님이 자기 아내를 엄청 사랑하시나 봐!”
한소원은 그 말을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렸다. 속으로는 코웃음을 백 번 넘게 쳤다.
두 사람은 어느 한 가게로 들어갔다. 소파에 앉아 한소원을 기다리던 배민혁은 무심코 밖으로 시선을 돌렸다가 한 여자의 모습을 발견하고는 순간 멈칫했다.
김지연이었다.
두 눈이 새빨갛게 충혈된 채 배민혁을 뚫어지게 바라봤다. 다른 곳에 가지도, 그를 피하려 하지도 않으며 들켜도 상관없는 듯한 태도를 보였다.
이를 악문 배민혁은 낮은 목소리로 욕설을 내뱉었다. 그러고는 한소원에게 대충 핑계를 댄 뒤 자리에서 일어나 아래층 화장실로 향했다.
급하게 나가느라 자리를 뜨자마자 그의 뒤로 한소원이 따라왔다는 사실을 전혀 몰랐다.
배민혁이 밖으로 나오자 김지연이 바로 뒤따라왔다.
김지연이 갑자기 배민혁 앞에 무릎을 꿇더니 남자의 다리를 붙잡고 울기 시작했다.
“민혁 씨, 나 정말 잘못했어요.”
“제발 한 번만 더 기회를 주세요. 지난번엔 제가 머리가 어떻게 됐나 봐요. 앞으로는 내 주제를 확실히 알고 민혁 씨가 필요할 때만 얼굴 내밀게요. 두 번 다시 소원 씨 앞에 나타나지 않을게요, 네?”
“잘 숨어 있을게요, 그러니까 저 버리지 마세요.”
불과 며칠 사이에 김지연은 부쩍 야위었다. 다크 서클이 턱까지 내려와 안색이 아주 안 좋아 보였다. 배민혁을 잃을까 봐 많이 두려운 듯 목소리뿐만 아니라 몸도 오돌오돌 떨었다.
애처로운 김지연의 얼굴을 응시하던 배민혁은 한참 만에야 한숨을 내쉬었다.
흐느낄 때의 말투가 한소원과 너무 닮아서 저도 모르게 또다시 마음이 약해졌다.
“몇 년 동안 내 곁에 조용히 있었던 거 생각해서 이번에는 봐줄게.”
“하지만 다음은 없어.”
말이 떨어지자마자 김지연은 배민혁의 품에 와락 안기더니 고개를 숙여 그의 뺨에 쪽 하고 입을 맞췄다.
“알아요, 앞으로는 꼭 얌전히 있으면서 말을 잘 들을게요.”
배민혁은 김지연의 적극적이면서도 순종하는 모습을 아주 좋아했다. 입꼬리를 올리며 김지연의 허리를 끌어안더니 그녀의 감정이 진정되기를 기다린 후 문을 열고 나갔다.
그런데 배민혁이 화장실에서 나오자마자 눈앞에 어두운 그림자가 드리워졌다. 고개를 든 순간 배민혁은 눈이 휘둥그레지더니 얼굴이 백지장처럼 창백해졌다.
“소원아, 왜 여기에 있어? 오래 기다렸어?”
배민혁은 김지연이 그의 목소리를 듣고 나오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에 일부러 톤을 높였다. 너무 긴장한 나머지, 목소리에 스스로도 깨닫지 못한 떨림이 섞여 있었다.
다행히 김지연은 배민혁의 뜻을 알아들은 듯 화장실 안에 숨은 채 나오지 않았다.
분위기가 얼음장처럼 차가워졌다. 배민혁을 뚫어지게 바라보던 한소원은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 조금 전 손톱이 손바닥을 파고들 정도로 주먹을 꽉 쥐었지만 지금은 일부러 태연한 표정을 지었다.
“위층 화장실이 고장 난 것 같더라고, 방금 막 내려왔어.”
“손 씻고 같이 가자.”
제7화
그 후 며칠 동안, 평소 그렇게나 바쁘던 배민혁은 온종일 한소원의 곁에만 머물렀다. 한소원이 그날의 대화를 들었는지 안 들었는지 은근히 떠보기도 했다.
