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로모션 로딩 중...
기다림의 끝, 재가 된 혼약
칠 년 전, 내 약혼자는 어릴 적부터 함께 자란 공주와 헤어지기 싫어 화친을 위해 백령국으로 시집가는 길에 직접 호위로 나섰다. 그 뒤로 해마다 편지 한 통이 날아왔다. 첫해에는 이렇게 적혀 있었다. "난영이가 백령국 생활에 적응하지 못하고 있어. 난영이가 혼례를 마치면 도성으로 돌아가 너와 혼인할게." 이듬해에는 이런 사연을 늘어놓았다. "난영이가 아이를 가졌는데, 입덧이 심해 잠도 못 자. 아이를 낳을 때까지만 곁을 지켜 주고 도성으로 돌아가 혼인할게." 삼 년째에는 이 말뿐이었다. "의지할 데 없는 난영이 모자가 너무 가엾어." 그 뒤로 몇 년 동안은 짤막한 한마디만 적혀 있었다. "연서야, 조금만 더 기다려 줘." 그가 도성을 떠난 지 칠 년째 되던 해, 일곱 번째 편지도 어김없이 도착했다. "연서야, 백령국 군주가 세상을 떠났어. 내가 공주를 호위해 도성으로 돌아갈 거야. 이제야 너를 정식으로 맞아들일 수 있겠구나." 마지막 눈물까지 쏟아 냈다. 어머니 앞에 무릎을 꿇고 일곱 통의 편지와 혼인 서약서를 직접 태웠다. "어머니, 최서겸과의 혼인은 없던 일로 하겠습니다. 어머니께서 정해 주신 분께 시집가겠습니다." '최서겸, 이번에는 내가 너를 버리는 거야.'
챕터 (1)
1화
칠 년 전, 내 약혼자는 어릴 적부터 함께 자란 공주와 헤어지기 싫어 화친을 위해 백령국으로 시집가는 길에 직접 호위로 나섰다.
그 뒤로 해마다 편지 한 통이 날아왔다.
첫해에는 이렇게 적혀 있었다.
"난영이가 백령국 생활에 적응하지 못하고 있어. 난영이가 혼례를 마치면 도성으로 돌아가 너와 혼인할게."
이듬해에는 이런 사연을 늘어놓았다.
"난영이가 아이를 가졌는데, 입덧이 심해 잠도 못 자. 아이를 낳을 때까지만 곁을 지켜 주고 도성으로 돌아가 혼인할게."
삼 년째에는 이 말뿐이었다.
"의지할 데 없는 난영이 모자가 너무 가엾어."
그 뒤로 몇 년 동안은 짤막한 한마디만 적혀 있었다.
"연서야, 조금만 더 기다려 줘."
그가 도성을 떠난 지 칠 년째 되던 해, 일곱 번째 편지도 어김없이 도착했다.
"연서야, 백령국 군주가 세상을 떠났어. 내가 공주를 호위해 도성으로 돌아갈 거야. 이제야 너를 정식으로 맞아들일 수 있겠구나."
마지막 눈물까지 쏟아 냈다.
어머니 앞에 무릎을 꿇고 일곱 통의 편지와 혼인 서약서를 직접 태웠다.
"어머니, 최서겸과의 혼인은 없던 일로 하겠습니다. 어머니께서 정해 주신 분께 시집가겠습니다."
'최서겸, 이번에는 내가 너를 버리는 거야.'
제1화
"연서야, 나 돌아왔어!"
하인들에게 붉은 비단을 걸라 이르던 중, 익숙하면서도 낯선 목소리가 들려왔다.
몸이 굳었다. 손에 쥐고 있던 비단이 바닥으로 흘러내렸다.
고개를 돌리는 순간, 끝내 눈시울이 젖었다.
칠 년 만에 만난 서겸은 소년 시절의 풋기를 벗고 있었다. 꼿꼿이 선 모습이 한결 의젓했다.
곁에 부녀자의 차림으로 서 있는 이는 칠 년 전 화친을 위해 시집간 공주, 서난영이었다.
서겸은 예닐곱 살쯤 된 아이의 손을 잡고 있었는데, 그 눈매와 인상이 어쩐지 서겸을 닮아 있었다.
아이가 미간을 찌푸리며 서겸을 올려다보았다.
