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대의 마음이 변했다면

GoodNovel new 완결

나는 장생자지만, 찐빵 하나로 소연후에게 인과의 빚을 졌다. 그 빚을 갚고 집으로 돌아가려면 그의 소원 백 가지를 모두 들어줘야 했다. 소연후가 처음으로 빈 소원은 내가 그의 여인이 되는 것이었다. 빚을 갚기 위해 나는 이름도 지위도 없이 그의 곁에 머물며, 그가 진정한 사내가 되도록 이끌었다. 그 뒤 삼 년 동안 그가 빈 소원은 하나같이 내가 조금 더 웃는 것이었다. 후야가 된 소연후는 온 성에 등불을 밝히고, 반짝이는 눈으로 우리 둘이 영원히 헤어지지 않게 해 달라며 아흔여섯 번째 소원을 빌었다. 하지만 며칠 지나지 않아 후부에서 내 흔적을 모조리 지우고 나를 내쫓았다. 나는 망연히 눈 속에 서 있었다. 그때 소연후는 나를 아랑곳하지 않고 벗들에게 태연히 말했다. "절대 화정이에게 내가 다른 여인에게 고백한 적 있다는 걸 알리지 말게. 자네들도 알다시피 나는 어릴 적부터 화정이를 마음에 품어 왔네." "내가 아직 어렸을 적 그 애가 화친길에 오르지만 않았어도, 그 애 대신 곁에 둘 여인을 찾을 일은 없었을 걸세." "이제 이웃 나라 황제도 세상을 떠났고, 내가 그 애가 죽음을 가장하고 돌아오도록 도왔으니 이번에는 반드시 부인으로 맞아 여한을 남기지 않을 걸세."

챕터 (1)

1화

나는 장생자지만, 찐빵 하나로 소연후에게 인과의 빚을 졌다. 그 빚을 갚고 집으로 돌아가려면 그의 소원 백 가지를 모두 들어줘야 했다. 소연후가 처음으로 빈 소원은 내가 그의 여인이 되는 것이었다. 빚을 갚기 위해 나는 이름도 지위도 없이 그의 곁에 머물며, 그가 진정한 사내가 되도록 이끌었다. 그 뒤 삼 년 동안 그가 빈 소원은 하나같이 내가 조금 더 웃는 것이었다. 후야가 된 소연후는 온 성에 등불을 밝히고, 반짝이는 눈으로 우리 둘이 영원히 헤어지지 않게 해 달라며 아흔여섯 번째 소원을 빌었다. 하지만 며칠 지나지 않아 후부에서 내 흔적을 모조리 지우고 나를 내쫓았다. 나는 망연히 눈 속에 서 있었다. 그때 소연후는 나를 아랑곳하지 않고 벗들에게 태연히 말했다. "절대 화정이에게 내가 다른 여인에게 고백한 적 있다는 걸 알리지 말게. 자네들도 알다시피 나는 어릴 적부터 화정이를 마음에 품어 왔네." "내가 아직 어렸을 적 그 애가 화친길에 오르지만 않았어도, 그 애 대신 곁에 둘 여인을 찾을 일은 없었을 걸세." "이제 이웃 나라 황제도 세상을 떠났고, 내가 그 애가 죽음을 가장하고 돌아오도록 도왔으니 이번에는 반드시 부인으로 맞아 여한을 남기지 않을 걸세." 제1화 "그럼 강시월은 어쩔 텐가?" "그래도 자네와 삼 년이나 함께했네. 자네를 그토록 사랑하는데, 정말 이대로 내칠 셈인가?" 세자인 배서준은 못마땅한 기색으로 미간을 찌푸리며 어깨에 두른 비단 자락을 벗어 내게 둘러 주었다. 