하지만 평소처럼 행동하는 한소원의 얼굴에 그 어떤 이상한 점도 찾아볼 수 없었다.
한소원이 여자 문제에 대해서는 티끌 하나도 용납하지 못하는 성격임을 배민혁은 너무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진짜로 무언가를 들었다면 절대 이렇게 가만히 있지 않을 거라는 것도 알았다. 그래서 점차 걱정을 내려놓았다.
얼마 지나지 않아 새해가 밝았다.
고아인 한소원은 새해가 되어도 갈 친정이 없었다. 섣달그믐날, 배민혁은 그녀와 한진우를 데리고 본가로 가서 배민혁의 부모님과 함께 식사를 했다.
대문에 들어서자마자 배민혁은 온몸이 굳었다. 그 모습에 의아한 얼굴로 고개를 든 한소원은 그제야 김지연도 여기에 있는 것을 발견했다.
거실에 앉아 있는 김지연은 배민혁의 엄마 박경희의 곁에서 아주 상냥하게 웃고 있었다.
“지연 이모!”
김지연을 발견한 한진우는 너무 기쁜 나머지 한소원의 손을 뿌리치고 곧바로 달려가 그녀에게 안겼다.
“오늘은 가지 마, 나랑 아빠랑 같이 설날 보내자! 우리한테 이모가 필요해!”
“아이고, 때맞춰 잘 왔구나. 이쪽은 김지연 선생이라고, 여진이 자세 교정 선생님인데 시간도 늦어서 저녁이라도 먹고 가라고 했어.”
“명절인데 사람이 많아야 시끌벅적하고 재밌잖아. 젊은 사람들끼리 얘기할 거리도 있고.”
박경희는 잔뜩 굳어진 배민혁의 안색을 눈치채지 못한 채 계속해서 칭찬을 늘어놓았다. 한소원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너무 확실한 박경희의 의도가 그저 우스울 뿐이었다.
박경희는 항상 한소원을 얕잡아 봤다. 한소원이 고아라는 것과, 그녀가 하는 일 모두.
이제 배민혁 곁에 새로운 사람이 나타났다는 것을 알자마자 그럴듯한 핑계조차 찾을 생각 없이 김지연을 바로 집에 데려와 식구들과 어울리게 했다.
저녁 식사 때 한진우는 한소원을 밀쳐낸 뒤 배민혁과 김지연 사이에 앉았다. 식사하는 내내 떠들썩한 분위기였다.
박경희의 행동은 더더욱 가관이었다. 김지연에게 반찬을 덜어주며 어떻게든 배씨 가문과 가까워질 기회를 만들었다. 배민혁과 함께 집안사람들에게 새해 인사를 시키는가 하면 또 한 번은 배민혁에게 따로 술을 따르라고도 했다.
마지막에는 자기 딸 같다는 핑계로 집에서 하룻밤 묵으라고까지 했다.
그러면서도 한소원에게는 시선 한 번 주지 않았다.
시간이 늦어지자 김지연은 결국 배씨 가문에 묵게 되었다. 한소원과 배민혁이 1층에 앉아 한진우가 불꽃놀이 하는 것을 보고 있을 때 김지연이 레이스 캐미솔 잠옷을 입은 채 물을 마시러 다섯 번이나 지나갔다. 행동은 무심한 듯 보였지만 지나갈 때마다 잠시 멈춰 서서 가볍게 그들에게 인사를 건넸다.
한소원은 아무 반응이 없었지만 옆에 있는 배민혁은 시간이 갈수록 숨소리가 거칠어졌다. 시선은 휴대폰에 고정한 채 두 손으로 휴대폰을 들고 열심히 뭔가를 입력했다.
한소원은 고개를 숙여 그 모습을 한 번 훑었다. 눈에는 상대방을 비꼬는 기색이 적나라하게 드러났다.
밤 12시.
배민혁의 휴대폰이 여러 번 울렸다.
그 소리에 배민혁은 결국 참지 못하고 메시지를 열어 확인했다.
시선은 오랫동안 화면에 머물렀다. 거친 숨을 몇 번 내쉬더니 눈 속의 욕망을 겨우 짓누르면서 휴대폰을 내려놓고 억지로 잠을 청했다.