"아버지, 이 사람이 도성에 두고 오신 약혼녀입니까? 울상인 얼굴이라 저는 싫습니다."
멍해진 사이 손끝이 가늘게 떨렸다.
서겸의 눈에 당혹감이 스쳤다. 곧바로 해명이 이어졌다.
"연서야, 오해하지 마. 승원이는 난영이와 백령국 군주 사이에서 난 아이야. 나를 잘 따르는데 얼마 전에 아버지까지 여의었잖아. 그래서 마음을 달래 주려고 아버지라 부르게 한 것뿐이야."
눈물을 꾹 삼키고 입꼬리를 올렸다. 가슴 한쪽이 쓰렸다.
"오해 안 했어. 공주께서는 막 돌아오셨으니 궁에 먼저 드셔야 할 텐데, 우리 집에는 무슨 일로 왔어?"
냉랭한 말투를 알아챘는지 서겸의 눈에 다시 당혹감이 스쳤다.
"이미 궁에 들러 황제 폐하께 문안드렸어."
아이의 손을 놓은 그가 성큼 다가와 내 손을 잡았다.
거칠고 따뜻한 손바닥. 칠 년 동안 한 번도 누리지 못했던 다정함이었다.
"연서야, 나를 기다리느라 칠 년 동안 온갖 소문에 시달렸겠지. 나 때문에 많이 서러웠을 거야."
"폐하께서 내가 공주를 지킨 공을 헤아려 특별히 은혜를 베푸셨어. 우리가 혼인하면 네게 정2품의 품계를 내려 주신대."
다급히 말을 잇는 목소리에 조심스러운 불안이 묻어났다.
"동주(東珠: 북방에서 나는 진주)로 장식한 봉관도 청해 두었어! 나라가 세워진 이래 첩에게 이런 은혜가 내려진 건 네가 처음이야."
미간이 저절로 찌푸려졌다.
"첩? 누가 첩이라는 거야?"
서겸의 말이 뚝 끊겼다.
낯빛이 어두워진 그는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모르는 듯했다.
뒤에 서 있던 아이가 제 어머니의 자리를 지키려는 듯 목청을 높였다.
"아바마마께서 돌아가신 뒤 어마마마께서는 슬픔을 이기지 못하고 은류강에 몸을 던지셨어. 다행히 아버지가 뛰어들어 구해 주셨지. 그런데 물살이 워낙 거세서, 어마마마를 구해 뭍으로 올라오셨을 때는 옷이 대부분 떠내려가 두 분 다 제대로 갖춰 입지 못하셨대."
"우리 백령국에서는 남녀가 맨살을 맞대면 혼인을 해야 해. 그래서 나와 어마마마도 아버지를 따라 도성으로 온 거야. 아까 외조부이신 폐하께서 두 분의 혼인을 허락하셨어."
제2화
"우리 어마마마가 정실이니 네가 시집와도 첩일 뿐이야!"
천진한 아이의 말은 거침이 없다. 그래서 더 아프게 파고들 때가 있다.
시선을 돌려 서겸을 보았다.
"최서겸, 저 말이 사실이야?"
그가 내 손을 꽉 쥐며 조심스레 눈치를 살폈다.
"연서야, 나도 어쩔 수 없었어. 은류강 물살이 워낙 거세서 내가 구하지 않았으면 난영이는 죽었을 거야."
속으로 헛웃음을 삼켰다. 말에도 비웃음이 배어 나왔다.
"물살이 어찌나 거셌으면 두 사람 옷을 죄다 찢어 놓았을까."
그 손을 뿌리쳤다. 그를 바라보는 눈길에 혐오가 묻어났다.
"혼인 서약서를 쓸 때 분명히 말했을 텐데. 우리 집안 여자는 죽어도 첩이 되지 않는다고."
서겸이 눈살을 좁히며 나를 응시했다.
그러고는 내 뒤에서 분주히 움직이는 시녀와 하인들을 보았다.
사흘 뒤로 정해진 혼례를 준비하는 중이었다.
"연서야, 너는 열여섯 꽃다운 나이부터 스물이 넘도록 나를 꼬박 칠 년이나 기다렸어. 나 때문에 부모님 뜻까지 거스르고 혼인도 하지 않았다는 건 도성 사람이라면 다 알아."
