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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그 가짜 연애에서 빠져줄게
남자친구 주승훈은 교통사고에서 깨어난 뒤 일시적인 기억상실에 걸렸다. 그런데 주승훈은 내 친구 임지아를 자신의 약혼녀로 착각했다. 나는 주승훈이 또 충격을 받을까 봐 어쩔 수 없이 임지아와 신분을 바꿔치기했다. 우리는 서로 약속했다. 그저 잠시만 서로의 신분을 바꿔 연기할 뿐, 그 이상의 관계는 갖지 않기로. 주승훈이 기억을 되찾으면 모든 것을 원래대로 돌려놓기로 했다. 그런데 반년이 지나도록 주승훈은 기억이 돌아올 기미가 조금도 보이지 않았다. 그러던 어느 날, 우연히 인터넷을 보다가 같은 지역에서 올라온 한 사연을 발견했다. [교통사고로 기억을 잃고 여자친구를 다른 사람으로 착각했는데, 이제는 그 여자를 사랑하게 됐습니다. 원래 여자친구에게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요?] 댓글창에서 가장 많은 추천을 받은 답변에는 이런 조언이 달려 있었다. [당연히 계속 기억상실인 척해야죠! 앞으로 계속 밀어붙일 수도 있고, 물러날 길도 확보할 수 있잖아요. 나중에 후회하더라도 그때 가서 이제 막 기억이 돌아왔다고 하면 되고요.] 그리고 그 댓글에는 작성자가 ‘좋아요’를 눌렀다는 표시가 남아 있었다. 나는 고개를 들었다. 마침 주승훈과 임지아가 집으로 돌아왔다. 주승훈은 장을 본 봉투 몇 개를 손에 든 채 임지아의 뒤를 따라 들어왔다. 임지아를 바라보는 주승훈의 눈에는 애정이 가득했다. 알고 보니 이 가짜 연극을 주승훈은 이미 진짜로 받아들이고 있었다.
챕터 (1)
1화
남자친구 주승훈은 교통사고에서 깨어난 뒤 일시적인 기억상실에 걸렸다.
그런데 주승훈은 내 친구 임지아를 자신의 약혼녀로 착각했다.
나는 주승훈이 또 충격을 받을까 봐 어쩔 수 없이 임지아와 신분을 바꿔치기했다.
우리는 서로 약속했다.
그저 잠시만 서로의 신분을 바꿔 연기할 뿐, 그 이상의 관계는 갖지 않기로.
주승훈이 기억을 되찾으면 모든 것을 원래대로 돌려놓기로 했다.
그런데 반년이 지나도록 주승훈은 기억이 돌아올 기미가 조금도 보이지 않았다.
그러던 어느 날, 우연히 인터넷을 보다가 같은 지역에서 올라온 한 사연을 발견했다.
[교통사고로 기억을 잃고 여자친구를 다른 사람으로 착각했는데, 이제는 그 여자를 사랑하게 됐습니다. 원래 여자친구에게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요?]
댓글창에서 가장 많은 추천을 받은 답변에는 이런 조언이 달려 있었다.
[당연히 계속 기억상실인 척해야죠! 앞으로 계속 밀어붙일 수도 있고, 물러날 길도 확보할 수 있잖아요. 나중에 후회하더라도 그때 가서 이제 막 기억이 돌아왔다고 하면 되고요.]
그리고 그 댓글에는 작성자가 ‘좋아요’를 눌렀다는 표시가 남아 있었다.
나는 고개를 들었다.
마침 주승훈과 임지아가 집으로 돌아왔다.
주승훈은 장을 본 봉투 몇 개를 손에 든 채 임지아의 뒤를 따라 들어왔다.
임지아를 바라보는 주승훈의 눈에는 애정이 가득했다.
알고 보니 이 가짜 연극을 주승훈은 이미 진짜로 받아들이고 있었다.
제1화
“가연아, 오늘은 어떻게 이렇게 일찍 퇴근했어?”
“나랑 승훈이가 방금 마트에서 연근 사 왔어. 네가 제일 좋아하는 연근 갈비탕 끓여줄까?”
주승훈이 임지아의 뒤를 따라서 들어왔다.