30분 후, 배민혁은 다섯 번이나 몸을 뒤척이다가 끝내 다시 눈을 떴다.
한소원을 바라보며 그녀가 숨을 고르게 쉬는지 확인한 뒤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자리에서 일어나 가벼운 발걸음으로 방을 나갔다.
문을 나서자마자 낮고 쉰 목소리가 한소원의 귀에 들려왔다. 그 소리에 한소원은 천천히 눈을 떴다. 사실 한소원 또한 전혀 졸리지 않았다.
“왜 여기 있어?”
“민혁 씨가 보고 싶어서 나올 때까지 기다렸어요.”
“미쳤어? 남들 보면 어쩌려고 그래!”
“어머니도 바라는 건데 왜 나한테 뭐라고 그래요. 내가 잘못한 거예요?”
“닥쳐, 소원이 깨겠어. 네 방은 어디야?”
한참 동안 바스락거리는 소리가 나더니 두 사람의 발걸음 소리가 점점 멀어져 갔다.
배민혁은 어찌나 급했는지 나갈 때 문도 제대로 닫지 않았다. 살짝 열린 방 문을 바라보는 한소원의 시선은 잔잔한 호수보다 더 고요했다. 체념한 듯 침대에서 내려와 방 문을 닫으려고 걸음을 옮겼다.
제8화
그런데 방 문을 미처 닫기도 전에 여자의 요염한 비명 소리가 한소원의 고막을 파고들었다.
“소리 내지 마.”
배민혁이 목소리를 낮추며 김지연의 입을 막았다.
“뭐가 그렇게 무서운데요? 다들 자잖아요. 이게 더 자극적이지 않아요?”
“게다가 민혁 씨도 내가 소리 내는 거 좋아하잖아요?”
배민혁은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김지연의 말에 동의한다는 뜻이었다.
고개를 든 한소원은 그제야 배민혁이 급한 나머지 김지연의 방 문조차 제대로 닫지 않았다는 것을 알았다.
한소원이 고개만 살짝 들어도 배민혁이 바로 보이는 각도였다.
평소 그렇게나 냉엄한 얼굴을 하고 있던 남자였지만 지금은 두 볼이 약간 붉어져 있었다.
김지연을 바라보는 눈빛에는 숨길 수 없는 다정함과 격정이 담겨 있었다.
과거 배민혁이 한소원을 바라보던 모습과 똑같았다.
하지만 결혼 후, 한소원은 배민혁의 이토록 다정한 시선을 거의 본 적이 없었다.
이제야 확실히 알 수 있었다. 한소원을 사랑하는 배민혁의 눈빛이 변한 것이 아니라 그녀를 사랑하지 않을 뿐이라는 것을...
오랫동안 얼어붙어 있던 마음이 이 순간 거침없이 떨리며 쓰라린 통증이 가슴속에서 터져 나왔다. 갑작스러운 질식감에 숨조차 제대로 쉴 수 없었다.
충분히 버틸 수 있을 거라고, 더는 이 남자에게 감정 따위 없을 거라고 생각했지만 불륜 현장을 목격하는 것은 또 다른 문제였다.
시선이 흐릿해진 채 고개를 돌린 한소원은 방 문을 닫은 후 이불 속으로 파고들었다.
하지만 옆방의 소리가 너무 큰 탓인지, 아니면 한소원의 청력이 너무 좋은 것인지, 멀지 않은 곳의 사소한 소리 하나하나가 문틈 사이로 그녀의 귓속에 스며들었다.
소리 하나하나에 뼛속까지 시리는 느낌이 들었다.
다음 날 아침, 한소원은 잔뜩 어두운 안색으로 아래층에 내려왔다.
배민혁이 그녀의 곁으로 다가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소원아, 어젯밤에 잠을 잘못 잤어? 새해라 그런지 불꽃놀이 소리가 너무 시끄럽던데, 그렇지?”
배민혁과 실랑이할 기력이 없었던 한소원은 고개를 저으며 대충 얼버무렸다.
“아니, 일찍 잤는데 악몽을 좀 꾼 것 같아.”