"네 이름은 이미 나와 떼어 놓을 수 없게 됐어. 이제 와서 혼약을 깨면 이 도성에서 누가 감히 너를 데려가겠어? 남의 여자를 데려갔다고 비웃음을 살 텐데, 두렵지도 않겠어?"
눈동자가 가늘게 흔들렸다.
한때 그토록 사랑했고, 칠 년이나 애타게 기다린 사람이었다. 내게 이런 말을 하다니.
눈에 맺힌 눈물을 보더니 서겸의 눈에 잠깐 안타까움이 스쳤다.
"연서야, 나를 곤란하게 만들지 마. 난영이가 칠 년 동안 얼마나 고생했는지 너는 몰라. 나라의 평안과 백성들을 위해 화친하러 간 거잖아. 그 정도는 너그럽게 이해해 줄 수 없어?"
바닥에 떨어진 비단을 주운 그가 내 손에 살며시 쥐여 주었다.
"도성에 오자마자 들었어. 너희 집에서 혼례 날짜를 사흘 뒤로 잡았다며. 내가 돌아오기도 전에 그렇게 서두른 건 마음을 바꿔 널 버릴까 봐서잖아."
"걱정하지 마. 나는 은혜를 저버리거나 이리저리 마음을 바꾸는 사내가 아니야. 사흘 뒤, 정실에 준하는 예로 너를 맞아들일게."
눈물이 잦아들고 차가운 웃음이 입가에 걸렸다.
"최서겸, 내가 사흘 뒤에 시집갈 사람이 너라고 누가 그래?"
그가 나를 빤히 보며 잠시 굳었다.
그러다 이내 웃었다.
"연서야, 그런 식으로 내 마음을 떠볼 필요 없어. 백령국에 있던 칠 년 동안 날마다 네 생각을 했어. 해마다 보낸 편지만으로도 내 마음이 전해지지 않았어? 사흘 뒤에 얌전히 기다리고 있어."
말을 마친 서겸은 난영 모자의 손을 잡고 집을 나갔다.
눈을 감자 두 줄기 눈물이 뺨을 타고 흘렀다.
'최서겸, 네 눈에는 난영이가 겪은 칠 년의 고생만 보이지. 그동안 너를 기다리며 내가 얼마나 울었는지는 알아? 그래도 이제 다 끝이야.'
...
이튿날, 어머니와 함께 아버지께 다과를 드리러 태학(太學: 나라에서 세운 최고 교육 기관)에 갔다가 밖에 멈춰 선 공주의 마차를 보았다.
서둘러 강당으로 들어가니 난영이 아이를 데리고 스승을 모시겠다고 찾아와 있었다.
그 스승이 바로 내 아버지였다.
"스승님께서는 제게 처음 글을 가르쳐 주신 분이십니다. 승원이도 문하에서 배울 수 있다면 더 바랄 게 없겠습니다."
"더구나 따님을 참 잘 가르치셨습니다. 빈 혼인 서약서 한 장을 붙들고 칠 년을 기다리다 아무도 데려가지 않는 노처녀가 되어서도 서겸에게 시집가겠다고 하니 말입니다."
"이제 제가 정실이 되었으니, 첩으로라도 들어오겠다는 그 애틋한 마음을 모른 척할 수 있겠습니까?"
노골적인 모욕에 아버지의 꼿꼿하던 몸이 휘청했다.
그런데도 난영은 성에 차지 않는지 말을 이었다.
제3화
"오늘은 아이의 스승을 청하러만 온 것이 아닙니다. 서겸이 저를 백령국까지 데려다주느라 급히 도성을 떠나면서 예물조차 보내지 않았다 들었습니다. 참으로 옳지 못한 일이었습니다."
"이제 제가 정실이니 부군께서 첩을 들이실 때 쓸 예물도 제가 대신 챙겨야 하지 않겠습니까?"
난영이 손뼉을 치자 하인들이 물건을 들고 나와 아버지의 책상 위에 하나씩 내려놓았다.
나무 상자 두 개 안에서는 검은 집오리 두 마리가 파닥거리고 있었다.
아버지의 낯빛이 굳어졌다. 강당에는 아끼는 제자 수십 명도 앉아 있었다.
문간에 선 나는 피가 거꾸로 솟는 듯한 기분에 그대로 얼어붙었다.
