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워온 재벌 후계자를 버리기로 했다

GoodNovel new 완결

“100억 원 줄게. 일주일 안에 출국해서 다시는 내 아들 앞에 나타나지 마.” 김소아의 맞은편에 앉은 한미정은 노골적으로 경멸 어린 시선을 보냈다. 예전 같았으면 김소아는 눈시울을 붉히며 분명 이렇게 말했을 것이다. “저 준우 씨랑 돈 때문에 만나는 게 아니에요.” 하지만 지금은 그저 담담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네.” 한미정은 예상 밖의 대답에 잠시 멈칫하더니 이내 비웃음을 흘렸다. “그래도 주제 파악은 할 줄 아는구나.” 마지막 ‘주제 파악’이라는 말에 유난히 힘이 들어갔다. 김소아와 서준우는 애초부터 사는 세계가 다르다는 뜻이었다. 김소아는 말없이 눈을 내리깔았다. 그리고 수표를 받아 든 뒤 미련 없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챕터 (1)

1화

“100억 원 줄게. 일주일 안에 출국해서 다시는 내 아들 앞에 나타나지 마.” 김소아의 맞은편에 앉은 한미정은 노골적으로 경멸 어린 시선을 보냈다. 예전 같았으면 김소아는 눈시울을 붉히며 분명 이렇게 말했을 것이다. “저 준우 씨랑 돈 때문에 만나는 게 아니에요.” 하지만 지금은 그저 담담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네.” 한미정은 예상 밖의 대답에 잠시 멈칫하더니 이내 비웃음을 흘렸다. “그래도 주제 파악은 할 줄 아는구나.” 마지막 ‘주제 파악’이라는 말에 유난히 힘이 들어갔다. 김소아와 서준우는 애초부터 사는 세계가 다르다는 뜻이었다. 김소아는 말없이 눈을 내리깔았다. 그리고 수표를 받아 든 뒤 미련 없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제1화 “100억 원 줄게. 일주일 안에 출국해서 다시는 내 아들 앞에 나타나지 마.” 김소아의 맞은편에 앉은 한미정은 노골적으로 경멸 어린 시선을 보냈다. 예전 같았으면 김소아는 눈시울을 붉히며 분명 이렇게 말했을 것이다. “저 준우 씨랑 돈 때문에 만나는 게 아니에요.” 하지만 지금은 그저 담담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네.” 한미정은 예상 밖의 대답에 잠시 멈칫하더니 이내 비웃음을 흘렸다. “그래도 주제 파악은 할 줄 아는구나.” 마지막 ‘주제 파악’이라는 말에 유난히 힘이 들어갔다. 김소아와 서준우는 애초부터 사는 세계가 다르다는 뜻이었다. 김소아는 말없이 눈을 내리깔았다. 그리고 수표를 받아 든 뒤 미련 없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집으로 돌아왔을 때는 이미 날이 어두워져 있었다. 집은 지나치게 넓었다. 여기 살고 있는 김소아조차 종종 길을 헷갈릴 정도였다. 그나마 익숙한 건 거실 테이블 위에 놓인 사진 한 장뿐이었다. 사진 속 서준우는 김소아의 허리를 끌어안은 채, 고개를 숙이면서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다. 눈빛에는 다정함이 가득했다. 김소아는 사진을 가만히 쓸어보다 문득 3년 전의 그 비 오는 밤을 떠올렸다. 그날, 골목 어귀에서 서준우를 발견했다. 온몸은 피투성이였고 눈빛은 초점 없이 흐려져 있었다. “누구세요?” 김소아가 묻자 서준우는 멍하니 고개를 저었다. “저... 기억이 안 나요.” 빗물과 피가 뒤섞이면서 머리카락을 타고 떨어졌다. 그렇게 김소아는 기억을 잃은 남자를 집으로 데려왔다. 두 사람이 함께 지내던 곳은 작은 단칸방이었다. 벽지는 군데군데 벗겨져 있었고 수도관에서는 물이 샜다. 겨울에는 이불을 세 겹이나 덮어야 겨우 추위를 버틸 수 있었다. 하지만 가장 가난했던 그 시절, 두 사람은 누구보다 서로를 사랑했다. 서로 의지하며 버텼고, 어느새 서로에게 유일한 사람이 됐다. 김소아가 야근하는 날이면 서준우는 세 시간씩 건물 앞에 쪼그리고 앉아서 기다렸다. 단지 함께 집에 가고 싶다는 이유로. 생리통이 심해서 식은땀을 흘릴 때면 밤새 잠도 자지 않고 배를 문질러 줬다. 김소아가 몇 번이나 들여다보고도 비싸서 포기했던 목걸이를 사 주겠다며, 몰래 아르바이트를 하루에 다섯 군데씩 뛰기도 했다. 굳이 힘든 점을 하나 꼽자면, 밤마다 좀처럼 김소아를 놓아주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김소아가 얼굴을 붉히며 그만하라고 하면 서준우는 귓불을 살짝 깨물며 웃었다. “자기야, 너무 사랑해서 그래.” 서로 가장 뜨겁게 사랑하던 때에는, 김소아의 손을 잡고 타투 숍까지 찾아가서 쇄골에 그녀의 이름을 새겼다. 타투이스트가 아프지 않겠느냐고 묻자, 서준우는 김소아를 바라보며 웃었다. “아파야 좋죠. 그래야 가장 사랑하는 사람을 안 잊을 테니까.” 김소아는 두 사람이 영원히 이렇게 행복할 거라고 믿었다. 서준우가 기억을 되찾기 전까지는. 그제야 알았다. 서준우는 길거리를 떠돌던 가난한 남자가 아니었다. J시에서도 손꼽히는 재력가 집안인 서씨 가문의 후계자이자, 금융계에도 막강한 영향력을 가진 인물이었다. 