주승훈은 예의 바르게 내게 고개를 한 번 끄덕이더니 그대로 주방으로 들어갔다.
주승훈이 기억을 잃은 뒤, 그와 떨어지고 싶지 않았던 나는 어쩔 수 없이 주승훈과 임지아의 집에 얹혀사는 손님이 되었다.
나는 주승훈의 진짜 여자친구였다.
그런데 매일 다른 여자에게 지극정성으로 잘해주는 그 모습을 질투하면서 지켜봐야 했다.
눈앞에서 두 사람이 손을 잡고 서로를 끌어안을 때마다 가슴을 칼로 도려내는 것처럼 아팠다.
그럴 때마다 나는 속으로 몇 번이고 스스로를 달랬다.
주승훈이 기억만 되찾으면 모든 것이 다시 제자리로 돌아올 거라고.
그렇게 반년을 속으로 끙끙 앓으면서 버텨왔다.
하지만 주승훈은 끝내 기억을 되찾지 못했다.
그리고 기다리고 있던 내게 돌아온 것은, 주승훈이 임지아에게 마음을 줬다는 청천벽력 같은 소식이었다.
임지아는 내 시선을 따라 주방을 바라보다가 바쁘게 움직이는 주승훈을 발견했다.
그러고는 미안한 듯 목소리를 낮춰서 내 귓가에 조용히 말했다.
“미안해.”
“내가 무능해서 승훈이가 아직 기억을 못 찾았어.”
나는 고개를 숙이고 쓴웃음을 지었다.
임지아는 모른다.
잠든 척하는 사람은 영원히 깨울 수 없다는 걸.
“하지만 걱정하지 마.”
“내가 잘 지켜볼 테니까, 밖에서 다른 여자한테 한눈파는 일은 없게 할게.”
나는 짧게 대답했다.
“그래.”
하지만 속은 쓰디쓰기만 했다.
“나 그냥 잠깐 물건 가지러 온 거야. 조금 있다가 다시 나가야 해.”
마침 주승훈이 임지아에게 주방으로 와서 도와달라고 했다.
그러자 임지아는 기다렸다는 듯이 얼른 입을 열었다.
“그럼 너 먼저 다녀와. 돌아오면 맛있는 저녁 먹을 수 있을 거야.”
나는 그 자리에 그대로 서 있었다.
주방에서는 임지아가 마늘을 다듬은 손을 주승훈의 코앞에 내밀고 있었다.
“한번 맡아봐. 내 손에서 마늘 냄새나?”
주승훈은 임지아의 손가락에 살짝 입을 맞추며 웃었다.
“안 나. 너한테는 좋은 냄새만 나는데?”
두 사람은 웃으면서 장난을 쳤다.
누가 봐도 진짜 연인 같았다.
눈앞의 모든 것이 내가 꿈꾸던 결혼 생활과 조금도 다르지 않았다.
단지 그 장면의 여주인공이 내가 아니었을 뿐이다.
아마 내가 이미 나간 줄 알았는지 주승훈이 갑자기 무심코 임지아에게 물었다.
“허가연은 우리 집에 산 지도 반년이나 됐는데, 아직도 집을 못 구한 거야?”
임지아가 주승훈의 질문에 잠시 말을 잇지 못하다가 더듬거리며 대답했다.
“아직 못 구했어.”
“여자 혼자 밖에서 살면 위험하기도 하고, 요즘 집값도 비싸잖아.”
“우리 집에 있으면 출퇴근하기도 편하고, 나도 안심이 되고.”
“그런데 갑자기 그 얘기는 왜 해?”
주승훈이 연근 껍질을 벗기며 단호하게 말했다.
“그냥 나가서 살라고 해. 우리 셋이 계속 같이 사는 건 아무래도 불편해.”
“너랑 뭐 좀 하려고 할 때마다 집에 다른 사람이 있다는 걸 신경 써야 하잖아.”
“그리고 네가 걔 때문에 계속 눈치 보는 것도 싫고.”
“원래는 네가 좋아하는 탕수육이랑 연근 볶음을 해주려고 했거든.”
“그런데 걔만 보면 넌 바로 연근 갈비탕으로 메뉴를 바꾸잖아.”
“분명 우리 집인데, 왜 너는 계속 남처럼 굴어?”