너무 덤덤한 한소원의 표정에 배민혁은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어젯밤의 무모한 행동에 뒤늦게 불안하고 초조해진 배민혁은 더 이상 이 집에 머물기 싫어 그녀에게 아들과 같이 집으로 가자고 했다.
한소원도 별말은 하지 않았다. 더 있어 봤자 잠도 잘 못 잘 것 같았다. 게다가 어젯밤 잠을 설친 탓에 두피마저 저릿저릿했기에 지금은 그저 쉬고 싶다는 생각뿐이었다.
그러나 그들이 떠나기도 전에 김지연이 갑자기 입을 가리더니 배를 움켜쥐었다. 얼굴이 창백해지며 갑자기 아픈 듯 소리를 냈다.
“악! 우웩!”
“배 아파요, 배가 너무 아파요...”
“아! 그리고 피도 나는 것 같아요...”
눈살을 찌푸린 배민혁은 무언가 떠오른 듯 안색이 어두워지더니 눈빛에 복잡한 기색이 스쳤다. 무심코 차 열쇠를 한소원의 손에 쥐어주고는 몇 걸음 다가가 김지연을 들어 올렸다.
“소원아, 넌 일단 차 몰고 집에 가, 운전 조심하고.”
“김지연 씨 병원에 데려다주고 금방 돌아올게.”
말이 끝나자마자 김지연을 안고 곧장 차고로 향했다. 한진우 또한 누가 시키지 않았는데도 알아서 깡충깡충 따라갔다.
그래도 한소원 앞인지라 김지연 호칭 뒤에 ‘씨’를 붙이며 거리를 두는 척했다.
차 열쇠를 움켜쥔 한소원은 눈에 비웃음이 스쳤다. 지금 상태로 차를 몰면 분명 사고가 날 것 같았다.
그래서 차 열쇠를 내려놓은 뒤 택시를 잡아타고 바로 집으로 돌아가 숙면을 취했다.
얼마나 지났을까, 한진우의 비명 소리와 몸에 느껴지는 둔한 통증 때문에 잠에서 깼다.
제9화
“지연 이모가 임신했어!”
“지연 이모 배 속에 쌍둥이가 생겼다고! 그럼 나 이제 아빠의 유일한 자식이 아닌 거네? 나는 모든 걸 잃은 거네?”
“엄마, 아빠랑 이혼해 주면 안 돼? 엄마가 떠나면 안 될까? 엄마가 떠나면 아빠가 집에 돌아올 거야. 지연 이모도 나를 친아들처럼 대해주겠다고 했어. 내가 그래도 큰아들이니까 여기 있는 것들은 여전히 내 거야!”
“엄마! 왜 이렇게 이기적인 거야? 사람들이 싫어하는 걸 뻔히 알면서도 아빠를 붙잡고 안 놓아주잖아? 제발 가 줘, 나를 위해서라도 가면 안 될까?”
한진우는 날카로운 목소리로 또박또박 말했다. 기분이 오르락내리락했지만 일곱 살 아이 치고는 표현이 너무나 완벽했다. 한소원도 곧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알게 되었다.
김지연이 배가 아팠던 이유는 사실 임신했기 때문이었다. 게다가 쌍둥이라니...
“엄마, 나 정말 죽는 꼴 보고 싶어서 그래?”
“내가 여기서 뛰어내리면 아빠도 엄마를 싫어할 거고 할머니도 엄마를 쫓아낼 거야, 내가 못 할 것 같아?”
한소원이 멍하니 있는 몇 초 사이, 한진우는 장난감 망치를 내려놓고 베란다로 달려갔다. 한 손으로 난간을 잡은 채 다른 한 발을 밖으로 내디뎠다. 증오심이 가득한 얼굴은 어느새 잔뜩 일그러져 있었다.
이 순간, 한소원은 말할 힘조차 없었다. 아들이 자기 목숨을 걸고 엄마를 협박할 줄은 꿈에도 몰랐다. 자기 몸이 다치는 것까지 감수하면서 엄마를 쫓아내려는 한진우를 바라보자 피곤함과 무기력함이 밀려왔다.
한참 후, 한소원이 천천히 입을 열었다.
“알겠어, 내가 나갈게.”
어차피 조만간 나가려던 참이었다. 여기를 떠날 준비는 다 되어 있었다.