당시 경쟁 세력의 계략에 휘말려 교통사고를 당했고, 그 충격으로 기억을 잃은 채 거리를 떠돌게 된 것이었다. 기억을 되찾은 뒤 서준우는 김소아를 데리고 거대한 집으로 들어왔다. 욕실 하나만 해도 김소아가 예전에 살던 집보다 열 배는 컸다. 하지만 그날 이후 서준우도 완전히 다른 사람이 되어 버렸다. 이름조차 들어 본 적 없는 명품 맞춤 정장을 입었고, 값비싼 시계를 찬 채 수백억 원대 계약을 논의하는 사람이 됐다. 밤새 집에 들어오지 않는 날도 많았다. 김소아는 애써 스스로를 달랬다. 그저 일이 바빠서 그런 거라고. 그러던 어느 날, 연예 뉴스에는 온통 서준우와 JS그룹의 딸 임지연에 대한 기사가 올라왔다. 사진 속 서준우는 직접 차 문을 열어 주고 있었다. 서로 마주 보며 웃는 두 사람의 모습에서 김소아는 차마 눈을 떼지 못했다. 댓글에는 하나같이 잘 어울리는 한 쌍이라는 말뿐이었다. 그날 밤 김소아는 혼자 창가에 앉아서 밤새 달을 바라봤다. 그리고 마침내 인정했다. 눈보라를 뚫고 퇴근길에 데리러 오던 서준우. 막노동까지 하며 자신에게 목걸이를 사 줬던 서준우. 쇄골에 자신의 이름을 새겼던 서준우. 그 사람은 기억을 되찾은 날 이미 사라졌다. 지금의 서준우와 자신은 애초부터 살아온 세계가 달랐다. 서준우가 있는 곳에 김소아가 설 자리는 없었다. 그에게는 자신과 같은 세상에서 살아온, 그만큼 눈부신 사람이 더 잘 어울릴지도 몰랐다. 그렇다면 더 버틸 이유도 없었다. 이제는 놓아주자. 서준우도, 자신도. 그날 밤에도 넓은 집은 텅 비어 있었다. 서준우는 돌아오지 않았다. 하지만 김소아는 예전처럼 새벽까지 기다리지 않았다. 일찍 잠자리에 들었고, 다음 날 아침이 밝자 곧장 대사관 비자 발급 센터로 향했다. 급행으로 신청하면 비자를 일주일 안에 받을 수 있었다. 센터를 나왔을 때는 이미 정오였다. 김소아는 근처에 보이는 식당으로 들어갔다. 문을 여는 순간, 걸음이 멈췄다. 창가 자리에 앉은 서준우가 휴지로 임지연의 입가를 다정하게 닦아주고 있었다. 그 눈빛은 너무도 다정했다. 예전 단칸방에서 김소아를 바라보던 눈빛과 똑같았다. 순간 가슴이 꽉 조여들었다. 김소아는 그대로 돌아서려다 입구에 놓인 화분을 건드리고 말았다. 달그락거리는 소리에 서준우가 고개를 들었다. 김소아를 발견한 순간, 눈빛에 남아 있던 온기가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서준우가 천천히 다가왔다. “나 미행했어?” 김소아가 입을 열기도 전에 차가운 말이 이어졌다. “인터넷에 올라온 사진은 사업 얘기하다 찍힌 거라고 설명했잖아. 대체 언제까지 이럴 건데?” 김소아는 뭔가 말하려다 입을 다물었다. 목이 막힌 듯 아무 말도 나오지 않았다. 어제 한미정이 했던 말이 다시 귓가에 맴돌았다. “준우와 지연이 결혼은 두 집안에서 진작에 얘기가 끝난 일이야. 준우도 지연이를 좋아하고...” 사업 얘기라더니. 정략결혼도 사업에 포함되는 걸까? “준우 씨, 그렇게까지 화내지 마.” 임지연도 자리에서 일어나 다가왔다. 부드러운 미소를 지으며 두 사람 사이를 중재하듯 말했다. “이렇게 만난 것도 인연인데 같이 앉아요.” 김소아가 거절하기도 전에 임지연이 팔을 잡아서 식탁으로 데려갔다. 김소아는 얼떨결에 자리에 앉았다. 맞은편에는 차갑게 굳은 서준우의 얼굴이 보였다. “소아 씨는 뭐 드실래요?” 임지연이 메뉴판을 내밀었다. “여기 요리가 꽤 괜찮아요.” 메뉴판은 온통 알아볼 수 없는 외국어로 적혀 있었다. 김소아는 난처함을 숨기며 메뉴판을 다시 밀어 놓았다. “배 안 고파요.” “그럼 수프라도 드세요.” 임지연이 해산물 수프를 한 그릇 떠서 앞에 놓았다. “맛있어요.” 국물 위에 떠 있는 새우를 보는 순간 속이 뒤틀렸다. 김소아는 해산물 알레르기가 심했다. 막 거절하려는데 서준우의 핸드폰이 울렸다. 서준우는 자리에서 일어나 전화를 받으러 갔다. 훤칠한 뒷모습 위로 고급스러운 정장이 눈에 들어왔다. 잡지에서 본 적이 있는 그 옷은 예전에 살던 집을 통째로 사고도 남을 만한 엄청나게 비싼 가격이었다. “어서 먹어 봐요.” 임지연이 갑자기 목소리를 낮췄다. “김소아 씨 형편으로는 평소에 이런 비싼 음식 먹어 볼 기회도 없잖아요.” 김소아가 고개를 들었다. 임지연은 여전히 웃고 있었다. “설마 준우 씨랑 잠깐 만났다고 서씨 가문에 들어올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한 건 아니죠?” 임지연은 손끝으로 잔 가장자리를 가볍게 두드렸다. “준우 씨가 기억을 잃지 않았으면, 김소아 씨 같은 사람은 애초에 준우 씨 근처에도 못 갔어요.” 김소아는 냅킨을 꽉 움켜쥐었다. 가난한 건 사실이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함부로 모욕당해도 되는 건 아니었다. “임지연 씨, 저희는 서로 잘 알지도 못하는데 왜 이런 말씀을...” “어머!” 말이 끝나기도 전에 임지연이 갑자기 비명을 질렀다. 그러면서 손으로 해산물 수프 그릇을 일부러 엎었다. 뜨거운 국물이 임지연의 손등을 덮치면서 김소아의 손에도 그대로 튀었다. 소리를 들은 서준우가 급히 돌아왔다. 곧바로 임지연의 손을 잡았다. “왜 그래?” “아무것도 아니야...” 임지연은 눈시울을 붉혔다. “내가 잘못했어. 준우 씨랑 둘이 밥 먹는 걸 봤으니 김소아 씨 입장에서는 화가 날 만하잖아...” 