하지만 소연후는 차갑게 말했다. "진짜 주인이 돌아왔으니 대역은 멀리 꺼져야지!" "안쓰럽다면 자네가 데려가게." 무심한 말이 떨어지자 주위가 술렁였다. 배서준이 나를 좋아해 소연후와 의형제를 맺었다는 건 여기 모인 모두가 아는 일이었다. 예전에는 배서준이 나를 한 번만 더 바라봐도 소연후는 그에게 나에게서 떨어져라고 사납게 경고하곤 했다. 하지만 삼공주 송화정이 돌아온 뒤로는 조금도 신경 쓰지 않았다. 애초에 나는 그저 대역일 뿐이었으니까. 도령들이 입을 다문 사이, 배서준이 돌아서 내게 손을 내밀었다. "소월 아씨, 나와 함께 가겠소?" 배서준의 눈에는 애틋함이 가득했지만, 곁에 있던 소연후는 끝내 비웃음을 터뜨렸다. "내기라도 해 볼까?" "강시월은 죽도록 나를 사랑해서 자네를 따라가지 않을 거라는 데 걸겠네." 소연후의 눈빛에는 장난기가 가득한 것이 예전의 깊은 정은 찾아볼 수 없었다. 나는 가슴속 쓰라림을 삼키며 그가 둘러 준 비단 자락을 벗어 돌려주었다. 내 뜻을 알아챈 배서준은 미간을 좁힌 채 물러나며 한마디 덧붙였다. "실례했소." 눈발이 흩날리는 가운데 소연후가 웃었다. "네가 날 떠나지 못할 줄 알았다." "하지만 강시월, 이제 네게 질렸으니 썩 꺼지거라." 말을 마친 소연후는 막 경성에 돌아온 정인만 생각하며 마차에 오르려 했다. 나는 빠르게 소연후의 소매를 붙잡고 올려다보며 물었다. "며칠 전만 해도 영원히 곁에 있어 달라고 소원을 비셨잖습니까. 그런데 이제 와 저더러 꺼지라 하시니, 이걸 후야께서 비신 아흔일곱 번째 소원으로 쳐도 되겠습니까?" 내 말에 소연후가 차갑게 돌아섰다. "너한테 질렸는데, 내가 어찌 백 가지 은혜 갚기 놀음에 장단을 맞춰 주겠느냐?" 소연후는 내 손에 붙잡힌 소매를 빼내며 혐오감을 드러냈다. "네 말대로 아직 아흔일곱 번째다. 백 가지를 다 채우려면 앞으로도 내 앞에 나타나야 하지 않겠느냐?" "그런 허황된 놀음에 어울려 줄 겨를은 없다." 나는 진지한 눈빛으로 소연후의 소매를 다시 붙잡았다. "이건 놀음이 아닙니다." 내가 장생자라는 사실을 아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원래 나는 일족과 함께 백 살까지 살아야 속세에 나설 수 있었지만, 열여섯 살 때 눈사태로 일족과 헤어졌다. 계례도 치르지 못한 열여섯 살의 나는 며칠을 굶은 채 눈더미를 헤치고 나왔지만, 처음 빛을 마주한 순간 굶주림에 정신을 잃었다. 제2화 정신이 몽롱한 가운데 나는 소연후가 건넨 찐빵을 받아먹었다. 그 일로 나는 그에게 인과의 빚을 졌다. 족장은 장생자는 백 살이 되어야 성인이 되며, 그전에는 바깥세상과 인연을 맺으면 일족으로 돌아갈 길을 잃는다고 늘 일렀다. 그 순간 나와 일족을 잇던 인연이 끊어져, 소연후의 소원 백 가지를 모두 들어줘야만 일족으로 돌아갈 수 있게 되었다. 나는 그에게 물었다. "소원 백 가지를 빌어 주실 수 있습니까? 은혜를 갚고 싶습니다." 그날 소연후는 쓸쓸한 눈으로 나를 바라보며 첫 소원을 빌었다. "내 여인이 되어라." 