요 며칠 배민혁의 얼굴에는 항상 미소가 번져 있었다. 얼음장 같던 기세도 눈 녹듯 녹아내렸다. 보아하니 매우 행복해 보였다.
하긴, 어느 남자가 자식이 더 생기는 것을 싫어하겠는가.
배민혁이 집에 안 돌아오는 날이 점점 더 많아졌다. 물론 올 때마다 미안한 마음을 보상하려는 듯 항상 많은 선물을 가져와 지키지 못할 약속들을 늘어놓았다.
한소원은 굳이 드러내지 않았지만 배민혁의 ‘연기’에 맞장구도 치지 않았다.
며칠 후 보육원에서 드디어 한소원에게 전화를 했다.
“소원 언니, 보육원 쪽 인수인계 절차는 모두 끝났어요. 언제든지 출근 가능하세요.”
“언제쯤 오실 수 있을까요?”
한소원이 소파에 앉아 잠시 생각하다가 말했다.
“내일이면 될 것 같아요.”
“내일? 뭐 해? 소원아, 볼일 있어?”
배민혁의 목소리가 뒤에서 들려왔다. 천천히 걸어온 남자는 습관처럼 그녀를 품에 안았다.
“친구랑 만나기로 했어, 별일 아니야.”
배민혁은 알겠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입을 열려는 순간, 주머니에서 전화벨이 울렸다. 전화를 받자마자 표정이 급변하더니 급하게 전화를 끊은 후 황급히 몇 마디 했다.
“소원아, 오늘 밤 회사에 일이 생겨서 가봐야 할 것 같아. 너 먼저 자.”
“일 좀 처리하고 올게, 돌아오면 우리 둘이 여행 가자.”
말을 마친 뒤 몸을 돌려 떠났다.
집에 돌아온 지 5분도 안 되어 불려 나간 것을 보면 이 남자에 대한 김지연의 소유욕이 확실히 보통은 아닌 모양이었다.
하지만 한소원의 얼굴은 아주 평온했다. 배민혁의 뒷모습이 완전히 사라질 때까지 기다린 뒤 천천히 일어나 짐을 챙겼다.
그날 저녁, 한소원 앞으로 택배가 배달되었다.
그 안에는 이혼 협의서 두 부가 들어 있었다.
얇은 협의서였지만 한소원은 너무나도 무겁게 느껴졌다. 이혼을 결심했을 때까지만 해도 마음이 조금은 아팠다. 하지만 숙려기간이 지난 후에 혼인 관계가 끝났다는 증명서를 보니 오히려 마음이 홀가분했다.
지난 한 달 동안, 한소원은 정말 너무나도 많이 지쳐버렸다. 이제 드디어 시끄러운 모든 것에서 멀어져 혼자 조용히 떠날 수 있었다. 모든 힘과 마음을 의미 있는 일에 쏟아부을 수 있게 되었다.
한동안 한소원에게 삐쳐 엄마를 무시하던 한진우를 불렀다. 그러고는 녀석이 보는 앞에서 후련한 마음으로 이혼 협의서를 펼쳐 보여주었다.
“진우야, 네 소원이 이루어졌네.”
“아빠랑 엄마 이혼했어. 네 양육권은 아빠한테 있으니까 김지연이 네 새엄마가 될 거야.”
그토록 오랫동안 엄마를 저주하고 욕해온 한진우는 드디어 소원을 이루었다. 녀석이 분명 미칠 듯이 기뻐할 것이라 생각했지만 한소원의 말을 듣는 순간 완전히 멍해진 듯 자리에 굳어 서 있었다.
한소원은 녀석이 너무 기쁜 나머지 표현을 못 한 것이라 생각해 이혼 서류를 한진우의 손에 쥐여줬다.
“이 선물은 네가 직접 아빠한테 전해 줘.”
“이제부터 너와 아빠, 둘 다 자유야.”
말을 마친 뒤 더 이상 이 집에 머물지 않고 이혼 협의서를 챙긴 뒤 미리 정리해 둔 캐리어를 끌고 밖으로 나갔다.
차에 올라탄 후 뒤도 돌아보지 않고 자리를 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