서준우의 시선이 곧장 김소아에게 향했다. “김소아, 내가 몇 번이나 설명해야 해? 꼭 이렇게까지 해야겠어?” “내가 그런 게 아니라, 지연 씨가...” “됐어!” 서준우가 말을 끊었다. “내 눈으로 직접 봤는데 뭘 더 말해? 너 언제부터 이렇게 말이 안 통했어?” 서준우는 임지연을 감싸안고 그대로 식당을 나갔다. 임지연은 그의 어깨 너머로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김소아를 향해 보란 듯이 미소를 지었다. 김소아는 그 자리에 서서 떨리는 손을 내려다봤다. 붉게 덴 피부 위로 벌써 물집이 올라오고 있었다. 바늘로 찌르는 듯 욱신거렸다. 하지만 서준우의 눈에는 임지연의 살짝 붉어진 손등만 보이는 듯했다. 한 번도 뒤돌아보지 않았다. 예전의 서준우는 김소아가 조금만 다쳐도 견디지 못하던 사람이었다. 3년 전, 김소아가 요리를 하다 손을 뎄을 때는 눈시울까지 붉힌 채 한밤중에 약국으로 뛰어갔다. 돌아오자마자 직접 약을 발라 주면서 몇 번이고 물었다. “소아야, 많이 아파?” 그때 서준우의 눈에는 오직 김소아만 있었다. 하지만 지금의 서준우는 더 이상 김소아를 보고 있지 않았다. 제2화 김소아는 혼자 집으로 돌아왔다. 거실에서 구급상자를 찾아서 상처를 소독하고 약을 바른 뒤 붕대까지 감았다. 화상을 입은 손은 따끔하면서 욱신거렸다. 계단을 오르려던 순간, 거실 한쪽에 놓인 그랜드 피아노가 눈에 들어왔다. 서준우가 기억을 되찾은 뒤 사 온 피아노였다. 자신이 직접 가르쳐 주겠다던 말도 했었다. 하지만 시간이 꽤 흘렀는데도 피아노 덮개에는 먼지만 수북이 쌓여 있었다. 언제부터인가 두 사람의 관계도 그 피아노처럼 그대로 방치되어 있었다. 김소아는 눈시울이 붉어진 채 방으로 들어가서 짐을 싸기 시작했다. 옷과 신분증, 카드까지 하나씩 정리했다. 손길은 느렸다. 하나씩 정리할 때마다 지난날과 작별하는 기분이 들었다. 한창 짐을 싸고 있는데 갑자기 방문이 열렸다. 서준우가 문 앞에 서 있었다. 정장 재킷을 팔에 걸치고 있었고 넥타이는 느슨하게 풀려 있었다. 펼쳐진 캐리어를 본 서준우가 미간을 찌푸렸다. “뭐 해?” “짐 싸.” 김소아는 담담히 대답하며 계속 옷을 갰다. 서준우가 인상을 찌푸린 채 다가왔다. 은은한 향수 냄새가 풍겼다. 오늘 임지연에게서 맡았던 향이었다. 서준우가 갑자기 김소아의 손목을 붙잡았다. 힘이 너무 강해서 김소아는 저도 모르게 얼굴을 찌푸렸다. “내가 오늘 지연이랑 밥 좀 먹었다고 집을 나가겠다는 거야?” 목소리에는 짜증이 가득했다. “당신이 사람까지 다치게 해 놓아도 지연이는 아무 말도 안 했잖아. 그런데 당신이 먼저 화를 내?” 김소아는 말없이 서준우를 바라봤다. 서준우는 답답하다는 듯 말을 이었다. “우리 집안이랑 지연이네는 오래전부터 알고 지낸 사이야. 지연이도 이제 막 돌아왔고, 부모님도 나한테 잘 챙겨 달라고 하셨어.” 잠시 말을 멈춘 서준우가 미간을 더 찌푸렸다. “당신도 이제 철 좀 들면 안 돼?” ‘철들라니?’ 그 말이 가슴 깊숙이 박혔다. 김소아는 들고 있던 옷을 꽉 움켜쥐었다. 자신은 자리를 비켜 주려고 이렇게 짐까지 싸고 있는데. 대체 여기서 뭘 더 해야 철이 드는 걸까? “대답해.” 서준우의 목소리가 높아졌다. 김소아는 말없이 몸을 돌리면서 다시 짐을 쌌다. 그 침묵에 서준우의 표정이 더욱 굳어졌다. “그래. 언제까지 이러나 두고 보자.” 서준우는 그대로 문을 쾅 닫고 나가 버렸다. 묻이 닫히는 큰 소리에 김소아의 가슴이 순간 움찔했다. 다음 날 아침. 김소아가 아래층으로 내려갔을 때, 임지연이 거실에 앉아 서준우와 웃으며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오늘은 흰색 원피스를 입고 화장도 단정하게 한 모습이었다. 청순하면서도 우아한 분위기였다. 김소아를 발견한 임지연이 곧바로 자리에서 일어나 환하게 웃었다. “소아 씨, 일어났어요?” 이어 아무렇지 않은 얼굴로 덧붙였다. “부모님이 오늘 자선 경매에 꼭 준우 씨랑 같이 가라고 하셔서요. 괜히 오해하지 마세요.” 김소아는 서준우를 바라봤다. 서준우는 고개를 숙인 채 커프스단추만 만지고 있었다. 눈길조차 주지 않았다. “오해 안 해요.” 김소아가 조용히 말했다. “두 분 일은 저랑 상관없으니까요.” 커프스단추를 만지던 서준우의 손이 순간 멈칫하면서, 미간이 더 깊이 일그러졌다. 뭔가 말하려던 순간 임지연이 먼저 입을 열었다. “그럼 소아 씨도 같이 갈래요? 어차피 오늘 별일 없잖아요.” 김소아가 거절할 틈도 없이 임지연이 다정하게 팔짱을 꼈다. 결국 김소아도 그대로 차에 올라탔다. 자선 경매장은 화려한 조명과 사람들로 가득했다. 앞줄에 앉은 서준우는 무심한 얼굴로 입찰 번호판을 들었다. 보석과 명품 시계가 하나씩 낙찰될 때마다 별 관심도 없다는 듯 옆에 앉은 임지연에게 건넸다. 임지연은 온화하게 웃으며 때때로 서준우에게 가까이 다가가 귓속말을 했다. 누가 봐도 가까운 사이처럼 보였다. “준우 씨.” 임지연이 배려하는 척 물었다. “소아 씨 것도 좀 사 줄래?” 서준우는 대수롭지 않게 대답했다. “됐어. 소아는 이런 거 안 써.” 임지연의 입꼬리가 살짝 올라갔다. 서준우가 보지 못하는 틈에 김소아를 향해 보란 듯이 웃었다. 김소아는 시선을 내리깔았다. 손끝으로 경매 책자만 천천히 쓸었다. ‘안 쓰는 걸까?’ ‘아니면 내게는 이런 물건이 어울리지 않는다고 생각하는 걸까?’ 