"정실을 맞을 때는 기러기를 예물로 보낸다 들었습니다만, 첩을 들이는 데야 그리 격식을 차릴 필요가 있겠습니까? 오리 두 마리라도 멀리서 보면 기러기인 줄 알지 않겠습니까?"
아버지는 "예기"(禮記)를 손에 든 채 우두커니 서 계셨다.
낯빛이 창백하게 질리고 입술이 떨렸다. 금방이라도 쓰러질 것 같았다.
대대로 글을 배운 집안에서 자라 겸손히 예를 지키셨다. 그런 아버지께서 언제 이토록 모욕을 당해 보셨겠는가.
그때 난영이 아들 서승원을 살짝 떠밀었다.
"자, 승원아. 스승님께 인사드려야지."
아이는 신호라도 받은 듯했다.
옆에 있던 학생의 벼루를 와락 집어 들더니 아버지께 힘껏 던졌다.
"퉤! 이런 사람한테는 안 배워! 딸이 칠 년이나 기다려서 우리 아버지 첩이 되겠다는데, 그런 딸을 가르친 사람이 남을 가르칠 자격이나 있어?"
퍽, 벼루가 아버지의 이마를 때렸다.
이어 바닥으로 떨어지며 둔탁한 소리를 냈다.
이마에서 피가 줄줄 흘러내렸다.
"아버지!"
더는 두고 볼 수 없어 달려가 아버지를 부축했다.
"서난영, 대체 무엇을 하시려는 겁니까?"
그런데 난영은 몹시 당황한 얼굴을 했다.
"스승님, 노여워하지 마십시오! 아이가 말을 함부로 했습니다. 제가 대신 사죄드리겠습니다."
말을 마치자마자 책상 모서리를 짚고 천천히 무릎을 꿇었다.
"저는 우리 백성들을 위해 백령국으로 시집갔습니다. 아들을 낳고도 제대로 가르치지 못한 것은 제 잘못이니, 제가 아이 대신 사죄드리겠습니다!"
책을 움켜쥔 아버지의 어깨가 가늘게 떨렸다.
"오늘 온 까닭이 이것뿐은 아닙니다. 저와 서겸이 혼인을 맺었으니, 나라에 이름난 명필이신 스승님께 글씨 한 폭을 청하고 싶습니다."
"저희를 축복해 주시는 뜻으로 이 현판에 '아름다운 인연'이라 써 주십시오."
난영이 손가락을 움직이자 몇 사람이 커다란 현판을 들고 들어왔다.
곁의 시녀가 금빛 먹과 붓을 아버지 앞에 내밀었다.
"글씨를 거절하신다면, 제가 백령국에서 돌아온 것이 못마땅하시다는 뜻으로 알겠습니다."
아버지의 손이 떨렸다. 치욕에 목이 메는 듯했다.
붓을 받으려 손을 내미시기에 내가 먼저 가로받았다.
아버지께서 그 글씨를 써 주셨다가는 곧게 지켜 온 명예가 무너질 판이었다.
"공주마마, 아버지께서는 연로하셔서 글씨를 제대로 쓰지 못하실 듯합니다. 딸인 제가 대신 쓰면 어떻겠습니까?"
"아버지 글씨에는 못 미치겠지만, 부연서의 이름이 들어가면 최서겸과 더 떳떳하게 혼례를 치르실 수 있지 않겠습니까?"
난영이 잠시 생각에 잠겼다.
그래, 애초에 모욕하려던 상대는 연서였다.
직접 두 사람의 금실을 축복하는 글을 쓰고 제 이름까지 남긴다면 한층 더 모욕적일 터였다.
"그리하게."
난영은 흔쾌히 허락했다.
붓에 먹을 묻혀 거침없이 "아름다운 인연"을 큼직하게 써 내려갔다.
난영은 의기양양하게 현판을 들고 태학을 떠났다.
아버지를 부축한 채 후회에 가슴이 저렸다.
'진작 말씀을 듣고 혼약을 깼더라면, 아버지께서 나 때문에 이런 모욕을 당하시지는 않았을 텐데!'
제4화
아버지께서는 이틀간 쉬겠다고 알리셨다. 우리 세 식구가 집으로 돌아온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서겸이 성난 기세로 들이닥쳤다.
"연서야, 승원이는 어린아이인데 왜 괴롭힌 거야?"