임지아는 잠시 멈칫하더니 갑자기 주승훈의 볼에 키스를 했다.
제2화
임지아의 갑작스러운 키스가 가시처럼 내 가슴에 박혔다.
임지아는 분명 내게 맹세까지 하며 약속했었다.
주승훈과 최대한 거리를 유지하겠다고.
내 앞에서는 임지아도 주승훈과 될 수 있는 한 거리를 뒀다.
그런데 언제부터였을까, 임지아는 이제 이렇게 자연스럽게 주승훈과 스킨십을 하고 있었다.
“네가 날 걱정하는 거 알아.”
“그 얘기는 나중에 하자. 요즘 밖에서 집 구하기도 쉽지 않잖아.”
주승훈은 기다렸다는 듯 곧바로 말을 이었다.
“며칠 전에 친구한테 부탁해서 집 두 군데를 알아봐 뒀어.”
“우리 집에서도 가깝고, 걔 회사에서도 가까워.”
임지아는 결국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가연이가 돌아오면 내가 얘기할게.”
나는 눈시울이 뜨거워지는 걸 억지로 참으면서, 내가 직접 하나하나 꾸며온 이 집을 둘러봤다.
주승훈이 기억을 잃은 후, 집에서 내 신분은 주인에서 손님으로 바뀌었다.
내 물건은 전부 그 작은방으로 옮겨야 했다.
고작 반년 만에 임지아는 내가 남겨둔 생활의 흔적을 모조리 지워버렸다.
그런데 이제 주승훈은 나더러 짐을 싸서 아예 나가라고 했다.
주방에서 새어 나오는 웃음소리가 내 귀를 찔렀다.
나는 깊게 숨을 들이마신 뒤 돌아서서 조용히 문을 나섰다.
나는 회사에 가지 않았다.
마지막 희망을 품고 병원으로 향했다.
혹시 그 글을 올린 사람이 정말 주승훈이 아닐 수도 있다.
혹시 주승훈은 아직 기억을 되찾지 못했을지도 모른다.
혹시 임지아에게 잘해주는 것도, 주승훈이 임지아를 나라고 착각하고 있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주승훈 씨?”
담당 의사인 정 선생님은 두꺼운 진료 기록을 한참 뒤적이다가, 마침내 주승훈의 이름을 찾아냈다.
“석 달 전에 내가 전화해서 정기검진을 받으러 오라고 했어요. 그랬더니 본인은 이미 기억을 되찾았다고 하더라고요.”
“그날이 추석이었던 걸로 기억해요.”
“마침 추석에 기억을 되찾았다고 해서, 나도 정말 다행이라고 축하해줬죠.”
나는 그대로 굳어버렸다.
추석날, 임지아의 부모님이 직접 만든 송편을 가져다주러 왔다.
주승훈이 직접 차를 몰고 고속철도역에 가서 두 노인을 공손하게 집으로 모셔왔다.
같은 날, 우리 부모님도 대형마트 봉투를 한가득 들고 J시에 오셨다.
주승훈은 모른다고 잡아떼면서 경비원에게 우리 부모님을 아파트 밖으로 내쫓았다.
더는 숨길 수 없었던 나는 결국 부모님께 주승훈이 교통사고로 기억을 잃었다는 사실을 털어놓았다.
엄마는 한숨을 쉬며 조용히 나를 위로했다.
“사람이 무사한 것만 해도 다행이지. 의사 선생님도 그랬잖아. 회복하는 데 시간이 좀 걸릴 뿐이라고.”
알고 보니 그때 주승훈은 이미 기억을 되찾은 상태였다.
그리고 자신과 4년 동안 사랑을 나누고 결혼을 약속한 여자친구가 바로 나라는 것도 알고 있었다.
그런데도 주승훈은 임지아의 부모님을 모시러 갔다.
내 부모님은 경비원에게 쫓겨나게 하면서.
심지어 평생 기억을 잃은 척 살아갈 생각까지 했던 것이다.
정 선생님은 멍하니 서 있는 나를 보며 의아한 듯 물었다.
“왜요? 승훈 씨한테 또 무슨 문제라도 생겼어요?”