서준우의 눈에는 여전히 자신이 가난한 동네에서 살아온 여자일지도 몰랐다. 지금 자신의 곁에 있다고 해도 이런 값비싼 물건까지 가질 사람은 아니라고 생각하는지도 몰랐다. 그래도 상관없었다. 어차피 조금만 지나면 두 사람은 아무 사이도 아니게 될 테니까. 김소아는 구석에 앉아서 조용히 경매를 지켜봤다. 서준우가 임지연을 위해 거액을 쓰는 모습도, 두 사람이 주변 시선은 아랑곳하지 않은 채 다정하게 붙어 있는 모습도 담담히 바라봤다. 이제는 자신과 상관없는 사람들의 일을 구경하는 기분이었다. 그러다 마지막 경매품이 모습을 드러냈다. 비취 팔찌였다. 김소아는 순간 숨을 멈췄다. 손에도 저절로 힘이 들어갔다. 그건 바로 할머니의 유품이었다. 3년 전. 서준우는 김소아의 생일 선물을 사 주겠다며 공사장에서 일하다 추락했다. 자칫 목숨까지 잃을 뻔한 큰 사고였다. 수술비를 마련할 방법이 없었던 김소아는 결국 할머니가 유일하게 남겨 준 팔찌를 팔았다. 나중에 돈을 모아서 다시 찾아갔지만, 팔찌는 이미 다른 사람에게 팔린 뒤였다. 시내의 골동품 가게를 샅샅이 뒤졌지만 끝내 찾지 못했다. 그 팔찌가 지금 눈앞에 있었다. 김소아는 반사적으로 입찰 번호판을 들었다. “2억 원.” 임지연이 놀란 얼굴로 뒤를 돌아봤다. 그러다 가볍게 웃으며 번호판을 들었다. “6억 원.” “8억 원.” “10억 원.” 가격은 계속 올라갔다. 몇 차례 입찰이 오가자 서준우가 미간을 찌푸렸다. 김소아와 임지연을 번갈아 바라보더니 천천히 손을 들었다. 그리고 최고가로 입찰하겠다는 뜻을 밝혔다. 다른 사람이 얼마를 부르든 그보다 높은 금액을 내겠다는 의미였다. 잠시 뒤 경매사가 낙찰봉을 내리쳤다. “축하드립니다, 서준우 님!” 장내가 술렁이는 가운데 서준우가 임지연을 바라봤다. “지연아, 마음에 든다면 가져.” 김소아의 손에서 입찰 번호판이 툭 떨어졌다. 제3화 김소아는 멍하니 직원이 팔찌를 임지연에게 건네는 모습을 바라봤다. 임지연은 미소를 띤 채 상자를 받으려고 손을 뻗었다. 손끝이 상자에 닿는 순간이었다. “어머!” 쨍그랑! 비취 팔찌가 상자에서 미끄러져서 대리석 바닥으로 떨어졌다. 팔찌는 그대로 두 동강이 났다. 순간 김소아는 숨조차 쉬지 못했다. 귓가에는 팔찌가 깨지는 날카로운 소리만 맴돌았다. 머릿속이 새하얘졌다. 본능적으로 달려간 김소아는 임지연을 밀쳐 내고 떨리는 손으로 바닥의 조각을 주웠다. 서준우의 표정이 순식간에 싸늘해졌다. 휘청이는 임지연을 붙잡아 세운 뒤 김소아를 바라봤다. “김소아, 지금 뭐 하는 거야?” 김소아가 붉어진 눈으로 고개를 들었다. 목소리는 몹시 떨렸다. “뭘 하냐고? 이거 할머니 유품이야. 예전에 다시 찾게 되면 꼭 사 주겠다고 했잖아.” 잠시 숨을 고른 김소아가 물었다. “그런데 이제는 그것도 기억이 안 나지?” 서준우는 잠깐 멈칫했다. 뭔가 떠올린 듯했지만 이내 눈빛은 다시 차갑게 가라앉았다. “그게 언제 적 일인데 내가 어떻게 다 기억해?” 목소리에는 짜증이 묻어 있었다. “그리고 지연이도 일부러 그런 게 아니잖아. 그렇다고 사람을 밀면 어떡해?” 임지연은 눈시울을 붉힌 채 서준우의 소매를 붙잡았다. “미안해. 다 내 잘못이야...” 서준우는 미간을 살짝 찌푸리더니 손을 들어 임지연의 눈물을 닦아줬다. “네 잘못이 아니야.” 이어 김소아를 차갑게 바라봤다. “팔찌는 사람을 시켜서 고칠 테니까 당신도 이제 그만해.” 서준우는 임지연의 어깨를 감싼 채 두 동강이 난 팔찌까지 챙겨서 그대로 자리를 떠났다. 한 번도 뒤돌아보지 않았다. 김소아는 그 자리에 가만히 서서 멀어지는 두 사람의 뒷모습을 바라봤다. 가슴속이 텅 빈 것처럼 허전했다. 숨을 쉬는 것조차 버거웠다. 경매가 끝났을 때는 밖에 비가 내리고 있었다. 김소아는 행사장 입구에 서서 검은색 마이바흐가 임지연을 태운 채 멀어지는 모습을 바라봤다. 행사장이 외진 곳에 있어 30분을 기다려도 택시는 잡히지 않았다. 결국 비를 맞으며 걸어서 돌아가야 했다. 집에 도착했을 때는 발에 감각조차 없었다. 하이힐을 벗자 터진 물집에 스타킹이 들러붙어 있었다. 통증에 김소아는 짧게 숨을 들이켰다. 그대로 소파에 주저앉아서 멍하니 천장을 바라봤다. 문득 몇 년 전 비가 오던 날이 떠올랐다. 그날 서준우는 김소아를 업고 3킬로미터나 걸어서 병원까지 갔다. 택시비조차 아까워할 만큼 가난했던 시절이었다. 그런데도 김소아의 발은 땅에 한 번도 닿지 않았다. “소아야, 조금만 참아. 거의 다 왔어.” 서준우의 등은 따뜻했다. 비를 흠뻑 맞으면서도 그때는 그마저 행복했다. 그런데 지금은 수십억 원짜리 차를 타면서도, 김소아를 위해 5분조차 기다려 주지 않았다. 김소아는 발에 약을 바르고 침대로 들어갔다. 이불을 뒤집어쓴 채 그대로 잠을 청했다. 요즘 일은 떠올리고 싶지 않았다. 한 번 생각하기 시작하면 눌러 두었던 서러움과 고통이 한꺼번에 밀려왔다. 김소아가 원했던 건 서씨 가문의 후계자 서준우가 아니었다. 낡은 단칸방에서 함께 살며 웃는 얼굴로 ‘소아야’ 하고 불러 주던 그 사람이었다. 하지만 그때의 다정했던 서준우는 이미 사라졌다. 다시는 돌아오지 않을 것이다. 김소아는 눈을 감았다. 눈물이 조용히 흘러내렸다. 다음 날 점심. 김소아는 문이 열리는 소리에 잠에서 깼다. 서준우가 반듯한 정장 차림으로 침대 옆에 서 있었다. “오늘 저녁에 가족 모임이 있어.” 