영문을 몰라 그를 바라보았다. 몸도 마음도 지칠 대로 지쳐 있었다.
"최서겸, 대체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오늘 난영이가 승원이를 데리고 간 건 네 아버님을 존경해서 가르침을 청하려던 것뿐이야. 다른 뜻은 없었어!"
"그런데 왜 아이에게 벼루를 던졌어? 재빨리 피하지 않았으면 크게 다쳤을 거야. 지금도 놀라서 고열에 경련까지 일으키고 있어!"
숨을 깊이 들이마셨다. 세상에 난영처럼 뻔뻔한 사람이 또 있을까.
"네 혼수에 신의가 빚은 영수단이 있었지. 경련을 멎게 하고 온갖 병을 고친다던데, 그걸 내게 줘. 잘못을 뉘우치고 만회하는 셈 치고."
기가 막힐 따름이었다.
그런데 문득 눈빛이 달라졌다. 나는 말투를 누그러뜨렸다.
"영수단을 빌려줄 수는 있어. 대신 차용증에 네 이름을 적고 관인까지 찍어야 해."
서겸의 낯빛이 살짝 달라졌다.
"연서야, 관인을 장난으로 찍을 수는 없잖아."
무심한 얼굴로 답했다.
"서승원의 병을 고치려고 진심으로 약을 구하는 거라면 차용증 한 장이 뭐가 대수야? 설마 정4품 대장군씩이나 되면서 영수단 한 알 값도 못 갚겠어?"
자존심을 건드리자 서겸은 예상대로 넘어왔다.
"종이와 붓을 가져와라!"
차용증을 쓰고 관인을 찍는 것까지 눈앞에서 지켜본 뒤에야 시녀에게 영수단을 가져다주라 일렀다.
서겸은 흡족한 얼굴로 돌아갔다.
반면 시녀는 근심을 감추지 못했다.
"아씨, 세상에 단 하나뿐인 영수단을 정말 그렇게 내주셔도 되는 겁니까?"
빙긋 웃었다.
"영수단은 십 년이 지나면 효력이 사라지는데, 그 기한이 진작 지났어. 지금은 평범한 약환일 뿐이니 그걸로 차용증을 얻었으면 오히려 남는 장사지."
차용증을 움켜쥔 채 눈빛을 가라앉혔다.
혼례 날, 들뜬 마음으로 혼례복을 갈아입고 집을 나섰다.
그런데 문밖에는 혼례복을 입은 서겸이 나를 맞을 행렬을 거느리고 서 있었다.
가마가 멈추자 난영이 내렸다. 태도부터 정실을 자처하고 있었다.
"아씨, 오늘 첩으로 들어오는 날이니 부군과 내가 함께 마중을 왔네."
일부러 사람들에게 그 현판을 들려 구경꾼들 앞을 지나게 했다.
"저 아씨도 가엾구려."
"부군을 칠 년이나 기다렸다가 남에게 빼앗기고, 첩으로 들어가면서도 정실에게 '아름다운 인연'이라는 현판까지 바치다니."
"저보다 더한 망신이 어디 있겠소."
"나라면 차라리 호수에 몸을 던졌을 거요. 저 집안에 시집갈 낯이 어디 있겠소?"
...
주변의 수군거림을 들으며 난영이 흡족하게 입꼬리를 올렸다.
서겸의 표정이 살짝 굳었다. 가까이 다가와 내 소매를 가볍게 잡아당겼다.
"연서야, 여기서 그만 망신당하고 어서 가마에 올라. 나와 함께 돌아가자."
그 손을 뿌리쳤다.
"최서겸, 부끄러운 줄도 몰라? 네 혼인 서약서는 이미 태웠어. 오늘 내가 시집갈 사람은 네가 아니야!"
"여기서 체면 따질 생각 말고 내게 빚진 돈이나 언제 갚을지 생각해."
차용증을 꺼내 사람들 앞에 펼쳐 보였다.
서겸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부연서, 혼례 시간이 다 됐는데 아직도 그런 수작으로 날 떠보려는 거야? 계속 고집을 부리면 집안의 법도에 따라 벌할 테니 그리 알아!"
그때 멀리서 다급한 말발굽 소리가 가까워졌다.
"누가 감히 집안의 법도로 내 왕비를 벌하겠다는 건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