나는 고개를 저으며 씁쓸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냥 물어보는 거예요. 머릿속의 피가 아직 다 흡수되지 않은 건 아닌가 해서요.”
정 선생님은 웃으며 나를 놀렸다.
“걱정 마세요. 병원에 와서 재검사도 한 번 받았어요.”
“완전히 회복됐으니까, 두 분 결혼에도 전혀 지장이 없을 거예요.”
“부부생활에도 문제가 없을 거고요.”
처음에 주승훈이 병원에서 일주일 동안 의식 불명이었을 때, 나는 휴가를 내고 잠도 제대로 자지 못한 채 침대 옆에서 꼬박 일주일을 간호했다.
그런데 하필 내가 아래층에 내려가서 진료비를 내면서, 임지아에게 잠시 주승훈을 봐달라고 부탁한 사이에 주승훈이 깨어났다.
내가 아무리 설명해도 주승훈은 임지아가 자기 여자친구라고 우겼다.
정 선생님은 주승훈이 큰 교통사고를 막 겪은 상태라, 뇌에 자극을 주면 안 된다고 했다.
그때도 나에게 똑같은 말을 했었다.
“당신이 그 사람을 사랑한다는 것도 알고, 두 사람이 곧 결혼할 예정이라는 것도 알아요.”
“걱정하지 마세요. 늦어도 석 달이면 반드시 기억을 되찾을 거예요. 결혼식에도 아무런 지장이 없을 겁니다.”
누가 알았을까?
운명이 이렇게 잔인할 줄이야.
우리의 결혼식은 아마 영원히 없을지도 모른다.
제3화
엘리베이터를 타고 내려가면서, 나는 여전히 이 석 달 동안의 주승훈의 행동을 되새기고 있었다.
지금 생각해 보면 주승훈의 연기는 정말 서툴렀다.
그저 나는 계속 기억상실이라는 핑계로 주승훈의 모든 행동을 대신 변명해 주고 있었던 것이다.
생각에 너무 깊이 빠져 있다 보니, 나도 모르게 옆에 있던 사람들을 따라서 엘리베이터에서 내려버렸다.
정신을 차리고 보니 이미 한참을 걸어 나온 뒤였다.
다시 돌아가려던 순간, 나는 그곳에서 절대 마주쳐서는 안 될 사람을 발견했다.
주승훈이었다.
이 시간이라면 주승훈은 분명 임지아와 집에서 저녁을 만들고 있어야 했다.
나도 모르게 문 앞에서 발걸음을 멈췄고, 마침 안에서 의사가 말하는 소리가 들렸다.
“임신하셨어요. 임신 8주예요.”
“아이를 낳으실 건가요?”
임지아가 미처 대답하기도 전에, 뒤에 있던 주승훈이 다급하게 대신 대답했다.
“낳을 거예요. 우리 아이니까요.”
주승훈은 초음파 검사지를 손에 든 채 임지아를 와락 끌어안았다.
“의사 선생님 말 들었어? 우리 아이가 생겼어!”
주승훈은 벌써 앞으로의 계획까지 세우기 시작했다.
“아직 배가 나오기 전이니까, 우리 먼저 혼인신고부터 하고 결혼식 올리자.”
“내일 바로 우리 부모님께 전화해서 상의할게.”
“시간이 좀 촉박해서 네가 서운할 수도 있어.”
“그래도 네가 받아야 할 건 하나도 빠짐없이 해줄게.”
주승훈은 내 쪽을 등지고 있어서 나를 보지 못했다.
하지만 임지아는 문 앞에 서 있는 나와 정확히 눈이 마주쳤다.
아무런 감정도 드러나지 않는 내 얼굴을 보자, 임지아의 얼굴은 새하얗게 질렸다.
임지아는 황급히 주승훈을 밀어냈다.
주승훈은 임지아가 바라보는 곳으로 고개를 돌렸다.
나를 발견한 순간, 눈빛에 희미하게 당황하는 기색이 스쳤다.
“허가연, 너 회사 간 거 아니었어?”
“그런데 왜 갑자기 산부인과에 온 거야?”
나는 주승훈의 질문에 대답하지 않았다.
그저 임지아를 똑바로 바라보며, 이미 알고 있으면서도 일부러 물었다.