잠시 김소아를 내려다보던 서준우가 덧붙였다. “당신도 같이 가.” 제4화 떠나기 전에 괜히 눈치채게 해서 일이 틀어지는 건 원치 않았다. 김소아는 잠시 침묵하다 결국 고개를 끄덕였다. 아직 상처가 남아 있는 발을 조심스레 디디며 자리에서 일어나 옷장 앞으로 향했다. 30분 뒤, 두 사람은 서씨 가문 별장에 도착했다. 환하게 불이 밝혀진 거실로 들어서자마자 김소아의 눈에 임지연이 들어왔다. 우아한 명품 투피스를 입은 임지연은 서준우의 어머니 한미정과 다정하게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아버지 서영훈도 옆에서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누가 봐도 화목한 가족처럼 보였다. “준우 왔구나!” 한미정이 반갑게 다가왔다. 마치 김소아는 없는 사람처럼 그대로 지나친 채 아들의 팔부터 붙잡았다. “지연이는 한참 전부터 기다렸어.” 서준우는 잠시 멈칫하더니 무심코 김소아를 돌아봤다. 서운해하거나 애써 속상함을 감추는 모습이라도 보일 거라고 생각했던 모양이다. 하지만 김소아는 그저 담담히 서 있었다. 마치 자신과는 아무 상관도 없다는 것처럼. “소아 씨도 오셨네요?” 임지연이 놀란 척하다 이내 부드럽게 웃었다. “어서 앉아요. 편하게 있어요.” 그제야 한미정이 김소아를 힐끗 바라봤다. “왔으면 얌전히 있어. 우리 집안 망신시키지 말고.” 김소아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식사가 시작되자 한미정과 임지연은 상류층 지인들 이야기를 나눴다. 서영훈과 서준우는 회사 일에 대해서 대화를 이어 갔다. 김소아에게 말을 거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김소아는 마치 없는 사람처럼 조용히 식사를 했다. 한미정이 보란 듯이 던지는 말만 간간이 들려왔다. “결혼은 역시 집안이 비슷해야 해. 세상에는 자기 분수도 모르는 애들이 있다니까.” “지연이랑 준우는 어릴 때부터 같이 자라서 서로를 잘 알잖아. 얼마나 잘 어울려.” 이미 수도 없이 들어 본 말이었다. 처음에는 서준우도 굳은 얼굴로 말을 끊곤 했다. 그런 뒤에는 미간을 찌푸리며 한마디 했다. “엄마, 그만하세요.” 하지만 이제는 그마저도 없었다. 김소아는 고개를 숙인 채 국물을 떠먹었다. 뜨거운 국물이 목을 타고 내려갔지만 아무 맛도 느껴지지 않았다. 식사가 끝난 뒤 서준우는 두 사람을 태우고 돌아갔다. 임지연은 자연스럽게 조수석에 앉았다. 김소아 혼자 뒷좌석에 자리했다. 차 안에는 임지연이 좋아하는 노래가 흘러나왔다. 임지연은 웃으면서 아까 있었던 일들을 서준우와 이야기했다. 김소아는 창밖으로 번지는 불빛을 바라보다 문득 몇 년 전 겨울을 떠올렸다. 그때 서준우는 중고 자전거에 김소아를 태우고 집까지 데려다줬다. 김소아는 그의 허리를 꼭 끌어안고 꽁꽁 언 손을 외투 주머니 안으로 밀어 넣었다. “소아야, 나중에 내가 돈 많이 벌면 꼭 좋은 차 살게. 다시는 당신이 추위에 떨게 안 할 거야.” 지금은 정말 돈이 많아졌다. 하지만 조수석에 앉은 사람은 김소아가 아니었다. 그때 눈앞으로 강한 불빛이 쏟아졌다. 김소아가 미처 상황을 파악하기도 전에 대형 트럭 한 대가 중심을 잃고 이쪽으로 돌진했다. 쾅! 거대한 충돌음이 터졌다. 그 순간 김소아는 똑똑히 봤다. 서준우가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조수석 쪽으로 몸을 던지면서 임지연을 감쌌다. 김소아는 충격에 그대로 앞으로 튕겨 나갔다. 앞좌석에 이마를 강하게 부딪혔다. 순식간에 흘러내린 피가 시야를 붉게 물들였다. 정신을 잃기 직전, 김소아는 마지막으로 한 가지를 깨달았다. 목숨이 오가는 순간에도 서준우가 지키려 한 사람은 자신이 아니라는 걸. ... 다시 눈을 떴을 때 김소아는 병원 침대에 누워 있었다. 이마에는 붕대가 감겨 있었고, 상처가 채 낫지 않은 발까지 다시 다쳐서 움직이기도 힘들었다. 간신히 몸을 일으키려던 순간 병실 문이 열렸다. 한미정이 구두 소리를 내며 안으로 들어왔다. “김소아, 내가 출국하라고 했지?” 한미정은 김소아를 내려다보며 차갑게 말했다. “아직도 안 가고 뭐 해? 설마 아직도 우리 집안에 들어올 생각이야?” 김소아는 담담히 한미정을 바라봤다. “아니에요. 아직 비자가 안 나왔어요.” 잠시 말을 멈췄다가 조용히 덧붙였다. “걱정하지 마세요. 비자만 나오면 바로 떠날게요. 멀리 갈 거예요. 준우 씨가 절대 찾지 못할 곳으로.” 한미정이 비웃었다. “그 말 꼭 지키길 바라.” 바로 그때 병실 문이 다시 열렸다. 서준우가 굳은 얼굴로 문 앞에 서 있었다. “떠난다고?” 서준우의 시선이 김소아에게 향했다. “누가 떠나?” 제5화 김소아는 시선을 내렸다. “어머님이 병문안 오셨어. 나는 괜찮으니까 먼저 가셔도 된다고 말씀드린 거야.” 거짓말이었다. 곧바로 눈치를 챈 한미정은 걱정하는 말을 몇 마디 건넨 뒤, 볼일이 있다며 병실을 나갔다. 둘만 남자 병실 안이 조용해졌다. 서준우가 침대 곁으로 다가왔다. “아까 사고는...” 목소리는 어색하게 굳어 있었다. “너무 갑작스러워서 나도 미처 반응을 못 했어.” 김소아는 가볍게 대답했다. “응. 알아. 괜찮아.” 서준우가 잠시 멈칫했다. “화 안 났어?” “안 났어.” 