나는 그 뜻을 알지 못했지만, 인과를 매듭짓기 위해 지위도 명분도 없이 소연후의 곁에 머물며 그가 풋내를 벗고 진정한 사내가 되도록 이끌었다. 진정한 사내가 된 뒤, 소연후는 밤마다 나와 정을 나누고 나를 지극히 아꼈다. 그 뒤 삼 년 동안 소연후가 빈 소원은 하나같이 내가 자신을 향해 웃어 주는 것이었다. 사람들은 모두 소연후가 나를 지극히 사랑한다고 했다. 후야가 된 소연후는 온 성에 등불을 밝히고, 우리가 영원히 헤어지지 않게 해 달라고 소원을 빌었다. 나는 그 소원을 받아들였지만, 소연후의 바람에 진심이 담겨 있지 않다는 걸 알고 있었다. 인간 세상의 사랑은 몰라도, 나는 소연후가 나를 사랑한 적 없다는 것만은 알고 있었다. 실제로 며칠도 지나지 않아 소연후는 후부에서 내 흔적을 모조리 지우고 나를 내쫓으려 했다. 나는 소연후의 눈을 똑바로 바라보며 단호히 말했다. "원하신다면 방금 하신 말씀을 아흔일곱 번째 소원으로 삼겠습니다." "남은 세 가지 소원까지 들어드리고 나면, 그때는 당신 앞에서 영영 사라지겠습니다." 내가 고집을 꺾지 않자 소연후의 눈에 짜증이 스쳤다. "그럼 이걸 아흔일곱 번째 소원으로 빌겠다. 이제 내 소매를 놓겠느냐?" "화정이가 기다리고 있다." 두 마디를 하는 소연후 눈빛은 확연히 달랐다. 곁에 있던 벗들은 안쓰러운 듯 한숨을 내쉬었다. 내가 상심해 눈물을 흘리리라 여긴 모양이었다. 그동안 내가 소연후의 뜻이라면 무엇이든 따르는 모습을 보아 온 터라, 내가 그를 지극히 사랑한다고 생각한 것이다. 하지만 나는 손을 놓고, 구겨진 소연후의 소매를 가볍게 쓸어 폈다. "그 소원, 들어드리겠습니다." "어서 정인을 만나러 가십시오. 후부 앞에서 기다리고 있을 테니 돌아오시면 남은 세 가지 소원을 비십시오." 내가 웃으며 엉뚱한 말을 하자 그들은 난감한 듯 고개를 저었다. 하지만 소연후는 마음이 급했던지 마차에 올라 뒤도 돌아보지 않았다. 마차가 멀어질수록 입안에 비릿한 피 맛이 번졌다. 사흘 전만 해도 소연후는 나와 영원히 헤어지지 않게 해 달라고 빌었는데, 이제는 나와 영영 헤어지기를 바라고 있었다. 두 소원이 서로 부딪쳐 반작용이 일어난 탓에, 가슴속이 끓어오르듯 아팠다. 부귀한 집안에서 태어난 소연후는 좀처럼 소원을 빌지 않아, 내가 삼 년이나 졸랐건만 아직 네 가지나 남아 있었다. 이제 소원 하나를 더 이룰 수 있으니 기뻐해야 마땅했지만 왠지 씁쓸함이 번졌다. 문 앞을 지키던 호위는 멍하니 서 있는 나를 보고 다가와 타일렀다. "시월 아씨, 집을 떠나신 지 벌써 삼 년입니다. 가족들도 아씨를 많이 그리워하실 테니 어서 돌아가십시오." "아씨와 후야는 애초에 같은 세상 사람이 아닙니다." 호위는 내가 더는 기다리지 않기를 바랐다. 같은 시각, 골목 끝에서 한 여인이 웃고 있었다. 눈발이 속눈썹을 적시고 울음에 목이 메었지만, 나는 고개를 저었다. "나는 갈 수 없다." "후야를 기다려야 한다." 