“너 임신했어?”
임지아는 불쌍한 사람처럼 고개를 숙인 채 감히 나를 바라보지 못했다.
주승훈은 미간을 찌푸리며 임지아 앞을 막아섰다.
“우린 약혼한 사이야. 분위기에 휩쓸려 피임을 못 했고, 그래서 아이가 생긴 거야.”
나는 자조적으로 웃었다.
그 말을 주승훈에게 한 건지, 아니면 나 자신에게 한 건지도 모른 채 중얼거렸다.
“그래. 이제 너희가 약혼한 사이구나.”
집으로 돌아가는 길, 임지아는 고개를 푹 숙인 채 내 옆자리에 앉아 한마디도 하지 못했다.
오히려 운전석에 앉은 주승훈은 나를 무척 경계했다.
주승훈은 계속 백미러로 나를 힐끗힐끗 확인했다.
마치 내가 소중한 임지아에게 무슨 짓이라도 할까 봐 걱정하는 사람처럼.
나는 그저 고개를 숙인 채 회사 인사팀에 메시지를 보냈다.
[회사에서 이탈리아로 파견할 엔지니어 모집에 제가 지원하겠습니다.]
본사에서는 연중 업무 결산 회의에서 해외 시장을 개척하기로 했다.
각 지역 지사에서 엔지니어들을 선발해 해외로 파견하기로 했다.
마침 회사에서 대학 시절 제2전공으로 이탈리아어를 공부한 사람은 나뿐이었다.
주승훈이 예전처럼 멀쩡했다 해도, 나는 장거리 연애를 할 자신이 없었다.
내 앞날과 주승훈 사이에서 나는 한 번 주승훈을 선택했었다.
하지만 앞으로의 선택만큼은, 오직 나 자신을 위해 하기로 했다.
집에 돌아와서야 나는 알았다.
임지아가 저녁을 준비하다가 갑자기 심하게 토했다는 걸.
주승훈은 임지아의 속에 문제가 생긴 줄 알고, 다급하게 차를 몰아서 병원으로 데려갔다.
그리고 임지아가 다시 주방의 냄새를 맡고 속이 메스꺼워질까 봐, 주승훈은 나보고 대신 주방 일을 도와주라고 했다.
임지아는 망설이는 듯 나를 힐끗 바라봤다.
“그런데 가연이는 요리를 한 번도 해본 적이 없잖아.”
주승훈은 임지아를 부축해서 소파에 앉힌 뒤 말했다.
“못하면 배우면 되지. 앞으로 임산부한테 모든 일을 다 맡길 순 없잖아.”
‘임산부’라는 말만 들어도 귀에 거슬렸지만, 그래도 나는 부엌으로 들어가서 채소를 씻었다.
주승훈은 곧바로 내 뒤를 따라 들어왔다.
그리고 주방으로 들어오자마자 문을 잠갔다.
“지아랑 아이한테 조금이라도 무슨 일이 생기면, 너 가만 안 둬.”
제4화
내 가슴을 누군가 칼로 깊숙이 찔러서 심장에 커다란 구멍이 난 것처럼 아팠다.
차가운 바람이 그 구멍 사이로 사정없이 파고드는 것 같았다.
나는 감히 고개를 들지 못했다.
눈물을 주승훈에게 들키고 싶지 않았다.
목소리만큼은 최대한 평온하게 유지했다.
“네가 너무 많이 생각한 거야.”
“지아는 내 가장 친한 친구야. 임신했다는데 내가 기뻐하면 기뻐했지, 어떻게 해칠 생각을 하겠어?”
주승훈의 시선이 잠시 내 얼굴에 머물렀다.
마치 내가 주승훈의 기억이 돌아왔다는 사실을 알고 있는지 확인하려는 것 같았다.
잠시 후, 주승훈의 표정이 조금 누그러졌다.
“내 말은 너희 둘이 친한 친구니까 앞으로 지아를 좀 잘 챙겨달라는 거야.”
나는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얼마 지나지 않아서 임지아가 아이스크림을 먹자며 나를 주방에서 거실로 불러냈다.
뭔가 할 말이 있는 듯 입술만 달싹였고, 눈가에는 눈물이 그렁그렁 맺혀 있었다.