서준우는 김소아의 얼굴을 가만히 바라봤다. 서운함이나 화난 기색이라도 찾아보려는 듯했다. 하지만 김소아의 눈은 너무도 고요했다. 오히려 그 담담한 반응이 서준우의 신경을 거슬렀다. 손을 뻗어서 김소아의 얼굴을 만지려 했다. “괜히 삐쳐서 이러지 말고, 나는...” “나 정말 화 안 났어.” 김소아는 고개를 돌리면서 손길을 피했다. 목소리는 나지막했지만 분명했다. “좀 쉬고 싶어. 지연 씨도 다쳤잖아. 가서 옆에 있어 줘.” 말을 마친 김소아는 눈을 감고 돌아누웠다. 서준우가 한동안 침대 곁에 서 있는 기척이 느껴졌다. 그러다 한참 뒤에야 병실 문이 닫혔다. 그 뒤로 며칠 동안 서준우는 매일 병실에 왔다. 침대 옆에 앉아서 서류를 처리하다 가끔씩 물었다. “많이 아파?” 그럴 때마다 김소아는 고개만 저었다. 하지만 잠들었다 깨어날 때마다 곁에는 아무도 없었다. 대신 간호사들이 나누는 작은 목소리가 들렸다. “옆 VIP 병실 임지연 씨 남자친구가 정말 잘해 주더라. 밤새 옆에 있던데?” “XS그룹 후계자라던데. 잘생기기까지 했는데 여자친구한테도 엄청 잘하나 봐.” 김소아는 눈을 감았다. 아무것도 듣지 못한 척했다. 퇴원하는 날에는 서준우가 직접 데리러 왔다. 아직 완전히 낫지 않은 발을 조심하면서 차 앞으로 걸어갔다. 그런데 문을 열려던 손이 멈췄다. 임지연이 조수석에 앉아 있었다. 김소아를 보자 부드럽게 웃었다. “소아 씨, 저도 가는 길이라 같이 좀 타도 괜찮죠? 제가 멀미가 있어서 꼭 앞자리에 앉아야 하거든요.” 서준우가 미간을 살짝 찌푸렸다. 뭔가 설명하려는 것 같았지만 김소아가 먼저 말했다. “괜찮아요.” 김소아는 아무렇지 않게 뒷좌석에 앉았다. 그리고 남의 일이라도 되는 듯 앞에 앉은 두 사람의 뒷모습을 바라봤다. 서준우는 룸미러로 김소아를 한번 바라봤다. 뭔가 말을 꺼내려다 결국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차는 화려한 별장 앞에 멈춰 섰다. 그제야 김소아는 집으로 가는 길이 아니라는 걸 깨달았다. 서준우가 데려온 곳은 상류층에서도 이름난 집안의 결혼식이었다. “저 사람 서준우 아니야? 그런데 여자 둘을 데리고 왔네?” “흰 원피스 입은 쪽이 김소아지? 엄청 가난하게 살았다던데.” “아무래도 임지연이 서준우랑 더 잘 어울리지. 집안도 비슷하고.” 주변에서는 김소아에게 들으라는 듯 수군거림이 이어졌다. 김소아는 아무것도 듣지 못한 것처럼 구석에 조용히 서 있었다. 서준우는 내내 임지연의 곁을 지켰다. 마실 것을 챙겨 주고, 추울까 봐 옷까지 걸쳐 줬다. 바라보는 눈빛도 한없이 다정했다. 그때 임지연이 김소아에게 다가와 친근하게 팔짱을 꼈다. “소아 씨, 친구들을 소개해 줄게요.” 김소아가 거절할 틈도 없이 임지연은 상류층 여성들이 모여 있는 곳으로 데려갔다. “이쪽은 김소아 씨예요. 준우 씨의... 여자친구.” 임지연은 웃으면서 소개를 마친 뒤 자연스럽게 G국어로 말을 바꿨다. 주변 사람들과 유창하게 대화를 이어 갔다. 몇몇은 잠시 놀란 듯했지만, 이내 함께 G국어로 이야기를 나누며 웃었다. 김소아만 대화에서 완전히 소외되어 있었다. “소아 씨?” 임지연이 갑자기 다시 말을 걸었다. “소아 씨 생각은 어때요?” “네?” “아, 미안해요. G국어를 못 하시는 걸 깜빡했네요.” 임지연이 미안하다는 듯이 웃으면서 주변 사람들에게 말했다. “김소아 씨는 외국어를 배운 적이 없대요. 다들 이해해 주세요.” 주변에서 낮은 웃음소리가 흘러나왔다. 김소아는 말없이 서 있었다. “괜찮아요. 지금부터 천천히 배우면 되죠.” 임지연이 달래듯 김소아의 손을 가볍게 두드렸다. 목소리는 더없이 다정했다. 김소아는 시선을 내리깐 채 손톱이 손바닥에 파고들 정도로 주먹을 꾹 쥐었다. 비웃음과 동정이 뒤섞인 시선이 사방에서 쏟아졌다. 김소아는 그 자리에 서 있는 것조차 견디기 힘들었다. 목이 꽉 조여 오는 것처럼 숨쉬기조차 답답했다. 제6화 그때 행사를 주최한 사람이 간단한 이벤트를 하나 제안했다. 커플이 함께 무대에 올라 피아노를 연주하고, 가장 좋은 무대를 보여 준 팀에게 고가의 주얼리 세트를 선물로 주는 이벤트였다. “저 주얼리 진짜 예쁘다.” 임지연의 눈이 반짝였다. 서준우의 소매를 잡아당기면서 애교 섞인 목소리로 말했다. “준우 씨, 곧 내 생일이잖아. 소아 씨랑 같이 나가서 저거 받아 주면 안 돼?” 주변에 있던 여자들이 웃음을 터뜨렸다. “지연아, 그건 너무 무리한 부탁 아니야? 소아 씨는 G국어도 못 하는데 피아노 같은 걸 어떻게 쳐. 그냥 지연이 네가 준우 씨랑 같이 하지 그래?” 누군가 말을 보탰다. 임지연이 서준우를 바라봤다. “괜찮아?” 서준우는 별다른 표정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임지연은 김소아를 힐끗 바라보더니 웃으며 말했다. “그럼 준우 씨를 잠깐만 빌릴게요.” 두 사람이 무대에 올라갔다. 연주가 시작되자 장내가 조용해졌다. 임지연의 손가락이 건반 위를 빠르게 오갔다. 서준우도 자연스럽게 연주를 맞췄다. 두 사람은 마치 오랫동안 함께 연주해 온 사람들처럼 호흡이 잘 맞았다. 주변에서는 감탄이 이어졌다. 그러자 김소아 곁으로 임지연의 친구들이 몰려들었다. “김소아 씨, 잘 봐요. 저 정도는 돼야 어울리는 거예요.” 한 여자가 비웃으며 말했다. “G국어도 못 하고 피아노도 못 치면서 서준우 같은 남자랑 어울린다고 생각해요? 