마지막 세 가지 소원을 이루어주지 못하면 나는 집으로 돌아갈 수 없었다. 결국 호위는 제자리로 돌아가 계속 후부를 지켰고, 나는 얇은 치맛자락을 여미고 구석에 웅크려 앉았다. 그때 배서준이 다시 찾아왔다. 그는 다시 내 어깨에 비단 자락을 둘러 주려 했지만, 나는 또 거절했다. 그의 시종은 내가 호의를 몰라본다며 나무랐다. 배서준은 진지한 얼굴로 말했다. "시월 아씨, 소연후는 좋은 사내가 아니니 내 말을 믿어 주게. 폐하께서 부르셔서 강남으로 가야 하네. 비단 자락은 여기 두고 갈 테니 추우면 걸치시게." 제3화 "도움이 필요하면 이 비단 자락을 들고 내 저택으로 오시게. 필요한 건 내가 모두 마련해 두었네." 말을 마친 배서준은 돌아서 떠났다. 나는 여전히 그 자리에 웅크린 채 두툼한 비단 자락에는 끝내 손도 대지 않았다. 몹시 추웠지만, 나는 집으로 돌아가야 했다. 하여 이 은혜를 받을 수도, 더는 누구에게도 빚지고 싶지 않았다. 배서준이 떠난 뒤에도 나는 날이 저물 때까지 후부의 대문 앞을 지켰다. 집집마다 불이 꺼져 갔지만, 소연후는 끝내 돌아오지 않았다. 소연후를 따라갔던 시종이 은표를 챙기러 급히 돌아와 나를 비웃듯 말했다. "주제 파악이나 하시지요." "우리 후야께서는 앞으로 며칠간 삼공주와 객잔에 머무실 테니, 돌아오실 리 없지요." "삼공주를 위해 온 성에 불꽃놀이를 하고 천등을 띄우라며 돈을 가져오라 하셨습니다." "게다가 유등까지 띄우실 거랍니다." "어느 쪽이 더 중한지 이제 아시겠지요?" 시종은 턱을 치켜들고 돌아섰다. 고개를 들자 과연 하늘에는 불꽃이 잇달아 터지고, 그 사이로 수많은 천등이 천천히 떠올랐다. 몸을 일으키는 순간 어지럼이 일었고, 눈앞에 환하게 웃는 소연후의 얼굴이 떠올랐다. "시월아, 너를 위해 온 경성에 불꽃놀이를 벌였으니 어서 가서 보자꾸나." 나는 소연후를 따라 한 발 내디뎠지만, 정신을 차리고 보니 다리 위에는 소연후가 한 여인을 품에 안은 채 유등을 물에 띄우고 있었다. 소연후의 눈빛은 다정하고 애틋해, 세상에 오직 송화정밖에 없는 듯했다. 내 시선이 따가웠는지 소연후는 내 쪽으로 시선을 돌리더니, 곧장 눈빛에서 온기를 거두었다. 그러다 곁의 여인에게 무언가 속삭인 뒤 내게 다가와 내 손목을 꽉 움켜쥐고 쏘아붙였다. "내가 멀리 꺼지라고 하지 않았느냐? 헌데 왜 여기에 나타난 거지?" 손목에 통증이 번졌고, 소연후는 나를 멀리 밀쳐냈다. 송화정이 나를 보기라도 할까 봐 소연후가 다시 경고하려던 순간, 여인이 먼저 그의 팔에 팔짱을 끼며 눈시울을 붉혔다. "후야, 꼭 그렇게까지 하실 필요는 없어요. 경성에 왔을 때 전 다 알게 되었어요." "강시월이 저를 닮아 후야 곁에서 삼 년 동안 대역을 했다는 것도, 제가 계례를 올린 뒤 삼 년 동안 후야께서 부인도 첩도 들이지 않으셨다는 것도요." "대역을 곁에 두신 걸 탓하는 건 아니에요. 다만 강시월도 참 가여워서요." "저렇게 얇게 입고 있는 걸 보니 얼마나 안쓰러운지요." 