하지만 나는 담담한 얼굴로 물었다.
“언제부터였어?”
임지아는 죄책감에 가득 찬 얼굴로 내 앞에서 눈물까지 쏟아냈다.
“그날 나랑 승훈이가 둘 다 술에 취했어. 그 뒤에 분명 피임약도 먹었어.”
“아마 유통기한이 지난 가짜 약을 잘못 샀나 봐. 그런데도 결국 임신이 됐어.”
그 일에 대해서 임지아는 내게 단 한 마디도 하지 않았다.
나는 바보처럼 철석같이 믿고 있었다.
주승훈은 아직도 기억을 잃은 채 엉뚱한 사람을 자기 여자친구로 알고 있다고.
임지아는 내 가장 친한 내 친구니까 절대로 그런 짓을 하지 않을 거라고.
하지만 이제야 알았다.
그 모든 건 나 혼자만의 착각이었던 것이다.
내가 모르는 사이에, 두 사람은 이미 친구 사이에 지켜야 할 선을 넘어버린 뒤였다.
임지아는 갑자기 내 발밑에 무릎을 꿇더니 자신의 뺨을 세게 내리쳤다.
“내가 죽을죄를 지었어. 너와의 약속을 저버렸어.”
“내가 잠깐 제정신이 아니었던 것 같아. 정말 잘못했어.”
“네가 한마디만 하면 내일 당장 병원에 가서 이 아이를 지울게!”
“됐어.”
내가 단호하게 말하자, 임지아가 믿을 수 없다는 듯 고개를 번쩍 들었다.
“아니, 지금 당장 병원에 갈게... 방금 뭐라고 했어?”
나는 내 치맛자락을 붙잡고 있던 임지아의 손을 떼어냈다.
“그래도 아이가 무슨 잘못이 있어.”
임지아는 두 눈을 크게 뜬 채 믿을 수 없다는 표정으로 나를 바라봤다.
“그럼 너는 어떡하려고...”
“너는 이제 어떡해?”
그때 주승훈이 주방에서 음식을 들고 나왔다.
마침 내 발밑에 무릎을 꿇고 있는 임지아를 발견했다.
임지아는 곧바로 자리에서 일어나면서 다급하게 변명했다.
“네가 생각하는 그런 일이 아니야!”
“내가 혼자 발을 헛디뎌서 넘어진 거야. 가연이가 지금 일으켜주려고 했어.”
주승훈은 순식간에 화가 치밀었다.
주승훈은 곧장 임지아를 내 뒤에서 끌어내서 자신의 앞으로 데려갔다.
“아까 내가 한 말, 정말 하나도 안 들었지?”
“지아가 착한 마음으로 너를 우리 집에 받아줬더니, 네가 이렇게 보답하는 거야?”
임지아는 내 앞을 막아서며 숨이 넘어갈 듯 울었다.
“가연이 잘못이 아니야. 그러니까 괴롭히지 마!”
주승훈이 잠시 마음을 가라앉히고, 차가운 목소리로 말했다.
“됐어. 방금 일은 더 이상 따지지 않을게.”
“하지만 오늘 당장 우리 집에서 나가.”
“지아가 임신했으니까 이제 집에 다른 사람이 같이 지내는 건 불편해.”
임지아의 몸이 순간 굳었다.
임지아는 고개를 돌려서 조심스럽게 내 표정을 살폈다.
“알았어.”
나는 망설이지 않고, 곧바로 옆방으로 가서 짐을 쌌다.
문을 나서려는데 임지아는 내 손을 붙잡고 거듭 약속했다.
“걱정하지 마. 오늘 밤 내가 꼭 승훈이를 설득해서 다시 여기로 데려올게.”
“필요 없어.”
나는 단호하게 거절했다.
그리고 캐리어를 끌고 집을 나서자마자, 곧바로 아는 부동산 중개사에게 전화를 걸었다.
“집을 팔고 싶어요. 최대한 빨리요.”
주승훈은 너무 오랫동안 기억을 잃은 척한 탓인지, 이 집이 원래 내 부모님이 내 결혼을 위해서 전액 현금으로 마련해주신 신혼집이라는 사실을 완전히 잊은 모양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