눈치가 있으면 알아서 사라져요.” “예전에 엄청 가난한 동네에서 살았다면서요? 그런 데서 어떻게 살았대?” “그러게. 아무리 꾸며도 가난한 티는 못 숨기나 봐.” “형편도 안 되는 사람이 괜히 욕심을 내면 자기만 우스워지는 거예요.” 주변에서 웃음소리가 터졌다. 김소아는 치맛자락을 움켜쥔 채 몸을 돌렸다. 더는 듣고 싶지 않았다. 그런데 걸음을 떼는 순간 누군가 일부러 발을 내밀었다. 김소아는 그대로 바닥에 강하게 넘어졌다. 온몸에 통증이 퍼졌다. 정신을 차릴 틈도 없이 붉은 하이힐 굽이 손목 위로 올라왔다. “어머, 미안해요.” 여자는 놀란 척 눈을 크게 떴다. 그러면서도 굽으로 김소아의 손목을 천천히 짓눌렀다. 뚝- 손목 안쪽에서 짧고 선명한 소리가 났다. 김소아는 눈앞이 하얗게 변할 만큼 아팠다. 본능적으로 피아노 앞에 앉아 있는 서준우를 바라봤다. 입을 열어 보려고 했지만 목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그저 서준우를 바라볼 뿐이었다. 마침 서준우도 이쪽을 한 번 쳐다봤다. 딱 한 번이었다. 곧 아무 일도 아니라는 듯 시선을 거두고 임지연의 악보를 넘겨줬다. 김소아는 입술을 꽉 깨물었다. 울음소리만큼은 내고 싶지 않았다. 문득 3년 전 일이 떠올랐다. 마트에서 아르바이트를 하다 손가락을 조금 베였던 날이었다. 서준우는 연락을 받자마자 일도 내팽개치고 달려왔다. 별것 아닌 상처니 괜찮다고 해도 억지로 김소아를 병원에 데려갔다. 의사가 작은 상처라 따로 치료할 필요가 없다고 했는데도 밤새 곁을 지켰다. 혹시라도 열이 나거나 덧날까 봐 걱정했다. 그런데 지금은 손의 뼈가 부러질 만큼 다쳤는데도 서준우는 시선조차 주지 않았다. 무대 위에서 서준우와 임지연은 서로를 바라보며 웃고 있었다. 그 모습이 너무도 자연스러웠다. “윽...” 여자는 하이힐 굽에 더욱 힘을 실었다. 손목에서 다시 한번 끔찍한 통증이 터져 나왔다. 견디기 힘든 통증이 김소아의 온몸으로 번졌다. 시야도 점점 흐려졌다. 의식을 잃기 직전에 피아노 연주가 끝났다. 곧이어 큰 박수가 쏟아졌다. ... 김소아가 눈을 떴을 때 병실에는 소독약 냄새가 가득했다. 의사는 서준우에게 상태를 설명하고 있었다. “김소아 씨 손목은 분쇄 골절입니다. 회복하더라도 후유증이 남을 가능성이 높고, 앞으로 무거운 물건을 들기는 어려울 겁니다.” 의사가 잠시 김소아 쪽을 바라봤다. “당분간 통증도 심할 테니 잘 돌봐 주셔야 합니다.” 김소아의 얼굴이 순식간에 하얗게 질렸다. 무심코 손을 들어 침대 옆 물컵을 집으려고 했다. 하지만 손목을 타고 올라오는 통증에 손에 힘이 풀렸다. 쨍그랑! 컵이 바닥으로 떨어져서 깨졌다. 의사와 서준우가 동시에 돌아봤다. 의사는 짧게 한숨을 쉬고 병실을 나갔다. 서준우는 곧바로 침대 옆으로 다가오더니 새로 물을 따라 건넸다. 잠시 입을 다물고 있던 남자가 미간을 찌푸렸다. “미안해.” 목소리는 조금 굳어 있었다. “그때 연주 중이라 당신이 넘어진 걸 못 봤어.” 잠시 멈췄다가 물었다. “많이 아파?” 김소아는 서준우를 바라봤다. 그러자 무대 위에서 임지연을 다정하게 바라보던 모습이 먼저 떠올랐다. ‘정말 못 본 걸까?’ ‘아니면 보고도 신경 쓰지 않은 걸까?’ 김소아는 천천히 눈을 감았다. 가슴속 깊은 곳에서 올라오는 감정을 억눌렀다. 그리고 또박또박 말했다. “경찰에 신고할 거야.” 서준우가 멈칫했다. “뭐?” 김소아는 깁스를 한 손을 들어 보였다. 눈가가 붉어졌지만 눈물은 흘리지 않았다. “방금 의사 말 못 들었어? 내 손이 이렇게 됐어. 그 사람들이 한 짓인데 책임은 져야 하잖아.” 서준우의 표정이 미묘하게 굳었다. “무거운 걸 못 드는 것뿐이잖아.” 김소아는 말없이 그를 바라봤다. 서준우는 대수롭지 않다는 듯이 말을 이었다. “예전처럼 당신이 힘든 일 할 필요도 없잖아. 지금은 내가 있는데.” 잠시 뒤 서준우가 덧붙였다. “그리고 다 지연이 친구들이야. 당신이 경찰에 신고하면 지연이도 곤란해져.” 서준우는 미간을 찌푸린 채 김소아를 바라봤다. “꼭 이렇게까지 해야 해?” 제7화 김소아는 입술을 꽉 깨물었다. 입안으로 비릿한 피 맛이 퍼졌다. 고작 임지연이 곤란해진다는 이유로 자신이 이 일을 그냥 참고 넘어가야 하는 걸까? “나는 신고할 거야.” 김소아는 다시 한번 분명히 말했다. 서준우는 잠시 침묵했다. 그러다 갑자기 수표책을 꺼냈다. “그렇게까지 해야겠다면 내가 대신 보상할게.” 펜이 수표 위를 긁는 소리가 유난히 크게 들렸다. 김소아는 말없이 그 모습을 바라봤다. 서준우가 금액을 적어서 수표를 내밀었다. 김소아가 받지 않자, 금액이 적다고 생각했는지 곧바로 수표를 찢었다. 그리고 다시 새로운 수표에 숫자를 적었다. 한 번. 두 번. 세 번. 금액은 계속 올라갔다. 마침내 200억 원이 적힌 수표가 김소아 앞에 놓였다. 그 순간 3년 전 비가 오던 밤이 떠올랐다. 당시 두 사람은 아주 작은 단칸방에서 함께 살고 있었다. 새벽 세 시가 되어서야 아르바이트를 마치고 돌아온 서준우는 온몸이 비에 젖어 있었다. 그러면서도 환하게 웃으며 김소아를 꼭 끌어안았다. “소아야, 나 꼭 200억을 벌 거야.” 이어서 진지한 얼굴로 말했다. “당신 다시는 힘들게 안 할게.” 그 약속은 결국 이루어졌다. 다만 김소아가 상상했던 방식은 아니었다. 