송화정은 차마 못 보겠다는 듯 안타까운 눈빛으로 말을 이었다. "강시월이 자존심이 세서 남의 도움을 받지 않으려 한다는 것도 알아요. 지난 삼 년 동안 후야 돈은 한 푼도 쓰지 않았다면서요?" "아까 후야와 띄운 유등에 글귀를 적는 걸 깜빡했어요. 강시월, 넌 헤엄을 잘 치니 대신 건져줄 수 있겠느냐? 보수로 은 열 냥을 주겠다. 비단 자락 한 벌은 살 수 있겠지?" 송화정의 눈빛은 티 없이 맑아, 정말 나를 도우려는 듯했다. 하지만 겉으로만 그럴 뿐, 나를 난처하게 만들어 눈물짓게 하려는 속셈이었다. 소연후는 심화정의 눈물을 다정히 닦아 주며 한숨을 내쉬었다. "화정이, 그대는 참 마음씨가 곱구려." 정말 선한 마음이었다면, 내 얼굴이 창백한데도 한겨울 호수에 들어가 달라고 했을까? 한겨울 호숫물은 얼음장처럼 차가워, 들어갔다간 틀림없이 병이 날 터였다. 나는 물에 들어가고 싶지 않았다. 몸을 돌려 떠나려 하자 소연후가 내 손을 붙잡고 차갑게 말했다. "은혜를 갚겠다 하지 않았느냐? 내 아흔여덟 번째 소원은 네가 화정이의 부탁을 들어 유등을 건져 오는 것이다." 소연후는 내게 경고하듯 몸을 바짝 기울였다. "물에 들어가지 않으면 남은 세 가지 소원은 영영 이룰 수 없을 줄 알거라." 소연후는 내가 은혜를 갚으려는 게 아니라 자신에게 매달리려 한다고 굳게 믿었고, 그 믿음으로 내 모든 것을 손아귀에 쥐고 흔들었다. 소연후는 송화정을 슬프게 하고 싶지 않아 했다. 하지만 나는 일 년 전, 소연후를 기쁘게 해 주려 연밥을 따러 물에 들어갔다가 들은 꾸지람을 아직도 기억했다. "네게 무슨 일이라도 생기는 건 원치 않는다." 그때는 뙤약볕이 내리쬐는 날이었는데도 그랬다. 소원이라는 말에 송화정의 눈썹이 미세하게 움직였다. "그럼 강시월은 정말 은혜만 갚으려 했던 건가요?" 제4화 "후야께서 강시월이 웃어 주기만을 바라며 여러 번 소원을 비셨다면서요? 강시월을 참 아끼시나 보네요." 송화정은 장난스레 말을 건넸지만, 눈물은 다시 뺨을 타고 흘렀다. 소연후는 얼른 손을 거두고 난처하면서도 다정하게 송화정을 달랬다. "강시월이 웃을 때 그대와 더 닮아 보였기에 그런 소원을 빈 것이오." "화정이, 그대는 알지 않소? 내 마음엔 처음부터 끝까지 그대뿐이오." 그 말에 송화정의 뺨이 붉어졌다. 나는 그 자리에 선 채 아무런 내색도 하지 않았다. 소연후가 줄곧 나를 통해 다른 이를 바라보고 있었다는 건 진작 알았지만, 삼 년간 이어진 편애가 다른 이에게 향하자 마음 한구석이 불편했다. 나는 망설임 없이 호수에 뛰어들어 뼛속까지 파고드는 추위를 견디며 유등을 건져 올렸다. 이제 두 가지 소원만 남았다. 물에서 나온 나는 송화정의 허리춤에 달린 주머니를 받아 은 열 냥을 꺼내 세었다. "후야, 아흔여덟 번째 소원도 들어드렸습니다." 말을 마친 나는 그들을 돌아보지 않고 곧장 의원에 들러 약을 지어 마신 후 객잔으로 돌아와 꼬박 하루를 몽롱하게 누워 있었다. 