이제 서준우에게 200억 원은 수표에 아무렇지 않게 적을 수 있는 돈이었다. 그리고 그 돈으로 자신을 짓밟은 사람들의 잘못을 없던 일로 만들려 하고 있었다. “200억이면 됐어?” 서준우가 다시 수표를 내밀었다. 김소아는 떨리는 손으로 수표를 받아 들었다. 그러다 갑자기 웃음이 나왔다. 웃고 있는데 눈물이 흘렀다. 수표 위로 눈물이 떨어지며 잉크가 살짝 번졌다. “됐어.” 목소리가 잔뜩 쉬어 있었다. “서준우.” 김소아는 손에 든 수표를 내려다봤다. “그때 했던 약속, 결국 지켰네.” 서준우가 잠시 멈칫했다. 미간을 찌푸리는 모습으로 봐서는 무슨 뜻인지 이해하지 못한 듯했다. 당연했다. 낡은 단칸방에서 김소아를 꼭 안고서, 반드시 큰돈을 벌어 행복하게 해 주겠다고 말했던 서준우는 이미 오래전에 사라졌다. 그때의 서준우는 이제 어디에도 없었다. 그날 이후 서준우는 병원에 다시는 오지 않았다. 대신 매일 오전 10시가 되면 비서가 정확히 병실을 찾았다. 손에는 고급스럽게 포장된 건강식품 상자를 들고 있었다. 오늘은 제비집 영양제, 어제는 보약, 그 전날에는 콜라겐 제품이었다. “대표님께서 요즘 일이 너무 바쁘다고 전해 달라고 하셨습니다.” 비서는 정중하지만 딱딱한 태도로 말했다. “잘 회복하시기 바란다고 하셨습니다.” 김소아는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시선은 침대 옆 탁자에 쌓인 뜯지도 않은 선물 상자로 향했다. 포장지 위 금박 로고가 햇빛을 받아 반짝였다. 선물은 화려했지만 김소아에게는 아무 의미도 없었다. 비서가 나간 뒤 김소아는 핸드폰을 들었다. SNS를 열자 임지연이 새로 올린 게시물이 보였다. 사진 속 임지연은 서준우의 어깨에 기대고 있었다. 뒤로는 D국의 푸른 바다와 하늘이 펼쳐져 있었다. 게시물에는 짧은 글이 적혀 있었다. [바쁜 와중에도 시간 내 줘서 고마워.] 김소아는 한동안 사진을 바라봤다. 한참이 지나서야 화면에서 시선을 뗐다. 서준우가 말한 바쁜 일이 뭔지 이제야 알 수 있었다. 임지연과 D국에서 휴가를 보내느라 바빴던 것이다. 핸드폰을 끄려던 순간 문자 하나가 들어왔다. [김소아 님, 비자 신청이 최종 승인되었습니다. 내일 발급 완료 예정이니, 신분증 원본을 지참하고 업무 시간 내 방문해 주시기 바랍니다.] 김소아는 그 문자를 몇 번이고 다시 읽었다. 그러다 웃음이 나왔다. 웃고 있는데 또 눈물이 흘렀다. 핸드폰 화면 위로 떨어진 눈물 때문에 ‘최종 승인’이라는 글자가 흐릿하게 번졌다. 드디어 끝이었다. 더는 시계의 초침 소리를 들으면서 서준우가 돌아오기를 기다리지 않아도 됐다. 한밤중에 식어 버린 밥을 혼자 삼킬 일도 없었다. 한미정의 경멸 어린 시선을 견딜 필요도 없었다. 무엇보다도 이제는 지난 기억을 억지로 붙잡은 채 조금씩 무너져 가던 자신을 놓아줄 수 있었다. 다음 날 점심. 김소아는 퇴원 수속을 마쳤다. 곧바로 대사관 비자 발급 센터에 들러서 여권을 찾고 비행기 티켓까지 챙겼다. 집으로 돌아오자 거실에 서준우와 임지연이 서 있었다. 경호원들이 임지연의 짐을 방으로 옮기고 있었다. 김소아가 들어오자 두 사람이 동시에 바라봤다. 서준우가 잠시 눈을 내리깔았다가 먼저 설명했다. “지연이 부모님이 해외여행을 가셨어. 혼자 있으면 무섭다길래 한동안 여기서 지내기로 했어.” 이어 당연하다는 듯 덧붙였다. “우리 집안과 지연이 집안은 오래전부터 알고 지낸 사이야. 회사끼리 일도 같이 하니까 내가 지연이를 챙기는 게 맞아.” 사실 이제는 설명하지 않아도 됐다. 오늘부터 두 사람은 아무 관계도 아니게 될 테니까. 김소아는 그저 고개를 끄덕이고 계단 쪽으로 향했다. 그때 임지연이 불러 세웠다. “소아 씨.” 김소아가 돌아보자 임지연이 웃으며 말했다. “이따 준우 씨랑 같이 뮤지컬 보러 갈 건데, 소아 씨도 같이 갈래요?” 김소아가 대답하기도 전에 서준우가 먼저 말했다. “손도 아직 다 안 나았잖아. 집에서 쉬어.” 잠시 김소아를 바라보더니 덧붙였다. “그리고 당신은 그런 거 봐도 잘 모르잖아.” 김소아의 걸음이 멈췄다. 천천히 돌아본 얼굴에는 옅은 미소가 떠올라 있었다. “그러게.” 조용한 목소리가 이어졌다. “난 잘 모르지.” 두 사람이 떠나고 얼마 지나지 않아서 김소아도 짐을 모두 정리했다. 침실 한가운데 서서 천천히 방 안을 둘러봤다. 한때는 수많은 기대를 품었던 곳이었다. 그러나 이제는 아무것도 남지 않은 기분이었다. 테이블 위에는 여전히 두 사람이 함께 찍은 사진이 놓여 있었다. 사진 속 서준우는 세상에 김소아밖에 없는 사람처럼 다정한 눈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김소아는 액자를 가볍게 쓸었다. 그런 뒤 사진이 보이지 않도록 뒤집어 놓았다. 현관으로 내려간 그녀는 열쇠를 수납장 위에 올려놓았다. 마지막으로 문을 닫았다. 3년 전, 비가 억수같이 쏟아지던 밤. 김소아는 골목에서 온몸이 피투성이가 된 남자를 발견했다. 그날부터 서준우는 김소아의 세상 전부가 됐다. 그리고 3년이 지난 오늘. 김소아는 캐리어를 끌고서 그가 있는 세상에서 조용히 걸어 나왔다. 뒤편 집의 불빛이 점점 멀어졌다. 그러나 김소아는 끝내 뒤를 돌아보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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