몸이 나으면 소연후를 찾아가 남은 두 소원을 마저 들어드릴 생각이었지만, 후부 사람들이 먼저 찾아왔다. "후야께서 아흔아홉 번째 소원으로 기루에서 춤을 추라고 하십니다." 이날, 송화정의 고집으로 두 사람은 기루에 가 한바탕 놀았는데, 하필 송화정이 강호의 거물에게 밉보이고 말았다. 황실의 권세로도 강호의 거물을 함부로 누를 수 없던 터라, 그의 노여움을 풀려면 송화정은 기루에서 가장 이름난 기녀의 옷차림으로 춤을 춰야 했다. 송화정의 귀환을 숨겨야 했던 소연후는 그녀가 모욕당하는 것도 원치 않았다. "그러니까 나더러 대신 춤을 추라는 말이냐?" 여인이 억지로 요염한 춤을 춰야 하다니, 이보다 더한 치욕이 또 있을까. 가슴속이 서러움으로 가득했다. 시종도 이 부탁이 부당하다는 걸 아는지 난처한 기색을 보였다. 그럼에도 나는 승낙했다. 이 소원을 들어주면 마지막 하나만 남고, 그것까지 마치면 집으로 돌아갈 수 있었다... 기루에 들어선 나는 그곳에서 가장 이름난 기녀의 옷으로 갈아입고, 귓가에 들려오는 상스러운 말들은 못 들은 척한 채 춤을 끝까지 추었다. 무대에서 내려오자 소연후가 드물게 미안한 기색을 내비쳤다. "앞으로는 너를 쫓아내지 않겠다." "나에 대한 네 마음은 알지만, 화정이에게 평생 첩을 들이지 않겠다고 약조했으니 따로 거처를 마련해 외실로 삼아주마." 소연후는 마치 선심이라도 쓰듯 말했다. 나는 소연후를 밀어내고 담담히 말했다. "필요 없습니다." 처음으로 소연후를 거절하자 소연후는 얼굴이 굳었다. "잘 생각해라. 거절하면 다시는 기회를 주지 않겠다." 소연후는 내가 후회하리라 여겼겠지만, 나는 걸음을 멈추지 않았다. 내가 바란 건 처음부터 집으로 돌아가는 것뿐이었다. ... 소연후의 아흔일곱 번째 소원은 나더러 멀리 떠나라는 것이었다. 하지만 남은 소원을 이루려면 소연후 곁에 있어야 했기에, 며칠 동안은 어쩔 수 없이 가까이 지냈다. 그러자 반작용이 다시 찾아왔다. 나는 객잔에 틀어박혀 쓴 탕약을 마시면서도, 마지막 소원만 남았다는 서신을 매일 한 통씩 보냈다. 하지만 소연후는 송화정의 새 신분을 마련하고 혼인할 채비를 하는 데만 여념이 없어 서신들을 읽지 않은 듯했다. 며칠이 지나도록 답이 없자 참다못한 나는 직접 찾아가 물으려 했지만, 소연후는 번번이 나를 피했다. 내가 먼저 외실로 들여 달라고 청하기를 바라며 일부러 피한다는 것도 알고 있었다. 그렇게 서로 팽팽히 맞선 채 반달이 지났고, 이웃 나라 사신들이 경성에 들어오자 소연후가 먼저 나를 찾아왔다. "화정이가 죽음을 가장해 경성으로 돌아온 사실이 드러나 폐하께서 크게 노하셨다." "게다가 이웃 나라 사신들은 화정이를 내놓으라고 요구하고 있다." "내 마지막 소원은 네가 삼공주를 대신해 벌받고 사신들을 따라 떠나는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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